소설리스트

3장 (3/28)
  • 3장

    ***

    못 박힌 듯 서 있는 리하트를 뒤로하고, 카르한이 일리아의 뒤를 따랐다.

    “옆에서 걸어요.”

    일리아의 말에 카르한이 머뭇거리다가 옆으로 다가섰다. 나란히 걷게 된 일리아는 시선을 내려 카르한의 손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카르한이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저도 모르게 움직였습니다.”

    리하트가 일리아를 향해 손을 뻗기에 반사적으로 붙잡긴 했는데,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당황했다고 그가 말했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일리아가 감사를 표하자, 카르한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이윽고 그가 눈을 내리깔았다. 무뚝뚝한 얼굴로 쑥스러워하는 모습은 무척 기묘했지만, 본판이 좋아서 그런지 나쁘진 않았다.

    일리아는 고개를 돌려 리하트가 서 있던 골목을 바라보았다. 그사이 리하트는 자리를 뜨고 없었다. 제 앞에서는 늘 당당하더니, 카르한의 눈빛 한 번에 꼬리를 말고 사라지니 우스웠다.

    일리아는 텅 빈 골목에서 카르한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눈이 마주친 순간 카르한이 움찔했다.

    “그런데 소공자, 연기 연습 좀 하셔야겠어요.”

    “많이 형편없었습니까……?”

    일리아는 느낀 대로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멈추었다. 안 그래도 심약한 사람한테 처음부터 상처를 줄 필요는 없지. 지금은 당근과 채찍이 적절해야 할 시기였다.

    “아주 나쁜 건 아니고……, 처음치곤 잘했어요.”

    그의 경직된 어깨가 조금 풀렸다. 솔직히 너무 갑작스럽긴 했다. 연인 연습을 해볼 기회도 없이 리하트와 마주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리하트가 등장한 후로 카르한은 고장 난 것 같았다. 만약 리하트가 꼬리를 말고 도망치지만 않았더라면 들통 났을 것이다.

    다행히 사나운 인상이 도움이 되었지만……. 이대로라면 호구인 걸 들키기는 시간 문제였다. 도대체 지금까지 어떻게 안 들킨 거지? 그것이 의문이었다.

    ***

    일리아는 옷가게에 들어와, 카르한에게 화사한 색감 위주로 옷을 골라주었다. 카르한은 일단 입으라고 하니 입긴 했지만, 어색한 눈치였다.

    재력 담당을 맡은 일리아는 그에게 옷을 사준 후에 다음 만남 때 꼭 입고 오라고 엄포를 놓았다.

    언제 만날지 약속까지 잡은 후 그와 헤어졌다. 너무 피곤했기에 볼일은 보지 않고 곧장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해가 지기 전, 마차는 저택 현관에 도착했다.

    “수고했어.”

    일리아는 마차에서 내리며 프란체와 말렉에게 말했다. 말렉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대답했고, 프란체는 우물쭈물했다.

    “왜? 무슨 할 말 있어?”

    “……아가씨께서는 정말 괜찮으십니까?”

    일리아가 프란체를 빤히 바라보았다. 머뭇거리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런 계약을…….”

    “프란체.”

    말렉이 바로 프란체의 말을 끊어냈다. 주제 넘는 발언은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프란체가 곧바로 입을 다물자, 일리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늘 두 사람은 일리아를 따라다니며 모두 지켜보았다. 카르한과 파혼 동맹 계약을 맺은 것도 말이다. 프란체가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일리아는 시무룩해 보이는 프란체를 향해 미소 지었다.

    “내가 결정한 일이야. 너무 걱정하지 마.”

    “……그때는 몰랐지만 알고 보니 무척 위험한 분이지 않습니까.”

    오르골 가게에서 만났을 때는 그저 지나가는 호구에 불과했다. 그러나 사실은 에반테온 소공자였고, 프란체는 그에 대한 소문을 알고 있었다.

    “네가 보기엔 위험해 보였어?”

    프란체가 입을 다물었다. 그가 지켜본 카르한은 소문과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개차반에 성격 나쁜 쓰레기일 줄 알았는데, 정반대였다.

    “그리고 리하트 퇴치하는 데 괜찮더라고.”

    농담 삼아 말했지만, 만약 카르한이 아니었다면 무슨 짓을 당했을지도 몰랐다. 프란체와 말렉에게 리하트랑 엮인 일에는 절대 나서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끝끝내 프란체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오늘 있었던 일은 전부 비밀이야. 알지?”

    “예.”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아는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평상시처럼 고용인들의 인사가 들려오고, 일리아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중앙 홀 계단 위에 중년 남녀가 서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부모님이었다.

    “일리아!”

    대화를 나누던 블로든 백작이 일리아를 발견하고 서둘러 계단을 내려왔다. 코앞까지 달려온 그가 일리아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많이 걱정했다. 이번에 얼굴도 못 보고 지방에 다녀오느라…….”

    블로든 백작이 일리아를 보고 울먹였다. 덩치도 크고 산적같이 험상궂은 얼굴이었지만, 누구보다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얼굴이 많이 해쓱해졌구나. 식사는 제대로 하고 있고?”

    “저는 괜찮아요.”

    일리아의 대답에도 그는 이러다가 쓰러지는 거 아니냐며 호들갑을 떨었다. 저를 걱정하는 아버지를 겨우 안심시킨 후, 일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계단 위에 서 있는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표정 없이 일리아를 내려다보다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일단 방으로 들어가자꾸나.”

    쌀쌀맞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깨닫고 말았다.

    ‘화가 많이 나셨구나.’

    백작부인이 먼저 계단을 올라가버리고, 백작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네 어머니가 걱정 많이 했단다.”

    한 달 동안 방에 틀어박혔으니 그럴 만했다.

    일리아는 백작과 함께 계단을 올라갔다. 명화로 가득 채워진 복도를 쭉 걸어, 응접실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먼저 자리에 앉아 있는 백작부인이 보였다.

    “앉으렴.”

    일리아는 천천히 맞은편에 앉았다. 백작은 마치 청문회에 불려온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다가 일리아 옆에 슬그머니 앉으려 했다.

    “당신은 내 옆에 앉아야죠.”

    따끔한 한마디에 백작이 냉큼 부인 옆에 앉았다.

    “그래서, 이야기를 들어볼까?”

    백작부인, 비올레가 턱을 치켜들며 물었다. 일리아는 긴장해서 주먹을 살짝 움켜쥐었다.

    어머니는 철혈의 여인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무서운 사람이었다. 가족들에게는 무척 다정다감했지만, 헤인리와 마찬가지로 리하트 때문에 사이가 조금 멀어졌다.

    그래도 그녀는 헤인리처럼 리하트를 아주 반대하지는 않았다. 못마땅하게 여기는 눈치였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번 일로 화가 많이 난 모양이었다.

    “제멋대로 구는 것도 한두 번이어야지. 이번엔 무슨 일인지 말해 보거라.”

    일리아가 잠시 머뭇거렸다.

    비올레는 사사로운 감정을 내려놓고, 냉정하게 판단 내렸다.

    “이제 넌 결혼할 텐데, 조금 다툰 것으로 한 달 동안 방에 박혀 있으면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겠어.”

    아무래도 비올레는 일리아가 리하트와 다퉈서 그랬던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리하트가 바람을 피웠다고 지금 말할지 고민되었다. 하지만 역시 이렇게 중요한 이야기는 헤인리까지 있을 때 해주는 것이 좋을 듯했다. 분명 바람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다들 격분해서 당장 리하트를 찾아가겠다고 난동을 피울 터였다.

    이제야 막 에반테온과 거래를 맺었다. 아직 준비된 것이 거의 없는데 테르시안 가문 전체와 척을 질 수는 없었다. 그리고 역시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비올레가 다시 훈계하려고 할 때, 일리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이야기는 오라버니까지 함께 있는 자리에서 말하고 싶어요.”

    일리아의 말에 백작부부는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했다.

    “……어머니, 아버지.”

    조용히 들려오는 목소리에 백작부부는 입을 다문 채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속 썩여서 죄송해요. 전부 잘못했어요.”

    일리아가 고개를 숙이자, 당황한 그들은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잠시 후 일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저 파혼하고 싶어요.”

    “……뭐?”

    예상치 못한 말에 백작이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비올레 또한 놀라서 그대로 굳어졌다.

    “변덕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안 될까요?”

    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일리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백작 부부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비올레가 고개를 흔들었다가 일리아를 찬찬히 살폈다.

    “아니, 오랜만에 무척 마음에 드는 소리긴 한데……. 너 어디 아프니?”

    헤인리랑 똑같은 반응이었다. 그만큼 일리아가 리하트에게 푹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리아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거래 내용은 비밀로 하기로 했으니 자세히 말할 수 없었지만, 카르한에 대해서 부모님께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았다.

    “아뇨, 멀쩡해요. 다만…….”

    “다만?”

    “새 연인이 생겼어요.”

    “뭐라고?!”

    백작이 소리를 질렀다. 비올레 또한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예상했던 반응이었기에, 일리아는 잠자코 있었다.

    한참 넋이 나가 있던 백작 부부는 이성을 되찾고, 저들끼리 숙덕였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래도 리하트보단 낫겠죠.”

    “일단 들어는 봅시다.”

    목소리는 낮추었지만 다 들렸다. 백작이 겨우 진정하고 자리에 앉았다. 비올레 또한 표정을 수습한 채 일리아를 똑바로 보며 물었다.

    “그래, 상대는 누구지?”

    “에반테온 소공자예요.”

    “……에반테온?”

    별생각 없이 따라서 되묻던 백작이 멈칫했다. 이윽고 백작이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성격 더럽고, 마주치는 놈마다 죽여서 살인귀로 유명한 그 에반테온?!”

    일리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이랑 다르긴 하지만, 그 에반테온이 맞긴 했다. 백작은 기어코 뒷목을 잡고 말았다.

    귀한 딸이 쓰레기를 버리나 했더니, 이번엔 감당할 수 없는 폭탄을 데려온 것이었다.

    ***

    늦은 오후의 빛이 들어오는 복도는 엄숙함을 품고 있었다. 가문의 역사를 품은 벽화는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듯했다. 감탄을 자아내는 훌륭한 복도였지만, 카르한에게는 깊은 굴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일정한 박자를 맞춘 발소리가 복도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이윽고 두 명의 고용인들이 그와 마주쳤으나, 고개를 숙인 채 빠르게 자리를 떴다. 마치 보면 안 될 것을 마주한 듯한 태도였다.

    복도 끝, 창문이 없어서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그곳에 문이 하나 있었다. 그 앞에 멈춰 선 카르한이 문을 열었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곧게 세운 몸이 조금 허물어졌다. 드넓은 에반테온 대저택에서 이곳만이 그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침실로 들어온 카르한은 침대에 앉아, 맞은편에 놓아둔 작은 거울을 응시했다. 타원형 거울에 저 자신이 비쳤다. 화사한 색감의 옷을 입은 스스로가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시선을 조금 올리니 무뚝뚝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집에 가서 표정 연습 많이 해두세요.

    헤어지기 전, 일리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카르한은 천천히 입매를 끌어올렸다. 그러나 눈매는 여전히 사나웠고, 입꼬리만 낚시 바늘로 걸어놓은 듯했다. 석고상이 미소 지어도 이 정도는 아닐 것 같았다.

    -내 배로 낳았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역겨우니 웃지 마라.

    잠시 잊고 있던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가벼운 떨림과 함께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갔다. 역시 자연스럽게 웃는 법을 알 수 없었다.

    카르한은 외투를 벗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추를 풀던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 항상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어왔는데, 그녀는 처음부터 저를 꿰뚫어보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무런 대가 없이 먼저 다가와서 도움을 주고, 사례를 했더니 화를 내고. 그러더니 갑자기 거래를 하자며, 저를 끌어들였다.

    “…….”

    카르한은 옷을 벗다 말고, 계약서를 꺼내들었다. 흰 종이 위에 검은 글씨로 계약 연애의 조항들이 주르륵 적혀 있었다.

    처음에는 일리아의 제안을 거절하기 위해 그 자리에 나갔다. 의사를 밝혔을 때, 일리아는 뜻밖의 물음을 던졌다.

    -소공자의 의견은요?

    -……제 의견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소공자의 약혼이잖아요. 결정은 당신이 하는 거예요.

    카르한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제 의사를 묻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는 지금껏 순응하는 삶에 익숙했다. 자신의 의사보다는 남들의 의견이 더 중요했다. 그래서 카르한의 인생에 선택지는 늘 하나뿐이었다. 타인에게 맡기고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렇게 하면 모두가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리아는 자신의 의견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해주었다.

    카르한은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대로 계속 휩쓸리기만 할 것인가.’

    질문이 던져지자마자 마음 한구석에 파문이 번졌다. 오랫동안 고여 있었던 만큼 파문은 점점 커져, 물결이 일었다. 물결은 곧 파도가 되어 카르한의 발치까지 밀려왔다. 잡념이 쓸려나간 자리에 남은 생각은 하나였다.

    ‘바뀌어보고 싶다.’

    그래서 일리아의 손을 잡기로 했다. 하지만 자신이 그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적어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노력해야 할 것이 수두룩했다.

    똑똑, 문을 두드려오는 소리에 카르한이 정신을 차렸다. 문을 열어주자, 한 남자가 복도에 서 있었다.

    “돌아왔습니다. 카르한 님.”

    암녹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 왔다. 그의 이름은 테시온 헤르벤. 카르한의 보좌관이자, 카르한이 유일하게 곁에 두는 사람이었다.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서 죄송합…….”

    천천히 고개를 들던 테시온이 카르한을 보고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아니, 그 옷은 뭡니까?”

    한 소리 들을 거라 각오는 했기에, 카르한은 일단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문이 닫히고, 테시온이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제가 어두운 옷만 입으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상한가?”

    “아니, 무척 잘 어울립니다! 하지만……!”

    테시온은 지금껏 카르한에게 어두운 옷만 입으라고 강요했다. 만만하게 보이면 안 된다는 이유였다.

    “제가 카르한 님의 성격을 감추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테시온이 한탄했다. 지금까지 카르한이 남들에게 진짜 성격을 들키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테시온 덕분이었다.

    테시온은 카르한이 이용당하기 딱 좋은 성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전장에서 목숨이 위험해질 뻔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래서 카르한이 후계자가 되었을 때, 다른 이들에게 휘둘리기 전에 미리 차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테시온은 카르한을 따라다니며 불순한 목적으로 다가오는 이들을 모두 잘라냈다. 거기다가 딱 맞춰 카르한을 둘러싸고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효과는 너무 좋았고 그 결과, 카르한은 완전히 고립되고 말았다.

    “설마 이번 연회에 그러고 가셨습니까?”

    카르한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테시온은 그나마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최대한 다가가기 어려운 느낌으로 나가야 합니다. 아니면 금세 카르한 님의 성격이 들켜버릴 겁니다.”

    “…….”

    “급한 일만 없었더라면 저도 따라갔을 텐데……. 그나저나 제가 말씀드린 대로 하셨습니까?”

    테시온은 자리를 비우기 전, 카르한에게 신신당부했다. 연회에서 누가 말을 걸어오면 무시할 것. 얼굴만 비치고 최대한 빨리 돌아올 것. 타인과 엮이지 말 것. 당부를 전부 어기게 된 카르한은 잠시 침묵했다.

    “설마…….”

    그때 침대 위에 놓인 종이 한 장이 테시온의 눈에 들어왔다. 테시온은 성큼성큼 걸어가, 곧바로 종이를 집어 들었다.

    “이건 무엇입니까.”

    당황한 카르한이 눈동자만 굴렸다. 계약서를 빠르게 읽어 내린 테시온이 소리쳤다.

    “카르한 님! 설마 제가 없는 사이, 사기 당하셨습니까?!”

    “사기는 아니지만…….”

    이미 숨기기엔 글러먹은 듯했다. 카르한은 한참 고민하다가 테시온에게는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카르한이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하자, 테시온의 얼굴이 점점 기괴해졌다. 설명이 끝났을 때, 테시온은 바르르 떨었다.

    “계약 연애라니, 어찌 제가 없을 때 그런 큰일을…….”

    그의 눈치를 보던 카르한이 조용히 말했다.

    “내 스스로 내린 결정이니까.”

    카르한의 대답에 테시온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휘말린 것도 실수도 아닌, 스스로의 결정이었다고 한다. 언제나 남들이 하라는 대로 고개만 끄덕이던 카르한이었기에 무척 낯설었다.

    테시온은 심각한 얼굴로 잠시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그가 고개를 들었다.

    “블로든 영애와 만나기로 약속하신 날은 언제입니까?”

    “……나흘 후.”

    “그때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테시온이 결의를 담아 중얼거렸다.

    “제가 직접 확인해봐야겠습니다.”

    ***

    카르한과의 두 번째 약속 당일이 왔다. 외출 준비를 하던 일리아는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카르한과 계약서를 주고받은 날, 일리아는 부모님에게 그와 연애한다고 밝혔다. 두 분은 뒤집어졌고, 백작은 다시 생각해보라며 만류했다. 하지만 반대했다가 리하트와 재결합할까 싶어서 적극적으로 말리진 못했다.

    일리아는 그동안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계획을 세웠다. 당장은 카르한과 연인 행세를 하면서 리하트와 파혼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파혼 선언은 했지만, 아직 리하트가 동의해주지 않은 상태였다.

    제국법상, 파혼은 서로의 동의가 필요했다. 대부분은 합의를 통해 파혼했지만, 한쪽이 일방적으로 파혼을 원하는 경우에는 진흙탕 싸움이 될 수 있었다. 심한 경우에는 재판까지 가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어떻게 결판을 볼 것인지가 고민이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누군가 급히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조금 거친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들어와.”

    일리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벌컥 열리며 말렉이 들어왔다. 급히 뛰어왔는지 그는 숨을 몰아쉬었다.

    “아가씨, 큰일 났습니다. 오늘 약속 장소에 못 가실 것 같습니다.”

    “왜? 무슨 일인데?”

    약속 장소라면 저번에 사들인 찻집이었다. 카르한과 비밀 거점으로 삼은 곳이기도 했다. 일리아의 물음에 말렉의 얼굴이 오묘해졌다. 좋은데 좋지 않은 그런 표정이었다.

    “황실에서 오늘 공문이 내려왔는데…….”

    황실 공문이라니. 설마……. 일리아는 불안한 눈으로 말렉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말렉의 설명이 끝나고 일리아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일단 에반테온 공작가에 사람을 보내서 약속 장소를 바꾸자고 해야겠어.”

    ***

    황급히 약속 장소를 바꾸게 된 일리아는 번화가로 나왔다. 마땅한 장소가 생각나지 않아서 오르골 가게에서 보자고 해두었다.

    저번에 매입한 오르골 가게에 도착하자, 새로 뽑은 점원이 인사를 건넸다. 싹싹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가게 안쪽으로 들어가니 응접실처럼 꾸며진 공간이 하나 있었다. 저번에는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는데, 생각보다 아늑했다. 가게에 손님이 많지 않아서 임시 거점으로 삼아도 괜찮을 듯했다.

    푹신한 소파에 앉으려는 그때, 가까이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것은 카르한이었다. 인사를 건네려던 일리아가 잠시 멈칫했다.

    카르한은 혼자가 아니었다. 뒤편에 서 있는 암녹색 머리카락의 남자를 본 일리아가 물었다.

    “그쪽은?”

    “……제 보좌관입니다.”

    난감해하던 카르한이 먼저 사과를 건넸다.

    “제 실수로 계약을 어기고 말았습니다.”

    일리아는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아무래도 보좌관이 파혼 동맹 계약을 알게 된 모양이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인가요?”

    “예.”

    “그럼 됐어요. 제 호위들도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카르한 측에서도 한 명쯤 비밀을 공유하는 사람이 있어도 상관없었다. 카르한에게서 시선을 뗀 일리아가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테시온 헤르벤입니다.”

    “반가워요. 일리아 블로든이에요.”

    인사를 마친 테시온이 일리아를 샅샅이 훑었다. 꼬투리 잡을 만한 걸 찾다 못해, 먼지까지 탈탈 털 기세였다. 탐색을 끝낸 테시온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나저나 약속 당일에 장소를 바꾸시다니……, 저희를 무시하시는 것은 아닙니까.”

    테시온의 한마디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일리아의 뒤편에 서 있던 프란체와 말렉이 험악해졌고, 카르한 또한 다급히 테시온을 쳐다보았다.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제 불찰이에요.”

    순순히 사과해올 줄 몰랐다는 듯 테시온이 움찔했다.

    “변명하자면, 약속 장소에는 더 이상 갈 수 없게 되었거든요.”

    “갈 수 없다니……?”

    “오늘 황실에서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되었다는 공문이 내려왔어요.”

    “……예에?”

    테시온은 당황한 나머지 멍청히 되묻고 말았다. 일리아는 익숙하다는 듯 덤덤히 말을 이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종종 있을지도 모르니 미리 양해 부탁드릴게요.”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제가 운이 좀 좋아서요.”

    운이 좀 좋은 수준이 아닌데……. 테시온은 딱 그런 표정이었다.

    이번 일로 일리아는 원래 시세의 50배나 되는 수익을 얻었다. 부동산 투자가 대박을 터뜨리며 하루아침에 돈방석에 앉은 것이었다.

    하지만 일리아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돈보다 조용히 머무를 수 있는 휴식공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일리아의 재물운은 이게 문제였다. 시도 때도 없이 강제로 돈을 안겨주었다.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일단 앉으세요.”

    카르한이 일리아의 맞은편에 앉고, 테시온은 가만히 서 있었다. 프란체와 말렉은 일리아의 뒤편에 섰다.

    “급히 정한 장소라…… 대접할 게 없네요.”

    “괜찮습니다.”

    카르한이 덤덤히 말했다. 일리아는 열심히 테시온을 노려보던 프란체에게 부탁했다.

    “프란체, 마실 것 좀 사다주겠어?”

    “……예.”

    프란체가 나가자 살벌하던 분위기가 조금 덜어졌다. 잠깐 침묵이 내려앉고, 테시온은 카르한을 한번 보았다가 일리아를 똑바로 응시했다.

    “블로든 영애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해보세요.”

    “계약을 파기해주십시오.”

    테시온이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말도 안 되는 계약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애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카르한 님을 끌어들이진 말아주십시오.”

    그의 행동은 보좌관이라기보단 보호자 같았다. 바로 본론부터 꺼내며 벽을 치는 것으로 보아,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카르한의 실체가 들통 나지 않은 것은 전부 테시온 덕분인 듯했다.

    “테시온.”

    카르한이 조용히 그를 불렀다. 그러나 테시온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카르한 님께서는 타인과 엮이는 것을 싫어하시니, 이만 포기하십시오.”

    차분히 그의 말을 듣던 일리아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테시온이 계약 연애에 대해 일침을 가했다면 자신도 이해했을 것이다. 굳이 이런 위험한 일을 할 필요가 있냐는 식으로 나왔다면 침착하게 설득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카르한이 일리아와 엮이면서 남들 앞에 나서게 될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물론 아주 납득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소문을 방패 삼아 더욱 가시 세우고 타인을 배척하면, 지금 일상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진짜 성격을 숨긴 채 남들에게 휘둘리지 않는 삶. 언뜻 보기엔 나쁘지 않았지만 세상에서 고립되는 길이기도 했다. 아이가 다칠까 봐 무서워서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부모와 같았다.

    “테시온이라고 했나요?”

    “예.”

    “당신은 정말 지금 소공자의 모습이 옳다고 생각하나요?”

    꿰뚫어보는 듯한 일리아의 시선에 테시온이 움찔했다.

    “보좌관이라면 알고 있겠죠. 소공자께서 어떤 소문에 시달리시는지.”

    테시온은 침묵했다. 카르한에 대한 소문은 그의 귀에도 전부 들려왔다. 가끔은 반박하고 싶을 정도로 악의에 가득 찬 소문도 있었다.

    “아무와도 엮이지 않는다면 당장은 편하겠죠. 하지만 평생 남들과 교류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평생이라니, 그렇게까진…….”

    테시온이 부정하려 하자, 일리아는 그의 말을 끊어냈다.

    “오해는 점점 깊어질 거예요. 당사자가 부정하지 않는데, 누가 아니라고 생각하겠어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테시온이 눈동자만 굴렸다.

    “숨길 것이 아니라, 바꿔볼 생각은 왜 안 하는 거죠?”

    “……!”

    지금까지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얼굴이었다. 혼란으로 가득 찬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지금껏 일리아를 마주 보던 그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떨어졌다. 가만히 듣고 있던 카르한이 그를 불렀다.

    “테시온.”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테시온이 천천히 카르한을 보았다. 카르한은 냉정할 정도로 평소와 같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새파란 눈동자만큼은 별처럼 무수한 말들을 품고 있었다.

    “지금까지 신경 써줘서 고맙다.”

    수많은 말을 골라서 내놓은 한마디에 테시온이 울컥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나는 바뀌고 싶다.”

    테시온은 충격 받은 듯 입술만 벌렸다. 지금까지 카르한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세상으로부터 격리한 것은 테시온 자신이었다.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고, 카르한도 제 의견을 묵묵히 따라주었다. 하지만 아니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테시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카르한은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묵묵히 그를 바라보았다.

    “다녀왔습니다!”

    경쾌한 목소리와 함께 프란체가 안으로 들어섰다. 양손 가득히 음료를 든 프란체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잠깐 멈춰 섰다.

    프란체가 말렉을 쳐다보았다. 지금 분위기 왜 이래? 그가 눈으로 묻자, 말렉이 똑같이 눈빛으로 대답해주었다. 아가씨가 한 놈 교화시켰다.

    잠시 멈춰 서 있던 프란체는 상황을 파악하고 목청을 높였다.

    “아가씨! 종류별로 사왔습니다.”

    프란체는 일부러 과장된 몸짓으로 테이블에 음료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무엇을 사오라고 지정하지 않았기에 가게를 다 털어온 듯했다.

    “일단 뭐 좀 마시고 자세히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일리아는 쌉싸름한 자몽주스를 집어 들었다. 수많은 음료를 눈앞에 둔 카르한은 잠시 고민했다. 그가 자연스럽게 홍차가 든 컵을 집어 들었다.

    “왜 그거 드세요? 과일음료 좋아하시는 것 같던데.”

    일리아의 물음에 카르한이 멈칫했다. 그러자 테시온이 대신 대답했다.

    “카르한 님께서는 단 거 안 드십니다.”

    “단 거 싫어해요? 먹고 싶은 얼굴이었는데.”

    일리아의 물음에 카르한이 머뭇거렸다. 테시온의 눈치를 보던 카르한이 조용히 말했다.

    “……단 거 좋아합니다.”

    크게 충격 받은 듯 테시온이 입을 벌렸다.

    “아니……, 단것을 좋아하신다고요?”

    정말로 처음 들어본다는 물음에 카르한이 한마디 했다.

    “다들 권하지 않아서.”

    테시온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는 복잡한 얼굴이 되었다. 지금껏 가장 가까이서 카르한을 모셔왔지만 취향조차 알아채지 못했다는 사실에 그는 침울해졌다.

    테시온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일리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영애께서는 어떻게 알아보신 겁니까?”

    “얼굴에 쓰여 있던데요.”

    “……?”

    미궁에 빠진 듯 테시온의 머리 위에 물음표만 그려졌다. 그는 다시 카르한을 바라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전혀 모르겠는데……? 딱 그런 표정이었다.

    혼란스러워하는 테시온을 보던 일리아가 음료를 내려놓았다.

    “그럼 이제 우리가 계약하게 된 이유를 말해줘야겠군요.”

    일리아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상세히 말해주었다. 카르한과 자신은 목적이 일치해서 계약을 맺었다는 것. 당분간 연인 행세를 하며 약혼자를 떨쳐낸 후에 각자 갈 길을 가기로 했다고 설명을 마쳤다. 테시온은 그제야 납득한 눈치였다.

    “……제가 오해했습니다.”

    테시온이 부끄러워하며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불순한 목적으로 카르한 님께 접근한 사람들이 워낙 많은지라…….”

    “이해해요.”

    솔직히 말해서 일리아도 카르한의 진짜 성격을 몰랐다면 거래를 청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연회에서 처음 만났더라면 소문만 믿고 아예 엮일 생각도 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런데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됩니까?”

    테시온은 계약서에 적힌 조항을 짚었다.

    -정해진 기간 동안 가짜 연인으로서 서로에게 충실할 것.

    “가짜연인 행세가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말 그대로 남들 앞에서는 죽고 못 사는 연인인 척하는 거예요.”

    일리아의 설명에 테시온의 눈동자가 스르륵 카르한에게 향했다.

    “……그런 거 못하시는데.”

    “그런 것 같더라고요.”

    이미 리하트를 만났을 때 느꼈다. 카르한은…… 연기에 재능이 없었다. 연기를 못하면 표정이라도 다채로웠으면 좋겠지만, 어떻게 웃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일리아는 저번에 카르한에게 한 번만 웃어보라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꿈에 나올 것 같았지…….’

    입꼬리만 올린 카르한은 악당 그 자체였다. 억지로 웃는 얼굴은 안 하니만 못했다. 사실 그걸 다 떠나서 일단 서로 가까워지는 것부터가 시급했다.

    “그럼 오늘 만난 김에 연습을 좀 하는 건 어때요?”

    결정을 내린 일리아가 카르한에게 콕 집어서 물었다.

    “소공자, 연애해본 적 있어요?”

    주위는 순식간에 숙연해졌다. 그리고 카르한은 침묵했다. 설마 했는데, 아직까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천천히 테시온에게 시선을 옮겼다. 방금까지 열심히 떠들어대던 테시온이 눈을 피했다.

    ‘뭐, 그래……. 바빠서 연애 못 해봤을 수도 있지.’

    일리아는 제 뒤에 서 있는 프란체와 말렉을 바라보았다. 말렉 또한 테시온과 마찬가지로 눈을 내리깔았다.

    말렉은 이미 아이가 두셋 정도는 있을 나이였으나 아직 장가를 가지 않았다. 연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본 적도 없었다. 본인이 딱히 연애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프란체는…….

    ‘너는 연애 안 하는 게 좋겠다.’

    겉모습과 속이 너무 달라서 연인이 도망칠지도 몰랐다. 겉으로 보기엔 학문에 전념할 것 같은 차분하고 곱상한 도련님인데, 실상은 온갖 깽판을 치고 다녔다.

    결국 이곳에서 유일한 연애 경험자인 일리아가 제안을 던졌다.

    “우리 이제부터 데이트 하러 갈 거예요.”

    데이트라는 말에 모두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일리아도 리하트와 연애한 경험이 전부라는 것이었다. 연애라는 이름을 붙이면 안 되는 일방적인 관계였다.

    결국 여기서 정상적으로 연애를 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야기가 끝나고, 일리아는 오르골 가게를 나섰다. 일리아를 선두로 네 명의 남자가 졸졸 따라왔다. 왠지 새끼 오리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어미 오리가 된 것 같았다.

    ‘지금까지 어떤 식으로 데이트를 했더라.’

    제 입으로 데이트 하자고 큰소리치긴 했는데, 막상 떠오르는 게 별로 없었다.

    참고할 만한 것을 찾기 위해 과거를 회상하던 일리아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자연스럽게 리하트가 떠오른 탓이었다. 그러고 보니 데이트는 전부 리하트와 했었다.

    ‘그 자식이랑 데이트할 때는 항상 쇼핑을 했지…….’

    대부분은 상점가를 돌아다녔고, 가끔씩 인기 있는 연극이 있을 땐 극장을 찾았다. 좀 더 특별한 것을 찾으려고 했지만,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고민을 마친 일리아가 제안했다.

    “옷 보러 갈래요?”

    “……네?”

    “저번에 급하게 옷을 고른 게 생각나서요. 가볍게 쇼핑부터 해요.”

    카르한이 삐걱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트라는 단어가 나온 후로 그는 고장 난 것 같았다. 일리아는 측은한 시선을 보냈다.

    얼굴은 정말 잘생겼는데……. 솔직히 말해서 얼굴만큼은 일리아의 취향이었다. 인기 연극배우의 뺨을 몇 대나 후려칠 만한 미남이었다.

    거기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훌륭한 몸까지 가지고 있었다. 사나워 보이는 인상만 어떻게 하면 그에게 사랑을 고백할 이들이 줄을 설 터였다.

    “그리고 앞으로 서로 이름으로 불러요. 연인처럼 보여야 하니까요.”

    아직 어색한 듯 그는 입술만 달싹였다.

    “카르한, 일단 제 옆에 서줄래요?”

    이름이 불리자, 카르한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는 뻣뻣한 몸을 움직여 일리아의 옆에 섰다. 여전히 냉랭한 얼굴인데, 단정한 머리카락 사이로 살짝 붉어진 귀가 보였다.

    그 정도로 쑥스러워 하다니. 테시온이 카르한에게 접근하는 이들을 괜히 막아 세운 것이 아니었다. 카르한은 이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가기엔 심각하게 여린 남자였다.

    ‘소문은 너무 개차반처럼 났고, 적당히 나쁜 남자 정도만 되면 좋겠는데.’

    하지만 지금 하는 걸 봐서는 나쁜 남자도 과욕이었다.

    상념에 잠겨 있던 일리아는 자연스럽게 어느 옷가게 앞에 도착했다. 고개를 들어 간판을 확인했다. 리하트가 가장 좋아하던 옷가게였다. 다른 곳으로 갈까 하다가 굳이 피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가씨,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말렉이 가게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다 같이 들어가면 번잡할 것 같아, 프란체와 말렉 그리고 테시온은 바깥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일리아는 카르한과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블로든 님!”

    “어서 오십시오!”

    흩어져 있던 직원들이 블로든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바로 뛰쳐나왔다. 활짝 웃으며 일리아를 맞이하던 그들은 나란히 들어온 카르한을 보고 멈칫했다. 당연히 리하트일 거라고 생각했는지 당황한 눈치였다.

    그러나 이 업계에서 오랫동안 굴렀던 만큼 눈치가 빨랐다. 그들은 아무것도 못 본 척 웃으며 말을 걸었다.

    “찾으시는 물건이 있으십니까?”

    “천천히 구경할게요.”

    일리아의 대답에 직원들은 전부 뒤로 빠졌다. 카르한은 잘 길들여진 맹수처럼 조용히 일리아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먼저 남성복이 걸려 있는 곳으로 향한 일리아는 옷 한 벌을 꺼내들었다.

    “카르한, 이거 어때요?”

    “괜찮은 것 같습니다.”

    괜찮다는 말에 일리아는 직원에게 건넸다. 고민 없이 구매가 결정된 것이었다. 일리아는 옷 두 벌을 더 꺼내들며 물었다.

    “둘 중에서는요? 아, 왼쪽이 더 나아요?”

    뒤에서 지켜보던 직원들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카르한은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계속 무뚝뚝하게 서 있었다.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는데, 일리아는 얼굴만 보고 이미 대답을 들은 것처럼 행동했다.

    직원들은 몰래몰래 카르한을 훔쳐보았다. 한파가 몰아칠 것처럼 차가운 인상이었다. 매서운 눈빛을 보고 있으면, 옷을 고르는 게 아니라 어느 놈을 죽일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카르한의 표정을 본 직원들은 더더욱 미궁에 빠져버렸다.

    그러나 사실 여기서 가장 놀란 사람은 카르한이었다. 제대로 대답조차 하지 않았는데, 일리아는 그를 완전히 파악했다.

    “이건 별로예요?”

    카르한의 표정을 살피며 일리아가 물었다. 그가 입술을 달싹이자, 일리아가 작게 웃었다.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아요. 이런 걸로 화 안 내요.”

    옅은 미소를 지었을 뿐인데 상냥해 보였다. 카르한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저 얼굴을 보면 좀 더 솔직해졌다.

    “……색감이 조금 부담스럽습니다.”

    “그래요? 요즘 유행이라던데.”

    일리아는 카르한의 몸에 옷을 대어봤다. 역시 옷걸이가 좋아서 그런지 잘 어울렸다.

    “일단 사요!”

    사놓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옷장에 전시해두면 된다는 것이 일리아의 지론이었다. 일리아가 열심히 카르한의 옷을 고르고 있는데,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 옷은 충분한 것 같습니다.”

    “이 정도로요?”

    진심이냐는 눈빛에 카르한이 움찔했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일리아가 고른 옷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옷장을 가득 채우다 못해서 한 달 내내 아래위로 새 옷을 입어도 남을 듯했다.

    “……이제 제가 골라드리고 싶습니다.”

    그가 먼저 나서는 경우는 흔치 않았기에, 일리아는 그러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한은 드레스가 잔뜩 걸려 있는 곳으로 걸어가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미술품을 분석하기라도 하듯 무척 진지한 태도에 일리아는 속으로 웃었다. 사소한 일이라도 건성으로 하는 법이 없었다. 한참 고민하던 카르한이 드레스 한 벌을 꺼내왔다.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겠습니다.”

    촌스러운 걸로 골라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안목이 괜찮았다. 푸른색 드레스는 일리아의 밝은 금발과 잘 어울렸다. 원단도 지금 계절과 알맞았고, 사이즈도 적당했다. 순간 건성으로 제 옷을 골라주던 리하트가 떠올라서 기분이 이상했다.

    ‘그 자식은 자기 옷만 열심히 골랐는데…….’

    일리아가 대답하지 않자, 카르한이 바로 발걸음을 뗐다.

    “역시 다른 옷으로…….”

    “아니에요. 마음에 들어요.”

    정신 차린 일리아가 곧바로 대답했다. 카르한이 우뚝 멈춰 서고, 일리아는 지나가듯 칭찬을 내뱉었다.

    “안목이 있으시네요.”

    잠시 그는 말이 없었다. 일리아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려 카르한을 올려다보았다. 순간 눈을 깜빡이는 것을 잊어버렸다.

    얼어붙은 땅 위로 햇볕이 내려앉은 것처럼 그의 얼굴이 한결 부드러웠다. 딱딱한 표정도, 간격이 좁던 미간도 풀어져 있었다. 카르한이 일리아를 마주 보며 중얼거렸다.

    “그런 말은 처음 듣습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카르한의 표정이 평소처럼 되돌아왔다. 하지만 붉어진 귓불은 숨길 수 없었다.

    일리아는 생각보다 그에게서 읽어낼 감정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숨은 그림 찾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그 후로 일리아와 카르한은 서로의 옷을 골라주며, 서로의 취향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일단 이걸로 갈아입고 와요.”

    일리아는 오늘 고른 옷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집어냈다. 카르한은 곧바로 탈의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새 옷을 입은 카르한의 모습에 직원들이 소리 없이 감탄했다. 일리아는 잠시 말없이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이상한가요……?”

    카르한은 어색한 듯 옷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상하다뇨, 아무리 봐도 카르한 당신 옷이에요.”

    쏟아지는 칭찬에 카르한의 귓불이 다시 붉어졌다. 쑥스러운 듯 그가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정말 빈말이 아니었다. 잘생긴 얼굴에 옷까지 갖춰 입으니 빛이 났다. 부드러운 색감 덕분에 매서운 인상도 누그러져 보였다.

    게다가 그는 항상 품이 넉넉한 옷을 입었는데, 체형에 딱 맞는 옷을 입으니 몸이 부각되어 보였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두 번은 더 뒤돌아볼 정도였다. 리하트에게도 옷을 많이 사줬지만, 이렇게까지 뿌듯했던 적이 없었다.

    일리아는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일리아의 반응에 카르한은 안심한 듯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옷은 이제 다 고른 것 같으니 나갈까요?”

    일리아의 말에 카르한이 빠르게 계산대 앞으로 나섰다.

    “제가 계산하겠습니다.”

    카르한의 말에 일리아가 멈칫했다.

    ‘계산한다고?’

    일리아는 정말로 지갑을 꺼내고 있는 카르한을 보고 당황했다. 연애를 시작한 후 리하트는 데이트를 하면서 돈을 먼저 낸 적이 거의 없었다. 당연히 일리아가 계산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리아 또한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일리아가 대답하지 않자, 그가 잠시 말을 고르다가 입을 열었다.

    “사례 같은 게 아니라……. 계속 받기만 했으니, 이번에는 제가 보답하고 싶습니다.”

    저번에 사례금을 내밀었다가 일리아가 화냈던 것을 마음에 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일리아는 받을 수 없었다. 왜냐면…….

    일리아는 말없이 계산대가 놓인 벽면을 가리켰다. 카르한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대리석으로 지어진 벽에는 익숙한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블로든 가문의 문장이었다.

    “여기 제 가게거든요.”

    카르한이 지갑을 떨어뜨렸다. 늘 새로운 반응에 일리아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됐을 텐데.’

    아무래도 당분간은 계속 저럴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지갑을 주워 그에게 내밀었다.

    “앞으로 옷장처럼 쓰세요.”

    옷이 필요하면 여기서 입고 나가도 된다고 일리아가 말했다.

    “…….”

    카르한은 지갑만 손끝으로 문질렀다. 그것을 보지 못한 일리아는 열심히 포장하던 직원에게 물었다.

    “리하트 테르시안이 다녀갔나요?”

    “예, 며칠 전에도…….”

    직원의 대답에 일리아는 피식 웃었다. 그런 짓을 해놓고도 제 가게를 들락날락하다니. 심지어 전부 공짜로 들고 갔을 터였다. 일리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앞으로 리하트를 포함해서 테르시안 가문 사람들은 전원 출입 금지해요.”

    그에게 줬던 모든 혜택을 빼앗을 생각이었다.

    ***

    일리아와 카르한이 쇼핑을 하는 동안, 세 남자는 바깥에서 대기했다.

    일리아가 자리를 뜨자 주위가 무척이나 조용해졌다. 프란체는 힘껏 테시온을 째려보았다. 아까 테시온이 일리아에게 무례하게 굴었던 일을 마음에 담아둔 것이었다. 소공자의 보좌관이니 차마 뭐라고 하진 못하고 노려보기만 했다.

    그러나 테시온은 프란체를 무시한 채 유리창을 통해 가게만 들여다보았다. 혹시 카르한이 실수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이었다.

    그 둘 사이에 낀 말렉은 한숨을 삼켰다. 사실 말렉 또한 프란체와 마찬가지로 테시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주인들끼리 앞으로 계속 엮일 텐데, 아랫사람들 사이가 나빠서 좋을 것은 없었다.

    “앞으로 자주 볼 것 같은데, 통성명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형님!”

    프란체가 배신감 넘치는 얼굴로 말렉을 불렀다. 말렉의 말에 테시온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렇군요.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테시온 헤르벤입니다.”

    “아가씨의 호위를 맡고 있는 말렉 셰이드입니다.”

    말렉은 이름을 밝힌 후 프란체를 힐끗 보았다. 프란체는 입술만 꾹 다문 채 시선을 피해버렸다. 그러나 테시온은 전혀 개의치 않은 듯했다. 오히려 프란체를 없는 사람처럼 취급했다.

    친해질 기미가 전혀 없는 두 사람을 보고 말렉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말을 꺼낼지 고민하던 말렉이 다시 입을 열었다.

    “소공자께서는 좋으신 분 같습니다.”

    카르한 이야기가 나오자, 테시온은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그의 녹색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렇지요? 겉모습만 보고 오해하는 사람이 많지만 실은 정말 좋으신 분입니다.”

    아까부터 생각했는데, 테시온은 카르한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해 보였다. 카르한을 칭찬하며 가까워지면 되겠다고 말렉은 생각했다. 그때 뚱하니 있던 프란체가 눈치 없이 소리쳤다.

    “우리 아가씨도 좋으신 분입니다!”

    아니, 너는 왜……. 말렉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프란체를 바라보았다. 프란체는 슬쩍 몸을 틀어, 테시온과 말렉 쪽을 향했다.

    “제가 호위 기사로 이 자리에 있는 것도 전부 아가씨 덕분이니까요.”

    프란체는 무척이나 자랑스러운 얼굴로 어깨를 폈다.

    “검술도 배우게 해주시고 취업까지 시켜주셨습니다!”

    말렉은 속으로 헛웃음만 흘렸다. 프란체는 기회만 있으면 일리아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 모두에게 이야기했다. 저 말도 이미 백 번은 더 들은 것이었다.

    “그러니 누구보다 훌륭하신 분입니다.”

    가만히 프란체의 말을 듣던 테시온이 지지 않고 입을 열었다.

    “카르한 님께서는 제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십니다.”

    테시온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카르한을 힐끗 보았다.

    “우리는 전쟁터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그는 자신이 백작 가문의 삼남이며, 가문의 명예를 위해 전쟁에 나서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검술에 딱히 재능이 없는 그는 하루하루 살아남기도 벅찼다.

    “죽음은…… 귀족이든 평민이든 평등했지요.”

    부대 하나가 전멸 직전에 이르는 일이 있었다. 다리를 다친 테시온은 동료들이 모두 도망칠 때, 전장 한복판에 홀로 떨어졌다.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곳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피로 칠갑한 남자가 제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때는 그가 자신을 죽일 줄 알았다. 태양을 등진 남자는 마치 사신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는 테시온을 둘러업고 달리기 시작했다. 자기 목숨이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타인을 도운 것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그가 살인귀로 유명한 에반테온 소공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문이 어찌 되었든 카르한은 테시온을 구해주었다. 그 후로 테시온은 카르한을 따라다니며 보좌관을 자처했다. 설명을 마친 테시온이 목소리를 높였다.

    “저는 카르한 님을 평생 따르기로 했습니다!”

    테시온의 말에 프란체가 주먹을 꽉 쥐었다.

    “우리 아가씨는……!”

    프란체는 다시 일리아 칭찬을 시작했고, 테시온도 밀리지 않았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말렉은 속으로 웃었다. 이럴 때는 죽이 잘 맞았다. 그들이 목소리를 높이며 칭찬 싸움을 하는데, 가게 문이 열렸다.

    “감사합니다! 살펴 가십시오!”

    직원들의 합창과 함께 일리아가 가게를 나왔다. 프란체와 테시온이 목청 높여 떠들어 대는 걸 본 일리아가 멈춰 섰다.

    “그사이 친해진 것 같네요?”

    “친해지다뇨!”

    “절대 아닙니다.”

    프란체와 테시온이 곧바로 대답했다. 일리아가 갸웃거리자, 테시온은 곧바로 표정 관리를 했다.

    “어쩌다 보니 말려들어서 어른스럽지 못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제 와서 혼자 발을 쏙 빼자, 프란체가 들으라는 듯 혼잣말했다.

    “제일 신났으면서…….”

    “당신.”

    테시온이 프란체를 흘겨보았다. 그 모습에 일리아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아까만 해도 서로 상종하지 않을 것처럼 굴었는데, 티격태격하면서 가까워진 모양이었다.

    “다들 배고프지 않아요? 점심 먹을까요?”

    모두가 동의하자, 일리아는 이전에 맛있게 먹은 기억이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일리아와 카르한이 자리에 앉고 남은 이들은 따로 앉았다. 일리아가 카르한에게 메뉴판을 내밀었다.

    “당신이 먹고 싶은 것으로 먼저 선택하세요.”

    스스로 결정을 내린 적이 거의 없는 그를 위해, 일리아는 인내심 있게 기다려주었다.

    주문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줄줄이 테이블에 놓였다. 그릇이 놓이니 서로의 취향이 보였다. 일리아는 육식파였고, 카르한은 야채가 들어간 요리를 좋아했다.

    ‘이런 야채만 먹으면서 몸은 어떻게 유지하는 거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카르한이 고기가 담긴 접시를 제 쪽으로 가져갔다. 그가 나이프를 들어 고기를 썰기 시작했다. 두툼한 고기는 푸딩을 베는 것처럼 부드럽게 잘려나갔다.

    카르한이 접시를 일리아의 앞에 내려놓았다. 먹기 좋게 썰린 고기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일리아는 잠시 말없이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왠지…… 진짜 데이트 하는 것 같네요.”

    일리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카르한이 멈칫했다. 나이프를 내려놓은 그가 고개를 들었다. 새파란 눈동자는 거울처럼 일리아를 담았다.

    “이런 게 데이트라면……, 다음번에는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열심히 배울 테니, 영애께서 가르쳐주십시오.”

    “그럼 이제부터 이름으로 불러줄래요?”

    카르한이 집어 들려던 스푼을 놓쳤다. 그런 그의 모습에 일리아는 조금 웃고 말았다.

    ***

    식사를 마친 후, 일리아와 카르한은 가게 몇 군데를 더 들렀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렀기에, 이만 헤어지기로 했다.

    일리아가 타고 왔던 마차 앞에 도착했을 때, 카르한이 조심스레 물었다.

    “……오늘 괜찮았습니까?”

    “나쁘지 않았어요.”

    처음엔 고장 난 것처럼 삐걱대더니, 나중엔 그래도 적응하려고 애쓰는 것이 보였다. 일리아의 반응에 그가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제 성격 때문에 영애께서 곤란하셨을까 봐…….”

    카르한이 고개를 들어 일리아를 마주 보았다.

    “계약 기간 동안 폐 끼치지 않고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소심하지만 열정 있는 신입 직원을 보는 기분이었다. 처음 계약할 때만 해도 걱정 많이 했는데, 이 정도면 많이 발전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부족했다. 남에게 휘둘리기만 하는 소극적인 성격도, 자신감 없는 태도도 싹 바꾸고 싶었다.

    “바뀔 수 있을 거예요.”

    일리아는 카르한을 똑바로 보며 목소리에 좀 더 힘을 주었다.

    “앞으로 나도 열심히 도울게요.”

    “……예.”

    대답을 들은 일리아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럼 다음에 만날 때, 최근 산 것 중에서 가장 쓸모없었던 것으로 가져와요. 포장을 뜯지 않았다면 더 좋고요.”

    카르한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유를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때 설명해줄게요. 다음에 봐요.”

    일리아가 먼저 마차에 올라탔다. 카르한은 그 자리에 서서 멀어지는 마차를 지켜보았다.

    세 사람이 떠나자, 순식간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카르한 님.”

    테시온은 카르한을 따라 블로든 가문 마차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블로든 영애는 좋으신 분 같습니다.”

    실체를 밝혀주겠다며 단단히 벼르고 나왔는데, 도리어 일리아에게 설득 당했다. 특히 카르한의 얼굴만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맞힌 사람은 처음이었다.

    테시온은 힐끗 카르한을 보았다. 그의 얼굴이 언뜻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테시온은 저도 모르게 눈을 깜빡였다.

    이렇게까지 감정을 드러내 보이는 카르한은 흔치 않았다. 이마저도 그와 오랫동안 함께해왔기에 알 수 있는 것이었지만, 분명 엄청난 성과였다. 테시온은 오늘 나오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골치 아픈 일이 많이 생기겠군요.”

    하지만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했다. 에반테온 가문 사람들은 카르한의 변화를 절대 두고만 보지 않을 터였다.

    원로들은 지금처럼 카르한이 꼭두각시로 남아주길 바랐다. 부모인 에반테온 공작부부는 카르한에게 관심이 없었다. 도리어 원치 않는 약혼을 시켜 카르한을 팔아넘기려 들었다. 수많은 명문가를 제치고 델로타를 선택한 이유도 전부 돈 때문이었다.

    테시온의 말에 카르한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내가 부족하니 노력해야지.”

    모든 것을 자신 탓으로 돌리는 카르한의 모습에 테시온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카르한은 오랫동안 순응하는 것에 길들여져 있었다. 곪아버린 속이 치료되려면 한참 걸릴 터였다.

    “일단 책을 읽을 수 있는 곳으로 갔으면 하는데.”

    카르한의 말에 테시온은 그의 손에 들린 책들을 힐끗 보았다.

    온통 분홍색인 표지가 아까부터 눈길을 사로잡았다. 헤어지기 전, 일리아가 카르한에게 떠넘겨준 책이었다. 도대체 무슨 책을 사주었나 싶어서, 테시온은 책 제목을 슬쩍 확인했다.

    [연애 왕초보, 고수가 되다!]

    [좋은 연인이 되는 100가지 방법]

    [칭찬 듣는 데이트 코스]

    테시온은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잘못 본 건 아니겠지……? 이 계약 연애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그는 조금 불안해졌다.

    ***

    블로든 백작가에는 회의실로 쓰는 홀이 하나 있었다. 중요한 안건이 오갈 때만 모이는 곳으로, 제법 오랫동안 문을 열지 않았다.

    거대한 샹들리에 아래, 고작 세 사람만이 자리를 차지했다. 기다란 테이블의 상석에는 블로든 백작이, 오른편에는 백작부인인 비올레가, 왼편에는 헤인리가 앉았다.

    회의실은 장례식장처럼 엄숙했다. 분위기만 보면 가문에 엄청난 위기가 닥친 것처럼 보였다. 긴 침묵을 깨고 장남인 헤인리가 입을 열었다.

    “그럼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헤인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퀴 달린 코르크나무 판 앞에 섰다. 백작과 비올레가 몸을 틀어 헤인리를 보았다. 다들 웃음기 하나 없이 심각한 얼굴이었다.

    “오늘 의제는…….”

    헤인리가 펜을 꺼내 코르크나무 판에 핀셋으로 고정해둔 종이에 글자를 적어 내려갔다.

    “일리아의 새로운 남자친구입니다.”

    [카르한 에반테온]

    흰 종이에 적힌 글자에 백작부부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이름부터 마음에 들지 않군요.”

    “이름만 보고 판단하는 건 편협한 생각인 것 같지만, 이번만큼은 동감해요.”

    백작의 중얼거림에 비올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헤인리는 펜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사실 헤인리는 여기서 가장 마지막으로 일리아에게 새로운 연인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도 부모님이 말해주어서 알게 된 것이었다.

    리하트와 결혼식을 미룬다는 말은 직접 들었는데, 파혼을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심지어 새로운 사랑을 찾았다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일단 제가 조사한 자료입니다. 급하게 조사하느라 미흡한 점이 많습니다.”

    헤인리는 종이 뭉치를 백작부부에게 나누어주었다.

    백작과 비올레가 종이를 빠르게 검토했다. 대부분은 에반테온 공작가문에 대한 정보였다. 카르한 에반테온에 관한 정보가 많으면 좋았겠지만, 사생활이 베일에 싸여있었다. 특히 후계자가 되기 전은 어디에 갇혀 살았나 싶을 정도로 자료가 거의 없었다.

    “제가 보기엔 일반적인 공작가 차남과는 다릅니다. 열넷에 전쟁터에 보내진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차남이라고 한들, 공작 가문의 적자로 태어난 이상 전쟁터에 보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본인이 자청해서 출전할 수는 있지만, 미치지 않은 이상 스스로 사지에 걸어 들어갈 사람은 없을 것이다. 헤인리의 의견을 들은 비올레가 손을 들었다.

    “내가 알아보기론 장남을 몰아낼 기반을 다지려고 출전했다던데.”

    야망을 이루기 위해 출전한 게 아니냐는 추측을 내놓자, 백작이 말을 받았다.

    “그저 살육이 좋아서 출전했다던 말도 있더군요.”

    순식간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다들 에반테온 소공자를 둘러싼 소문은 익히 들었기 때문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귀.

    -야욕 때문에 형제를 내쫓은 자.

    -개차반.

    모두의 머릿속에 지금까지 들었던 말들이 스쳐지나갔다.

    “일리아는 왜 그놈을 좋아하게 된 거지?”

    백작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의 말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쁜 시간을 쪼개 회의까지 열었으나, 풀리지 않는 의문만이 테이블 위를 맴돌았다.

    “소공자 얼굴을 본 사람 있어요?”

    비올레의 물음에 헤인리와 백작이 고개를 흔들었다. 비올레는 두 손을 깍지 껴 테이블에 올렸다. 깍지 낀 손가락 위에 턱을 대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헤어지게 만들어야겠죠?”

    “성 한 채 주고 우리 딸과 헤어지라고 할까요?”

    백작이 재빠르게 의견을 냈다. 그러자 헤인리가 은테 안경을 추어올리며 대답했다.

    “상대는 에반테온입니다. 우리 가문만큼은 아니어도 그쪽도 충분히 재력이 있을 테죠.”

    백작이 시무룩하게 입을 다물었다.

    “차라리 일리아에게 에반테온 소공자의 실체를 밝히는 것은 어떻습니까?”

    헤인리의 의견에 비올레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알고 있더라. 그리고 소문만 무성하고 증거가 없으니…….”

    비올레가 한숨을 내쉬자, 헤인리는 우중충해진 얼굴로 침묵했다. 그 후로도 여러 의견이 나왔다.

    정 떨어지게 하는 법, 단식 투쟁으로 뜯어 말리기 등등……. 하지만 일리아는 이미 리하트라는 대형 쓰레기를 만난 전적이 있었다. 일리아의 콩깍지가 얼마나 대단한지 그들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온갖 의견이 오가던 중, 조용히 있던 백작이 입을 열었다.

    “만약에 일리아에게 헤어지라고 강요했다가 리하트와 재결합하면 어쩌지요?”

    모두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무척 나쁜 결말이었다. 얼마나 나쁘냐면 차라리 에반테온 소공자가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아주 잠깐 들 정도였다. 침묵 속에서 비올레가 깍지를 풀었다.

    “여기서 우리가 결정을 내려봤자, 어찌할 수 없어요. 일단은 지켜보는 게 좋겠어요.”

    일리아가 설득한다고 해서 들을 성격이었으면 리하트와 약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올레는 종이 뭉치를 잡고 책상에 툭툭 내리쳤다.

    “다만,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직접 확인하는 것 정도는 괜찮겠죠.”

    혹시 변변찮은 놈이라면 협박을 해서라도 헤어지게 만들자고 눈짓했다. 그녀의 의견에 두 부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헤인리가 정리된 종이를 밀어 넣으며 말했다.

    “그럼 제가 소공자를 한번 만나고 오겠습니다.”

    “그래, 너만 믿는다.”

    백작부부는 헤인리에게 신뢰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그렇게 일리아 없는 블로든 가문 회의가 끝났다.

    ***

    아침 식사를 마친 일리아는 홀로 저택에 남았다.

    아버지는 몇 주 후에 있을 전시회 준비로 바빴고, 어머니는 사업 때문에 외출했다. 그리고 오라버니는 아침 일찍 황궁으로 출근했다.

    일리아는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제게 온 서신을 전부 분류한 후에 오늘은 무슨 일을 할지 고민에 잠겼다.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니 날이 무척 좋아 보였다. 새파란 하늘을 부유하는 조각구름을 구경하던 일리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후원에서 차라도 마실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일리아는 후원에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건물을 빠져나와 후원 입구에 도착하자, 목련 나무가 보였다. 목련이 잔뜩 심긴 곳을 지나쳐 후원 안으로 쭉 들어가니 등나무가 터널처럼 이어져 있었다.

    일리아는 천천히 등나무 아래를 걸었다. 아직 개화하지 못한 등나무 줄기가 사방에 뻗어나갔다.

    걸음을 멈춘 곳에 둥근 원목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일리아가 테이블 앞에 앉자, 고용인이 다기를 준비해주었다. 적당한 온도의 물을 따르자, 꽃차 향기가 은은히 퍼져나갔다.

    “향이 좋네.”

    일리아의 말에 고용인이 말없이 미소 지었다.

    그는 저번에 찻집을 매입하면서 함께 고용한 직원이었다. 재개발로 가게가 사라진 후, 저택에 들어와서 일하고 있었다. 비록 귀가 들리지 않지만 차 우려내는 솜씨는 무척 훌륭했다. 그리고 천천히 말하면 입 모양을 보고 알아들어서 의사소통에 크게 문제가 없었다.

    일리아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요즘 일리아의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 여유로웠다. 지금까지는 항상 리하트와 붙어 있었는데, 그와 헤어지고 나니 시간이 남아돌았다.

    게다가 만날 만한 친구도 없었다. 아는 사람이라고 해봤자, 대부분 리하트와 연관된 이들이었다. 그때도 리하트 때문에 마지못해 어울린 것이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새로운 친구를 사귈 마음은 없었다. 어릴 적부터 사람과의 관계에서 많이 덴 일리아는 혼자가 편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번에 리하트 일로 완전히 마음을 닫게 되었다.

    ‘앞으로 뭘 하지…….’

    일리아는 지금까지 미래를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다. 이대로 자연스럽게 테르시안 후작부인이 될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리하트와의 결혼은 이미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지금부터라도 파혼하고 나면 앞으로 무엇을 할지 고민해볼 생각이었다.

    사실 평범한 영애라면 결혼했을 나이였지만, 리하트 때문에 연애하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졌다. 이러다가 혼기를 놓치면 혼자 살아가야 할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일리아는 지금까지 깊이 처박아두었던 생각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사업을 이끌어보고 싶어.’

    블로든 백작가는 사업으로 성공한 가문이었다. 그리고 일리아는 어렸을 적부터 부모님을 따라 자연스레 사업에 흥미를 붙였다.

    비록 재물운이 무척 좋아 별다른 노력 없이 성공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았으나, 직접 참여하고 계획하는 그 순간이 즐거웠다.

    하지만 지금까지 혼자 이뤄둔 사업이 없었고, 가업은 언젠가 장남인 헤인리가 물려받을 예정이었다. 여러 조건을 보아도 헤인리가 유력한 후계자감이었다. 물론 본인은 사업하기 싫다며 황궁에서 녹봉을 받으며 일하고 있지만 말이다.

    ‘파혼부터 하고 다시 고민해보자.’

    일리아는 차를 마시기 위해 다시 잔을 집어 들었다. 그때 고용인 하나가 저 멀리서부터 걸어왔다. 두 팔엔 엄청난 크기의 꽃다발이 들려있었다.

    “뭐지……?”

    누가 제게 선물이라도 보냈나 싶어서 빤히 보는데, 고용인이 멈춰 섰다.

    “아가씨, 테르시안 후작가에서 서신과 선물이 왔습니다.”

    그 이름을 듣자마자 일리아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고용인이 서신과 페이퍼나이프를 건네주었다. 일리아는 서신만 받아, 아무렇게나 봉투를 뜯어서 편지지를 꺼냈다.

    [저번에 하지 못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니 후작가에 방문해줘. 언제든지 좋으니 기다릴게. 이 꽃은 내 마음이야.]

    “하.”

    어이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사이에 다리가 부러지기라도 했나? 아니면 직접 찾아오면 죽는 병이라도 걸린 걸까.

    일리아는 고용인에게서 꽃을 받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바닥에 패대기쳤다. 신발로 콱콱 밟으니 예쁘게 담겨 있던 장미꽃이 마구잡이로 으스러졌다. 일리아는 꽃잎이 다 떨어진 꽃다발을 노려보았다.

    “내 마음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당황한 얼굴로 지켜보는 고용인에게 일리아가 말했다.

    “소각장에 태워버리렴.”

    꽃다발을 소각장으로 보낸 일리아는 리하트에게 직접 찾아오라는 답신을 써서 보냈다.

    ***

    다음 날, 테르시안 저택에서 리하트의 대리인이 왔다.

    무슨 말이 그렇게 많은지, 대리인은 구구절절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다 집어치우고 결론만 말하자면, 블로든 백작 저택에는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일리아는 리하트가 블로든 저택에 방문하는 것을 꺼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전에 한 번 왔다가 내내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 집에 초청해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오지 않았다.

    사실 일리아도 리하트를 집에 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저 앉아서 명령만 내리는 것이 괘씸해서 직접 오라고 했을 뿐이었다.

    “그럼 날짜를 정하고 밖에서 만나자고 전해줘요.”

    어차피 파혼 동의를 얻기 위해 한 번쯤 제대로 만나야 했다. 서로 의견을 굽힐 생각이 없으니, 타협점으로 밖에서 만나자고 통보했다. 리하트는 일리아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마침내 약속 당일이 왔다.

    일리아는 완벽하게 치장을 끝냈다. 헤어지고 나서 더 완벽해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일리아는 침실을 빠져나와 현관으로 내려왔다. 현관 앞에 대기해 있던 프란체와 말렉이 인사를 건넸다. 말렉이 마차 문을 열어주자, 일리아가 간이 계단을 밟으며 말했다.

    “오늘은 그놈이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들면 나서도 좋아.”

    프란체의 두 눈이 번뜩였다. 말의 고삐를 풀어놓는 소리였다. 그래도 보험 들어놓을 구석은 있어야 했다. 괜히 둘이서 만났다가 무슨 일이 있을지 몰랐다.

    그리고 리하트가 바람피우는 현장을 목격한 후로, 둘이서 제대로 이야기 나누는 것은 처음이었다. 마음의 준비를 할 필요가 있었다.

    상념에 잠긴 사이, 어느새 마차는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리는데, 마침 맞은편 마차에서 내리고 있는 리하트를 발견했다.

    “일리아……!”

    눈이 마주치자, 리하트가 재빠르게 달려왔다. 그가 가볍게 일리아를 훑으며 말했다.

    “오늘은 저번보다 더 예쁜데?”

    일리아가 대꾸하지 않자, 리하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카르한이 함께 왔는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 일리아의 뒤에 서 있던 프란체와 말렉이 앞으로 나섰다. 두 명이 동시에 노려보자, 리하트가 움찔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요.”

    일리아가 먼저 걸음을 옮겨 찻집으로 들어섰다. 리하트가 뒤따라 들어오자, 일리아는 자리를 잡기도 전에 카운터에 놓여 있던 메뉴판을 집어 들었다.

    “밀크티 한 잔 주세요. 여기 선불이죠?”

    계산을 마친 일리아는 곧바로 등을 돌렸다. 리하트는 당혹감에 가득 찬 눈으로 일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계산은 항상 일리아의 몫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정해진 율법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물어보지도 않고, 제 것만 쏙 계산해버린 것이었다.

    일리아가 완전히 자리를 잡자, 리하트는 허둥지둥 주문했다. 그는 지갑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인상을 팍 썼다.

    마차에서 지갑을 가져와 겨우 계산을 마쳤을 때, 이미 일리아는 밀크티를 마시고 있었다. 리하트가 맞은편 자리에 앉자, 일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만나자고 한 이유는요?”

    리하트는 미간을 살짝 좁힌 채 눈을 내리깔았다. 아랫입술이 안쪽으로 말려 들어갔다. 자존심 상할 때 짓는 표정이었다. 한참 입술을 달싹이던 리하트가 물었다.

    “나와 파혼하겠다니, 진심이야?”

    일리아는 대답하는 대신 종이 한 장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파혼 동의서’라는 단어를 본 리하트의 얼굴이 잠시 멍해졌다.

    “어째서…….”

    몰라서 묻느냐는 시선을 보내자, 리하트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 그 일 때문에 그래? 아니면 에반테온 소공자 때문이야?”

    “둘 다예요.”

    일리아의 대답에 그의 안면이 좀 더 구겨졌다.

    “에반테온 소공자를 좋아한다는 건 거짓말이지? 연회에 만나서 첫눈에 반했다는 것도?”

    취조에 가까운 물음이 이어졌다. 꽉 쥔 주먹이 떨리는 것을 확인한 일리아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믿기 싫으면 말아요. 난 진심이니까.”

    “네가 에반테온 소공자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그래!”

    ‘적어도 당신보다는 잘 아는 것 같은데.’

    일리아는 대꾸해주려다가 참았다. 아직까지는 오해하게 내버려두는 것이 나았다. 소문만 믿고 카르한에게 덤벼들 생각도 못 할 테니 말이다.

    리하트는 흥분을 억누르기 위해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의 어깨가 위로 솟았다가 꺼졌다.

    “다 알고 있어. 어차피 진짜 좋아서 만나는 것은 아니잖아.”

    순간 일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혹시 뭔가 알고 있나 싶어서 귀를 기울이자, 리하트가 자신만만하게 말을 이었다.

    “실은 내가 질투하게 만들려고 만나는 거지?”

    ‘미친놈인가?’

    순간 프란체에게 배운 온갖 욕설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이가 없는 나머지 말문이 막혔다. 그러자 리하트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우리 지금까지 잘 지냈잖아.”

    조용히 꺼내는 말에 일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얽히고, 짙은 붉은색 눈동자에 일리아가 비쳤다.

    “세 달 후면 결혼식을 치르고 부부가 되었을 텐데, 이런 일로 우리가 헤어지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

    리하트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앞으로 펼쳐졌을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일리아가 얼마나 결혼식을 손꼽아 기다려왔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결혼식이 열릴 장소와 초대할 하객들, 신혼여행지……. 일리아는 리하트를 만날 때마다 결혼식 이야기를 하며 행복해했다.

    “우리 남부로 신혼여행 가기로 했잖아. 노을 지는 바다를 보자고 약속했던 거 생각나?”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를 꺼내자, 일리아의 보랏빛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나비의 날갯짓 같은 떨림은 이윽고 파문이 되어 퍼져나갔다. 리하트는 그 작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일리아, 너는 내 첫사랑이야.”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마치 사랑을 속삭이던 과거로 돌아간 것 같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확신했어. 우린 운명이라고.”

    리하트는 항상 우리의 만남은 운명이라 말했다. 일리아 또한 그렇다고 생각했다. 물에 빠졌던 그날 리하트가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이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래서 제 목숨을 구해준 그에게 운명을 맡겼다.

    “처음 데이트 했던 날 기억나?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식사만 세 시간이나 했잖아. 그리고 우리 꽃놀이 갔을 때…….”

    리하트는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좋았던 추억을 꺼내놓았다. 그에게 배신당한 후로 내다버렸던 추억들이 고스란히 되돌아와 앞에 놓였다. 전부 좋았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그가 내놓은 기억들은 일리아에게도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이었다.

    ‘나는 왜 당신을 좋아했을까?’

    배신당했던 그날부터 수천 번 넘게 던져본 질문이었다. 대답할 말은 많았다. 운명이라고 느꼈기에, 제게 다정했던 순간들이 있었기에, 첫 연애였기에, 진심이라고 생각했기에…….

    리하트는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제 목숨을 구해준 후에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돈만 보고 알랑대던 이들과는 다른 행보였다.

    사람에게 배신당한 경험이 많은 일리아는 처음에 그를 의심했다. 그러나 리하트는 그들과 달랐기에 점점 끌렸고 결국 사랑하게 되었다.

    분명 리하트와 함께한 순간은 행복했다. 달콤함에 취해 꿀통에 익사하는 꿀벌처럼 그에게 빠져들었다. 하지만 사랑이 마냥 달콤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 연애할 때와 너무도 달라진 그의 태도. 리하트의 주변을 맴도는 수많은 여자들. 가끔 다투었을 때, 그의 눈치를 보던 나날들. 연락이 되지 않아서 혼자 초조해하던 일. 좋아하던 것을 포기해야 했던 순간들…….

    생각해보면 그와 연애하는 동안 그리 행복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았다. 행복 아래에 늘어진 불안이란 그림자가 더 크고 깊었기에. 그래서 그날 점술사의 말을 듣고 리하트를 찾아갔는지도 몰랐다.

    이제 일리아는 자신이 믿던 행복이 전부 신기루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

    리하트가 말을 멈추었다. 일리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불안했는지 그는 입술을 달싹였다. 이윽고 리하트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덤덤하던 보라색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일리아는 제게 고개를 숙이는 리하트의 모습에 눈을 깜빡였다. 그가 먼저 사과한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때 내가 정신이 나갔었나 봐.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바람이 아니라고 우기던 리하트는 결국 용서를 빌었다.

    “앞으로 정말 잘할게. 내게 한 번만 기회를 줘, 일리아.”

    일리아가 여전히 대답하지 않자,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반전된 눈높이에, 일리아는 리하트의 정수리를 내려다볼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색 머리카락을 살피던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그래요.”

    리하트가 고개를 들었다. 용서 받았다고 생각했는지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당신 말은 잘 들었으니까, 이제 내가 대답할 차례죠?”

    일리아는 테이블에 놓아둔 파혼 동의서를 그의 눈앞에 내밀며 말했다.

    “자, 여기에 서명하세요.”

    “뭐……?”

    리하트가 얼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일리아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그를 위해 한 번 더 말해주었다.

    “여기에 서명하라고요.”

    일리아는 손수 펜까지 내밀어주었다. 리하트는 배신감 가득한 눈으로 파혼 동의서와 일리아를 번갈아 보았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가 원망 가득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미안하다고 했잖아!”

    “용서는 내 마음인데 왜 강요해요?”

    지금 리하트의 태도는 사과씩이나 했으니, 당연히 받아들여줘야 한다는 것처럼 보였다.

    일리아는 조소했다. 만약 그의 부정을 알게 되었던 그날, 리하트가 저를 붙잡고 용서를 빌었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때 자신은 사랑에 눈이 멀었으니, 어리석게도 리하트가 진심으로 반성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동안 당신이 나를 찾아와서 용서를 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일리아는 어리석게도 방 안에 틀어박혔던 기간 동안 하염없이 울면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혹시나 리하트가 저를 찾아오지 않을까 싶어서…….

    하루, 이틀, 일주일……. 보름이 지났을 때는 인정해야 했다. 그가 자신을 찾아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혹시나 했던 기대는 비참함으로 덧씌워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어요.”

    리하트가 과거를 꺼냈을 때, 좋았던 감정보다 분노가 치밀었다. 무엇보다 소중한 추억을 짓밟은 사람은 리하트였다.

    일리아는 리하트가 좋아하던 상냥한 미소 대신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그러니 헛소리 그만하고 이만 서명해요.”

    리하트는 한참 말이 없었다. 내밀어진 파혼 동의서만 바라보던 그가 중얼거렸다.

    “절대 동의 못 해.”

    리하트의 안광이 번들거렸다. 심상치 않은 모습에 프란체와 말렉이 일리아의 옆에 바짝 다가섰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마십시오.”

    말렉의 경고에 리하트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단숨에 손을 뻗은 그가 파혼 동의서를 낚아챘다. 그리고 사정없이 찢어발긴 후 허공에 뿌렸다.

    리하트가 이제 어찌할 거냐는 시선을 보냈다. 일리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새로운 파혼 동의서를 꺼내들었다. 흔들리는 붉은색 눈동자를 보며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서로 더러운 꼴 보기 전에 얌전히 파혼해요.”

    일리아의 입에서 튀어나온 단어에 리하트의 표정이 굳어졌다. 항상 바르고 고운 말만 하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당연했다. 리하트에게는 진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 그에게 사랑 받고 싶어서 착하고 이해심 많은 척해왔을 뿐이었다.

    ‘생각해보니 서로 진짜 모습을 모르고 연애한 거네.’

    일리아는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후회할 거야. 사교계에서 소문이 얼마나 치명적인 줄 알고 있잖아!”

    “그래서요?”

    리하트는 도리어 말문이 막혔는지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리하트는 자존심 때문에 약혼녀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절대 말하지 못할 것이다.

    거기다 일리아의 새로운 연인은 무려 에반테온 소공작이었다. 앞에서 대놓고 떠들 정도로 간 큰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재력이 있는데 그깟 소문이 무슨 상관이람.’

    재력과 권력이 있으면 소문쯤이야 모른 척 눈감아주는 것이 사교계였다. 심지어 카르한은 더 나빠질 평판도 없었다. 본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저와 거래를 맺은 것이었다.

    “마음대로 해요. 소문 같은 건 상관없으니까.”

    “…….”

    “그리고 먼저 바람을 피운 건 당신이잖아요?”

    좀 전에 리하트는 일리아에게 용서를 빌었다. 바람을 피웠다고 본인 스스로 인정한 셈이었다. 이를 바득바득 갈던 리하트가 빈정거렸다.

    “혼자 깨끗한 척하지 마. 에반테온 소공자도 여자가 있잖아. 결국 너도 바람피우는 거 아니야?”

    일리아는 잠깐 멈칫했다. 하지만 스텔라가 카르한의 스토커이며,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것까지 구구절절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리하트는 의기양양해져서 입을 나불댔다.

    “에반테온 소공자에게 너는 그저 불장난일 뿐이야.”

    금방 버려질 거라며 리하트가 속삭였다.

    “일리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전부 정리하고 원래대로 돌이킬 수 있는…….”

    그의 말을 흘려듣던 일리아는 발치에 조각조각 흩어진 파혼 동의서를 내려다보았다. 저것들을 정교하게 이어 붙인다고 해도 원래 형태와 다를 것이다. 자신과 리하트의 관계처럼.

    일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가지고 왔던 파혼 동의서를 전부 꺼내서 그에게 뿌렸다.

    “뭐 하는 짓이야!”

    리하트가 발칵 화를 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그를 보며 일리아가 말했다.

    “이 세상에 나랑 당신만 남아도 재결합은 없어요.”

    그에게 준 마지막 기회였다. 리하트가 순순히 파혼을 받아들인다면 자신도 적당한 선에서 정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리하트는 그 기회를 걷어차 버렸다. 동의할 생각이 없다면, 강제로 동의하게 만들 것이다.

    “제발 파혼해달라고 빌게 만들어줄게요.”

    “……내가 가만히 두고만 볼 것 같아?”

    으르렁거리듯 그가 들끓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리하트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황실에 연줄이 있는 제국의 고위 공직자였다. 아무리 황금만능주의라고 한들, 권력을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하지만 일리아는 리하트보다 더 큰 권력을 등에 업었다. 카르한을 통해 에반테온 공작가문을 끌어들일 예정이니, 제 아무리 테르시안 후작이라 해도 활개 칠 수 없을 터였다.

    “마음대로 해요.”

    일리아는 발걸음을 돌려버렸다. 마지막 타협은 결렬되었으니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는 없었다. 완전히 자리를 뜨기 전 일리아가 멈춰 섰다.

    “아참. 계속 소식이 들려와서 하는 말인데……, 내 이름 그만 좀 팔아요.”

    일리아는 리하트가 그랬듯 아래위로 훑으며 말했다.

    “구질구질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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