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
나흘 후, 연회 당일이 왔다. 초대장은 한 달 전에 왔으나 늦게 확인한 탓에 준비 기간이 짧았다.
꼭두새벽에 일어난 일리아는 고용인들의 도움을 받아 치장을 시작했다.
“머리 장식은 이게 낫겠어. 리본 끈은 좀 더 밝은 색으로.”
거울 앞에 앉은 일리아는 고용인들에게 이런저런 요구사항을 늘어놓았다. 익숙한 방식으로 치장하던 고용인들이 멈칫했다가 새로운 명령대로 움직였다.
“입술은 좀 더 진해도 괜찮을 것 같아.”
일리아는 늘 수수하고 옅게 화장하여 청초한 느낌을 고집했다. 그러나 오늘 화장은 사뭇 달랐다. 이목구비는 또렷하게, 색조는 튀지 않는 선에서 밝고 환하게.
화장을 끝낸 후 마지막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색이 옅은 드레스 대신 은실 자수가 들어간 남색 드레스를 입었다.
은하수가 흐르는 듯 움직일 때마다 드레스 자락이 은빛으로 반짝였다. 밤의 여왕처럼 우아한 분위기에 고용인들이 감탄했다.
“정말 아름다우세요.”
“맞아요. 주인공 같아요!”
일리아는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화장과 의상만 바꿨을 뿐인데, 사람이 바뀐 것 같았다. 부드러운 인상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지만, 치장법이 바뀌니 많이 덜어지긴 했다.
지금까지는 항상 선해 보이는 인상에 맞춰서 옷을 입었다. 리하트가 옆에서 귀엽고 맑은 느낌이 어울린다고 말해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역시 좋아하는 걸 입는 게 최고였다.
일리아는 침실을 나와, 현관으로 내려갔다. 마차에 올라탄 후 프란체와 말렉과 함께 황궁으로 향했다.
황궁은 수도 중심부에 형성되어 있었다. 높낮이가 다른 지붕들은 대부분 푸른색과 흰색으로 이루어져 있어, 멀리서 보면 파도가 몰아치는 것처럼 보였다.
어마어마한 크기 탓에 처음 황궁을 방문하는 이들은 괜히 기가 죽곤 했다. 그러나 일리아는 이 정도 규모에 익숙해 덤덤히 입궁 절차를 밟았다.
성문을 통과한 마차는 연회장 앞에 멈춰 섰다. 이미 수많은 마차가 개미 떼처럼 줄지어 서 있었다.
일리아는 말렉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호위 기사는 대동할 수 없었기에, 그들은 따로 마련된 공간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연회에 맞춰 말쑥하게 차려입은 프란체와 말렉이 허리를 꼿꼿이 폈다.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일리아는 연회장 안으로 입장했다.
연회장은 결혼하지 않은 영애와 영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주위에서 힐끗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도 말을 멈추고 놀란 눈으로 일리아를 쳐다보았다.
일리아는 제게 향하는 이목을 무시하며 좀 더 안으로 들어갔다.
“……일리아?”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일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붉은 머리카락에 화려한 의상을 갖춰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리하트였다.
“맞구나.”
긴가민가하던 리하트의 얼굴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단걸음에 걸어온 그가 일리아의 앞에서 멈춰 섰다.
“오늘 정말 예쁘네.”
리하트가 감탄하며 일리아를 훑어 내렸다. 품평하는 눈빛을 받자, 온몸에 솜털이 오스스 솟았다. 마치 가게 앞에 놓인 상품이 된 것 같았다.
이전이었다면 예쁘다는 말에 순수하게 기뻐했겠지만……, 지금은 불쾌하기만 했다.
“평소에도 이렇게 꾸미지 그랬어?”
누구 때문에 좋아하던 것들을 지금까지 포기했는데. 일리아는 대답하는 대신 그를 무시하고 앞으로 걸어갔다.
“왜 그래?”
리하트가 허둥지둥 따라왔다. 팔을 잡으려 하자, 일리아가 그의 손을 쳐냈다.
“만지지 말아요.”
“아직도 화났어?”
그때 일을 마음에 두고 있냐는 물음에 일리아의 눈빛이 더욱 가라앉았다. 만나면 그래도 미안하다는 한마디는 할 거라고 생각했다.
쓰레기한테 뭘 바란 것인지……. 역시 자신은 리하트를 너무 높게 평가한 모양이었다.
“진심으로 묻는 거예요?”
“한 달이면 화가 풀릴 줄 알았지. 그래서 일부러 연락도 안 했잖아.”
나름 배려한 거였다며 그가 헛소리를 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오히려 찾아와서 사과했어야죠.”
“그때도 말했잖아. 바람이 아니라니까.”
“대체 날 뭐로 생각하는 거예요?”
차분하게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입술이 떨려왔다. 한 달 동안 겨우 잠재워두었던 감정의 파도가 밀려들었다. 상처투성이인 가슴에 소금물이 뿌려졌다.
“그 이야긴 그만하자. 오늘 좀 예민한 것 같네.”
대화를 회피하려는 리하트의 모습에 일리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자신도 더 이상 그와 말도 섞고 싶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우리 결혼식……,”
결혼식을 미루자는 말을 꺼내려는데, 주위가 크게 술렁였다. 누군가가 연회장 안으로 입장한 탓이었다.
“에반테온 소공자잖아?”
근처에 있던 이가 중얼거렸다. 리하트가 먼저 고개를 돌렸고, 일리아는 미간을 찌푸린 채 덩달아 입구를 바라보았다.
멀어서 얼굴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다른 이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사내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탓에 일리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만난 적도 없는데, 착각이겠지?’
일리아는 에반테온 소공자를 조금 알고 있었다. 워낙 유명해서 소문이 종종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카르한 에반테온, 그는 유서 깊은 에반테온 공작 가문의 차남이었다. 지금까지 베일에 싸여있다시피 했는데, 작년에 후계자가 되면서 제국이 떠들썩했었다.
후계자였던 장남을 밀어내고 자리를 차지한 그에게는 온갖 소문이 따라다녔다.
피도 눈물도 없는 전장의 살인귀. 성격이 무척 더럽다거나 야망 때문에 형제를 쫓아냈다는 등……. 부정적인 소문이 대부분이었다.
어찌 되었든 지금 공작가 후계자는 카르한 에반테온이었다. 사람들은 카르한 에반테온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후계자가 되기 전까지는 전장을 배회했기에 뚜렷한 행적이 없었다. 연회도 오랜만에 참석하는 것이라, 사람들의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이윽고 주변 사람들 모두가 에반테온 소공자 이야기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소공자께서 연회에 참석하신 건 오랜만이지요? 그러고 보니 늘 곁에 있던 보좌관이 안 보이네요.”
“그러게요. 보좌관 때문에 접근하기가 힘들었는데, 이번에 인사를 드리러 가야겠어요.”
“저는 안 갈래요. 무서워서요.”
“아, 성격이 조금…… 그렇다는 소문을 듣긴 했어요.”
일리아는 주위 사람들의 대화를 듣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에반테온 소공자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대충 상상이 갔다. 살인귀라는 무시무시한 소문을 달고 다니니, 무척 무서운 사람일 것 같았다.
소란이 조금 가시고, 일리아는 다시 결혼식에 대해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사이 다른 귀족들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테르시안 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인사를 건네는 얼굴들이 왠지 낯익다고 생각했는데, 리하트의 추종자들이었다. 그들은 일리아를 힐끔거리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블로든 님……?”
일리아는 이름을 부른 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기가 불러 놓고 놀란 얼굴이었다. 약혼자인 리하트조차 긴가민가했으니, 그런 반응이 이상하진 않았다.
“아, 죄송합니다. 분위기가 많이 달라지셔서…….”
평소의 일리아는 차분하고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농담을 던져도 빙그레 웃고 마는, 상냥하고 얌전한 영애.
하지만 오늘은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미소 한 자락 없이 무표정한 일리아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옷차림이나 화장도 확 바뀌어서 낯설었다.
이전에는 배경처럼 존재감이 희미했다면 지금은 주인공이라도 된 듯 주위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내 약혼자가 아름답긴 하지.”
리하트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일리아를 힐끔 보았다. 마치 그의 장식품이 된 것 같아서 일리아는 기분이 나빠졌다.
어느덧 많은 이들이 주위에 몰려들었다. 리하트는 수도 사교계에서 유명 인사라, 한 마디라도 섞어보려는 이들로 넘쳐났다.
일리아는 일단 자리를 떠야겠다고 생각했다. 결혼식 이야기를 하며 둘이서 싸워댈 분위기는 아니었다. 일리아가 발걸음을 떼려는데, 한 영애가 리하트를 보며 물었다.
“……재촉하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전에 부탁드린 거 언제쯤 확답을 주실지 궁금해요.”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영식이 바로 말을 받았다.
“별장을 빌려주신다 하였는데, 언제쯤 가능한지요?”
“저는 의상실 예약을 하고 싶어요. 이름을 좀 빌려주시면…….”
물꼬를 튼 듯 다들 앞 다투어 요구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리하트는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그들의 말을 들어주었다.
“곧 해줄 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봐.”
리하트는 당연하다는 듯 일리아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속삭였다.
“자, 다 들었지?”
일리아는 저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저들의 부탁을 네가 들어달라는 말이었다.
지금까지는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전부 해결해주었다. 제게는 전혀 부담되지 않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내가 왜요?”
일리아가 표정 없이 되묻자, 리하트가 당황했다. 그런 대답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요구를 들어주면 내겐 무슨 이득이 있죠?”
“이득이라니? 내가 빌려준다고 말했으니까 당연히…….”
“그럼 당신이 직접 들어주면 되겠네요.”
일리아가 차갑게 끊어냈다. 그리고 굳어진 리하트를 보며 속삭였다.
“자기가 한 말은 스스로 지켜야지요. 안 그래요?”
시끌벅적하던 주위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일리아는 저를 바라보는 이들을 향해 비뚜름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선한 인상 탓에 도리어 천사처럼 상냥해 보였다.
일리아는 입을 다문 그들을 슥 둘러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이들이 움찔했다.
기생충도 아니고 언제까지 제게 달라붙어서 단물을 빨아낼 속셈인지.
“속이 좋지 않으니 바람을 쐬어야겠어요.”
일리아는 먼저 발걸음을 돌렸다. 자존심 때문인지 리하트는 일리아를 붙잡지 않았다. 조금씩 멀어지는데, 귓가에 리하트가 떠드는 말이 들려왔다.
“평소에는 안 저러는데, 오늘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야.”
끝까지 구질구질하게 구는 리하트의 모습에 마지막 남은 정도 떨어졌다.
그런 사람인 줄 몰랐던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 척했던 것인지. 과거의 자신을 찾아가서 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일리아는 테라스를 향해 걸었다. 그리고 지나가는 시종을 불러, 부탁했다.
“여기로 독한 술 한 병만 가져다주겠어?”
일리아는 비어 있는 테라스로 들어갔다. 커튼을 쳐서 안쪽이 보이지 않도록 한 후에 난간 앞으로 다가섰다. 반원형으로 튀어나온 테라스에 서니 정원이 한눈에 보였다.
정원을 내려다보던 일리아의 눈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들끓는 분노가 지나간 자리엔 착잡한 마음이 내려앉았다. 리하트가 나쁜 놈인 것은 이번에 깨달았지만, 두 눈으로 다시 확인하니 가슴이 쓰라렸다.
‘나를 물주로 생각하고 있었던 거지.’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새삼 비참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시종이 술병과 유리잔을 가지고 들어왔다. 일리아는 유리잔을 난간 끄트머리에 놓고, 병만 집어 들었다.
반쯤 나와 있던 코르크 마개를 잡고 당기자, 경쾌한 소리가 났다. 빨리 취하고 싶었기에 일리아는 술병을 든 채 벌컥벌컥 마셨다.
남들이 보면 교양 없다고 손가락질 할지도 모르지만, 이젠 상관없었다. 어차피 내일이면 온갖 소문이 돌 터였다. 호구였던 블로든 영애가 이상해졌다면서.
술을 물처럼 들이마신 일리아는 병을 내려놓았다.
“파혼 계획을 세워야 하는데.”
리하트가 하는 꼴을 보고 나니 하루 빨리 파혼하고 싶어졌다. 그런 후에 리하트의 눈에서 피눈물을 뽑을 것이다.
이왕이면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게 해주면 좋고.
일리아가 다시 술병으로 손을 갖다 대는 순간,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일리아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
일리아는 황급히 들어온 불청객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웬 커다란 사내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얼굴을 확인한 일리아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벌렸다. 오르골 가게에서 만났던 그 호구였다.
그 또한 일리아를 보고 놀랐는지 멈춰 섰다. 뜻밖의 조우에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누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급해서……. 금방 나가겠습니다.”
남자가 먼저 정중하게 사과를 건넸다. 일리아는 뒤돌아서는 그를 빠르게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커다란 몸이 우뚝 멈추었다.
“여기 있어도 괜찮아요.”
순간이긴 했지만, 일리아는 그의 표정을 보았다. 무척 곤란해하는 기색이었다. 급한 사정이 있는 모양이니 잠깐 정도라면 상관없었다.
“고맙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숨을 내뱉으며 인사했다. 그것이 마치 안도의 한숨처럼 느껴졌다.
남자는 최대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일리아는 문에 등을 붙이고 있는 그를 묘한 눈으로 살폈다.
가게에서 봤을 때도 생각했지만, 정말 체격이 좋았다. 신장도 남들보다 우월했고, 어깨나 덩치도 대단했다.
곰처럼 육중하고 둔해 보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타고난 골격이 크긴 하지만, 꾸준히 단련하는지 전체적으로 유려한 선이 잡혀 있었다. 커다랗지만 날렵한, 조각가들이 추구할 법한 이상적인 몸이었다.
얼굴 또한 잘생겼다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외모였다. 그러나 슥 봐서는 잘생겼다는 생각보다 매섭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다.
어둠을 자아낸 듯한 흑발과 새벽녘을 담은 푸른색 눈동자. 화가가 붓으로 힘차게 그어놓은 듯 반듯하고 짙은 눈썹은 강인해 보였다. 눈썹 아래에 치켜 올라간 눈매는 매끄럽게 각이 졌지만, 언뜻 보면 사나웠다.
활강하는 콧대와 깨진 도자기 같은 턱선은 날카로웠으며, 꾹 다물린 입술은 매정한 인상을 만들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표정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무표정하다 못해서 딱딱한 얼굴이었다.
‘나도 유심히 보지 않으면 전혀 모르겠는걸.’
사실 일리아는 타인의 감정을 잘 읽어내는 편이었다. 사람과 엮일 일이 많았기에, 기분이나 표정을 살피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희미하게 떠오르는 남자의 표정을 기민하게 읽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기분인지 전혀 알아보지 못할 터였다.
붉은 노을이 남자의 얼굴에 떨어졌다. 눈이 부실 법도 한데, 그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묵묵히 받아냈다. 아무래도 선을 지키기 위해서인 듯했다. 그것이 왠지 우직하게 느껴지면서, 한편으로 융통성 없어 보였다.
한참 만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때는…… 죄송했습니다.”
오르골 가게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 일리아는 남자를 도와주었고, 헤어지기 전에 그가 사례금을 내밀었다.
“제가 실수했습니다. 불쾌해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일리아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늦었지만 문득 사례금을 준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사례금은 왜 주신 건데요?”
“도움을 받았으면 사례하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는 좀 아니지 않나? 그것도 대뜸 돈을 주다니.
이해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자, 그가 느릿하게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사례를 하면 다들 기뻐했고……, 대가 없는 친절은 없으니까요.”
지극히 당연한 말을 읊듯 그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일리아는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입술을 달싹였다. 대가가 있으면 친절해지는 건 당연하다만, 대가 없이 친절한 사람은 없다니.
얼마나 팍팍하게 살아온 거야…….
그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어느 정도 오해는 풀린 것 같았다. 적어도 허세를 부리거나, 자신을 무시하려고 했던 행동은 아니었다. 일리아는 누그러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는 단순히 호의를 베푼 거였어요.”
“호의……?”
그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마치 호의라는 단어를 모르는 사람처럼 낯선 얼굴이었다.
“저는 당신의 하인도, 직원도 아닌걸요.”
그는 말이 없었다.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서, 일리아는 좀 더 직설적으로 말했다.
“사례 같은 거 안 해도 된다는 말이에요. 특히 돈은 필요 없어요.”
일리아는 마지막 말을 강조했다. 침묵하던 남자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는 다시 한번 사과했다. 계속된 사과에 조금 부담스럽긴 했는데, 나름 신선했다. 귀족이 자존심을 버리고 사과를 건네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느 가문인지 모르겠지만, 예의 바르네.’
일리아는 술병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래도 병나발을 부는 것은 예의가 아닌 듯해서 옆에 치워뒀던 유리잔을 가져왔다. 유리잔에 술을 따라 한 모금 마셨다. 시선이 느껴지자, 일리아가 물었다.
“마실래요?”
“술은 절제하고 있습니다.”
정말 바른 생활 청년이네.
일리아는 더는 권하지 않고 홀로 술을 홀짝홀짝 마셨다. 술병을 거의 다 비우자, 취기가 조금 돌았다. 심란한 마음도 조금 누그러졌다. 잔을 내려놓은 일리아가 그를 보며 물었다.
“갑자기 테라스로 뛰어 들어온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그가 머뭇거리자, 일리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곤란하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강제로 물어보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다르게 받아들였는지, 딱딱하게 다물린 입매를 열었다.
“……제게는 약혼 이야기가 오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자는 불안한지 문 쪽을 힐끔 보았다. 약혼자 때문에 열 받아서 혼자 술을 마셨던 일리아는 급격히 흥미가 생겼다.
“그쪽도 약혼자가 될 사람이 말썽 피워요?”
“말썽…….”
“무슨 문제가 있어요?”
단어를 정정해주자, 그가 눈을 내리깔았다.
“계속 따라오는데, 불편해서…….”
“따라온다고요?”
연회장에서 따라다니는 건 딱히 이상하지 않은데, 뭐가 문제지?
일리아가 궁금하다는 얼굴로 빤히 쳐다보자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말해 달라는 눈빛을 이기지 못한 남자가 느릿하게 예시를 들었다.
“행동이 조금…… 과합니다.”
듣자하니 그와 약혼 이야기가 오가는 상대는 잠깐이라도 연락이 되지 않으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왔다. 행선지를 말하지 않아도 우연을 가장하여 따라왔고,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면 길길이 날뛰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미 가족들과 왕래하며 벌써부터 부인이 된 것처럼 사사건건 간섭해왔다. 숨이 막힐 정도로. 그의 말이 끝나자 일리아는 생각했다.
‘와. 스토커네…….’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일리아는 곧바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 남자의 성격으로 보아, 딱 잘라내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오르골 가게의 점원한테도 강매 당할 뻔하지 않았던가.
“……이러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지만 번번이 무시당하는지라. 약혼식을 치르면 더 심해질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일리아는 측은한 시선을 보냈다. 귀족 가문에서 정략혼은 아주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스토커는 좀 아니지 않나. 심지어 남자는 상대를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거 큰일이네요. 가족들과 의논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가족들은…….”
그가 입을 다물었다.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지자, 일리아는 화제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저도 이번에 약혼자 때문에 고생을 좀 했거든요.”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묵묵히 저만을 바라보는 눈빛에, 일리아는 가족들에게도 하지 않았던 말을 내뱉고 말았다.
“그 사람이 저를 배신했어요.”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문을 열고, 리하트에게 파혼하자고 고래고래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파혼까지 가기 위해선 넘어야 할 산들이 너무 많았다.
‘리하트보다 신분이 높았다면 이런 고민은 하지 않았을 텐데.’
울컥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일리아가 다시 입을 열려는 그때였다. 테라스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누군가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에반테온!!!”
카랑카랑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일리아는 술이 확 깼다.
“에반테온, 갑자기 사라져서 놀랐잖아요!”
길게 늘어뜨린 남색 머리카락에 화려한 옷을 입은 여자가 그의 팔을 붙들며 말했다. 테라스 끄트머리에 서 있던 일리아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에반테온이라니,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뭐, 에반테온?!’
일리아는 눈을 부릅떴다. 오늘 연회에 참석한 사람 중에서 에반테온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공작 가문의 후계자인 카르한 에반테온. 아까 사람들이 그렇게나 떠들어대던 소문의 주인공이었다.
‘이 남자가 에반테온 소공자라고?’
일리아는 당황한 나머지 대놓고 남자를 쳐다보았다. 전장의 살인귀라며? 성격 더럽다며……? 도대체 어디가? 첫인상이 너무 강렬해서 그런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그의 팔을 붙들고 뭐라고 말하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뒤늦게 일리아를 발견한 그녀가 무시무시한 눈빛을 보내왔다.
일리아는 곧바로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카르한 에반테온과 약혼 이야기가 오간다는 스토커였다.
“……에반테온, 그런데 이 여자 뭐예요?”
여자의 물음에 카르한은 침묵했다. 생각해보면 일리아와 카르한은 서로 이름도 소개하지 않았다.
그가 대답하지 않자, 여자는 일리아를 아래위로 훑어 내렸다. 그리고 얼굴을 빤히 보더니 확신에 가득 차서 말했다.
“블로든 영애, 맞죠?”
일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는 척은 해주고 싶은데, 그녀가 누구인지 몰랐다. 리하트 무리 중 한 사람이었다면 낯이라도 익었을 테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일단 저쪽은 내게 호의적이진 않은 듯한데.’
일리아는 카르한을 힐끗 보았다.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으나, 떨리는 눈썹 끄트머리에서 당혹감이 그대로 묻어나왔다. 갑자기 스토커가 찾아와서 놀란 모양이었다.
‘귀찮으니까 그냥 피하자.’
치정싸움에 말려들어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일리아는 자연스럽게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뗐다.
“저는 막 들어가려고 했으니, 두 분 말씀 나누세요.”
“갑자기 자리를 피하는 걸 보면, 제가 없는 사이 수상쩍은 짓이라도 했나 보죠?”
신경을 긁어오는 말에 일리아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름을 부르고 싶은데, 누군지 몰라서 입술만 벙긋댔다.
“나를 몰라요?”
자존심이 상한 듯 여자는 언성을 높였다. 일리아가 대답하지 않자, 그녀가 앙칼지게 외쳤다.
“스텔라 델로타예요!”
익숙한 이름에 일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델로타는 백작에 불과했으나, 재력으로 널리 명성을 떨친 가문이었다. 극장, 운송업, 음식점, 의상실 등 여러 사업체를 가지고 있었으며, 델로타 가문 인장을 상표로 내세웠다. 그리고 블로든 가문과 델로타 가문은 서로 앙숙이었다.
원래 델로타 가문은 대대로 제국에서 제일가는 부자였다. 하지만 일리아가 태어난 후로 상황이 역전되어 버렸다.
날이 갈수록 격차는 심해졌고, 지금까지 누려온 명성을 블로든 가문에게 고스란히 내어줘야 했다.
자존심 상한 델로타는 그 후로 사사건건 방해를 해왔다. 블로든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고 하면, 물량을 내세우거나 가격을 낮추며 망하도록 유도했다.
하지만 일리아의 재물운은 철옹성 같았다. 그들이 아무리 방해해도, 블로든은 망하기는커녕 승승장구할 뿐이었다.
델로타와 엮인 수많은 사건 중에서 일리아의 기억에 남는 일이 하나 있었다.
‘마차 도안 사건이었지.’
과거에 블로든 가문에서는 신상품 출시를 앞두고 있었다. 선보일 제품은 고급 마차였는데, 출시일 전에 도안을 도둑맞고 말았다. 블로든은 부랴부랴 도안을 새로 만들었고, 일리아도 그 자리에 함께했었다.
부모님은 일리아가 있으면 성공할 거라 믿었다. 결국 최종 도안을 선택하는 것은 일리아의 몫이 되었다.
어린 일리아는 여러 도안 중에서 가장 과감한 디자인을 골랐다. 디자이너들은 난색을 표했지만, 블로든 가문에서 일리아의 말은 곧 신탁이나 다름없었기에 그대로 제작에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델로타에서 마차를 출시했다. 블로든이 도둑맞은 도안과 똑같은 마차였다.
도안을 훔쳐간 범인이 델로타라는 것을 알았지만, 증거가 없었다. 도리어 델로타 쪽은 몇 년 전부터 준비했다며 떠들썩하게 선전했다.
그렇게 델로타 가문은 자신만만하게 판매를 시작했지만……. 하늘이 벌을 준 것일까. 델로타에서 선보인 마차는 쫄딱 망했다. 얼마나 망했냐면, 천 대를 생산해서 다섯 대가 팔렸다.
그 후에 블로든 가문이 새로운 도안을 바탕으로 제작한 마차를 출시했다. 너무 특이했던지라, 처음에는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유행을 선도하는 이들이 혁명적이라는 찬사를 보내왔다. 유행이라면 돌도 씹어 먹을 사교계에서 마차는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
마차를 출시한 지 한 달이 되었을 때. 블로든은 구백구십오 대의 마차를 팔았다. 정확히 델로타가 손해 본 만큼이었다. 그리고 눈앞에 서 있는 스텔라는 델로타 가문의 하나뿐인 영애였다.
회상을 끝낸 일리아의 시선이 달라졌다.
‘살 엄청 뺐네…….’
일리아가 아는 스텔라는 덩치가 굉장했었다. 살을 뺐다는 소문을 듣긴 했지만, 아예 사람이 바뀐 것 같았다.
일리아는 발걸음을 되돌렸다. 귀찮으니 피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앙숙인 델로타 영애라면 또 말이 달랐다. 대놓고 시비를 걸어온다면 더더욱.
“아아, 델로타.”
일리아가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스텔라의 눈썹이 휘어졌다. 그녀는 카르한의 팔을 붙들던 손을 떼어내고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마주 서게 되자, 스텔라가 일리아를 훑어 내리며 물었다.
“그래서 지금 테라스에서 뭐 하는 짓이에요?”
“뭐 하는 짓이라뇨?”
일리아가 되묻자, 스텔라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내 남자랑 한 공간에 있었잖아요! 수작 부리는 거 모를 줄 알아요?”
“영애야말로 자신감이 많이 부족한가 봐요. 저를 견제할 정도니.”
“무슨…….”
스텔라가 주춤하자, 일리아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분명 부드럽고 상냥한 얼굴인데, 눈빛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남이 쉬는 공간에 막무가내로 들이닥치려면 증거라도 들고 왔어야죠. 최소한 입 맞추는 현장이라도 습격하든가.”
증거가 없다면 의심의 근거라도 가져왔어야 했다. 한 달 전 자신처럼, 현장 검거라도 하든가.
일리아는 차갑게 미소 지었다. 리하트 개자식.
“심지어 아직 약혼한 사이도 아니라던데, 많이 불안했나 보죠?”
“일리아 블로든!”
“아니면 소공자가 못 미더웠어요?”
그러니까 갑자기 쳐들어온 거 아니냐며 일리아가 물었다. 스텔라는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아니, 나는…….”
스텔라는 변명하기 위해서 뒤에 서 있던 카르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녀는 그대로 굳어졌다.
일리아도 덩달아 카르한을 바라보았다. 미간을 찌푸린 그는 무척이나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말을 붙이기가 무서울 정도였다.
“에, 에반테온……. 화, 났어요?”
스텔라가 말을 더듬거렸다. 카르한의 매서운 분위기에 압도당해서 겁먹은 듯했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일리아는 가만히 카르한을 살폈다.
미간이 좁아지면서 눈썹은 위로 치켜 올라갔고, 눈매는 화살촉처럼 날카로웠다. 원래도 사나운 얼굴인데, 지금은 마치 눈빛으로 꺼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갑자기 주목 받아서 당황했나 본데.’
일리아는 그의 기분을 알아차릴 수 있었지만, 남들이 보기엔 단단히 화난 얼굴이었다. 마침내 굳게 다물린 입매가 열렸다. 그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스텔라가 한 걸음 물러섰다.
“그……, 저는 먼저 들어갈게요. 절대 당신을 못 믿어서 그러는 건 아니에요……!”
당당하게 들이닥쳤던 그녀는 대번에 꼬리를 말고 테라스를 떠났다. 탁, 소심하게 문이 닫혔다.
“싱겁긴.”
일리아가 혀를 차자, 카르한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왠지 못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일리아는 조금 억울해졌다.
이 정도면 무척 고상하게 끝낸 거지. 그리고 숙적인 델로타 가문한테는 가위바위보도 지지 말라 했다.
“먼저 시비 걸어오는데, 가만히 있으면 멍청이죠.”
일리아가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멀찍이 떨어져서 일리아를 바라보던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영애께서는 무척 당당하신 것 같습니다.”
‘돌려 까는 욕인가……?’
일리아가 속으로 가늠하고 있는데,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
“부럽습니다.”
일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했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 속에서 진의를 파악하려 애썼다. 푸른색 눈동자는 한 점의 거짓도 몰랐다.
“에반테온 소공자께 부럽다는 말을 들을 날이 올 줄은 몰랐네요.”
오히려 누구보다 당당해질 수 있는 사람이 눈앞의 남자였다. 다른 공작가 중에서도 으뜸이라 불리는 에반테온. 그리고 유일한 후계자인 그.
당당하다 못해, 패악을 부린다 해도 앞에서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신분이 하나의 성격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저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카르한이 눈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자책에 가까운 어조라 일리아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저 스스로도 에반테온 후계자와 어울리지 않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다들 저를 무서워하니까요.”
일리아는 에반테온 소공자에 대한 소문들을 떠올렸다.
피를 즐기는 살인귀. 성격 나쁘고 오만한 사람. 형제를 끌어내리고 후계자가 된 냉혈한. 타인을 벌레 보듯 하며, 수많은 여자를 가지고 놀았다는 소문도 있었다.
‘하나도 안 맞잖아.’
일리아에게 그의 첫인상은 호구였다. 겨우 두 번 본 것으로 판단하기는 섣부르지만, 일리아가 본 카르한은 소문과 달랐다.
예의 바르고, 자존심을 내세우기보다는 사과가 먼저 튀어나왔으며,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커다란 새우였다. 나쁜 남자는커녕, 실상은 스토커에게서 도망치는 사람이니…….
아무래도 분위기가 날카로워 오해 받는 모양이었다. 착한 얼굴과 그렇지 못한 성격을 가진 자신과 정반대였다.
“영애께서는 제가 무섭지 않습니까?”
“무서워해야 하나요?”
조심스럽게 던져진 물음에 일리아가 되묻자 카르한이 당황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건 다른 사람이고요.”
아무리 겉모습이 사납다 한들, 가게에서 오르골을 강매 당하던 모습이 각인된 후였다. 그리고 가만히 보고 있으니 점점 그의 표정이 읽혔다.
카르한을 살피던 일리아가 반대로 질문을 던졌다.
“소공자. 아까 그녀에게 화가 난 게 아니라 당황한 거였죠?”
“……!”
어떻게 알았냐는 듯, 그의 눈이 커졌다. 일리아는 태평하게 말했다.
“제가 그런 쪽에 감이 좋아서요.”
일리아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고 타인을 분석하는 데 능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기분이 어떤지, 어떤 목적으로 제게 접근했는지. 어쩔 때는 상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필요한 것을 알아차리곤 했다. 편하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불쾌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아닙니다.”
일리아의 사과에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여전히 얼떨떨한 듯 카르한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처음입니다. 한눈에 저를 제대로 알아본 사람은.”
꼿꼿하게 세워진 몸이 풀어졌다. 팽팽하던 실이 느슨해지듯 몸 선이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지금까지 경직되어 있었던 까닭은 긴장해서였던 거다.
“저는…… 오해받는 게 익숙합니다.”
망설임 끝에 카르한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솔직한 말은 처음 내뱉어 본다는 듯, 그 스스로도 낯설어 보였다.
일리아는 완전히 몸을 틀어 카르한을 마주 바라보았다. 그의 입술은 열리지 않을 철문처럼 무거웠으나, 새파란 눈동자는 수많은 말을 담고 있었다.
허락을 구하듯 그가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명령을 내리는 데 익숙할 신분의 사내가 제 눈치를 보는 것이 새롭긴 했다.
“듣고 있으니 계속 말해보세요.”
일리아의 대답에 카르한이 어렵사리 다음 말을 꺼냈다.
“다들 저를 무서워하는 것 같습니다.”
카르한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빈틈이 없었다. 사람들이 왜 겁을 먹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 같았다.
“말주변도 없는 데다가, 사실 이렇게 오랫동안 대화를 이어나가는 일도 흔치 않아서…….”
카르한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사납게 느껴졌던 기운이 한층 덜어졌다. 이런 상황이 낯선 듯 순수하게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분석하듯 그의 얼굴을 살피던 일리아는 조금 측은해졌다. 혹시 조금이라도 꾸며낸 구석이 있나 싶었지만, 그렇진 않았다.
일리아의 표정이 좀 더 부드러워졌다. 고해성사든 뭐든 전부 들어줄 것 같은 상냥한 얼굴에 카르한이 안도하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제 얼굴이 많이 흉측해서 그렇겠지요.”
“……?”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일리아는 말문이 막혔다.
내가 지금 흉측이라는 단어를 잘못 알고 있나? 아니, 저 얼굴이 흉측하다면 여기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아틀리에에 그를 세워두면 조각상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다들 제 얼굴만 보면 굳어지곤 해서…….”
일단 소문이 너무 강력해서 그렇지 않을까……. 게다가 인상도 매섭고 표정까지 딱딱했다. 표정이라도 조금 부드러워지면 훨씬 나을 텐데.
“그건 표정이, 으음…….”
“많이 심각한가요?”
“아뇨, 전혀요. 평소에 미소를 짓는 건 어때요? 그럼 괜찮을 것 같은데요.”
일리아가 해결책을 제시하자,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순간 너무 놀라서 일리아는 숨을 삼켰다.
‘진짜 심각한데…….’
입만 웃으니 더욱 무서워졌다. 잘생겼지만 그 이상으로 살벌한 악당이 ‘너 이제 죽었다’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게 아닌가요?”
일리아의 반응을 본 카르한이 입꼬리를 원래대로 되돌렸다. 살짝 처진 어깨가 시무룩해 보였다.
일리아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실 카르한 정도면 굳이 스스로를 바꾸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었다. 위에서 군림하기엔 지금 같은 모습이 유리했다. 도리어 그의 진짜 성격을 남들이 알아버리면 만만하게 볼 터였다.
소문처럼 막 살아도 앞에서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신분이 아까웠다.
‘신분?’
술을 마셔서 둔해진 머리가 순식간에 맑아졌다.
일리아는 고개를 똑바로 한 채 카르한을 제대로 보았다. 눈앞에 서 있는 카르한 에반테온은 황족을 제외하고 가장 높은 위치에 오를 남자였다. 그리고 그의 진짜 모습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했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에반테온 소공자?”
일리아가 웃으며 그를 불렀다. 사심 가득한 미소였지만, 마치 천사가 내려온 듯 무척 다정해 보였다.
“그러니까 남들이 소공자를 무서워하지 않도록 오해를 풀고 싶은 거죠?”
“예? ……예.”
그가 솔직하게 대답하자 일리아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장사꾼인 부모를 똑 닮은 미소였다.
“그거 제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떻게……?”
일리아는 난간에서 등을 떼고 한 걸음씩 앞으로 걸어갔다. 테라스의 끝과 끝에 서 있던 두 사람의 거리는 단숨에 가까워졌다.
카르한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그의 등에 닿는 것은 굳게 닫힌 문이었다.
해는 한참 전에 졌다. 황혼의 푸르스름한 빛이 테라스를 덮어왔다. 어둑한 그림자가 카르한의 위로 드리웠다.
“대신, 소공자께서는 저와 거래해 주셔야겠어요.”
일리아의 보라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별처럼 반짝였다. 카르한은 잠시 홀린 듯이 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물론 소공자께도 나쁘지 않은 조건이에요.”
카르한이 뒤늦게 정신 차렸다. 이윽고 가느다란 팔이 뻗어져 나와, 그의 어깨를 스쳤다.
놀란 그가 그대로 굳어버렸을 때, 일리아는 살짝 벌어져 있던 커튼을 단단히 쳤다. 연회장에서는 이쪽을 전혀 볼 수 없도록. 천천히 팔을 거둬들인 일리아가 말했다.
“동맹을 맺고 서로의 파혼을 돕는 거예요.”
느릿하게 깜빡이던 푸른색 눈동자가 멎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듯해서 일리아는 좀 더 자세히 말했다.
“저는 제 약혼자랑 파혼하고 싶거든요. 소공자께서도 약혼을 원치 않으시는 것 같던데.”
“하지만 그럴 수는…….”
“그럼 이대로 스토커랑 약혼하겠다는 말이에요?”
카르한이 어깨를 굳혔다. 일리아는 딱딱해진 그의 얼굴을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제가 델로타 영애를 좀 아는데, 점점 더 심하게 집착할걸요? 결혼하고 나면 숨 쉬는 것도 참견할지도 몰라요.”
지금보다 더 심해질 집착을 상상한 듯 카르한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그러나 그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되니까, 천천히 생각해 봐요.”
일리아는 팔을 뻗어, 카르한의 등이 닿지 않은 쪽 문을 열었다. 달칵, 소리와 함께 문고리가 돌아갔다. 카르한을 스쳐지나가며 일리아가 속삭였다.
“사흘 뒤 두 시에 레디슨 거리의 중앙 3번째 시계탑에서 만나요.”
속삭임은 바람 같았고, 문이 닫힘과 함께 목소리도 흩어졌다.
테라스를 빠져나온 일리아는 연회장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자 연회장은 반짝이는 불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저녁이라 그런지 아까보다 분위기가 무르익은 상태였다.
흥겨운 음악과 춤을 추는 남녀, 구석에서 속살거리는 이들. 널리고 널린 싸구려 화폭을 눈앞에 둔 듯 무심히 둘러보다가 걸음을 뗐다.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는 없었다.
원래는 리하트에게 결혼식을 미루자고 통보하러 온 자리였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듯했다. 에반테온 소공자가 제게 협력하면, 곧바로 파혼할 생각이니 말이다.
일리아는 곧바로 연회장을 나섰다. 어둑해진 정원으로 나오니 대기하고 있던 프란체와 말렉이 다가왔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 뒤따라온 놈이나 위험해 보이는 이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의 시선이 일리아에게 고정되었다.
“아가씨, 연회는 즐거우셨습니까?”
“혹시 누가 이상한 짓을 하지는 않았습니까?”
일리아는 옅게 미소 지었다. 충성심 가득한 눈빛을 보고 있으면, 내 편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역시 내 사람들에게만 잘하면 되지.’
아무에게나 다 잘해주는 건 쓸데없는 짓이었다. 일리아가 새삼 깨닫고 있는데, 프란체의 표정이 점점 나빠졌다.
“정말로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응?”
프란체는 허리춤에서 칼이라도 뽑을 기세로 외쳤다.
“어떤 놈입니까! 제가 당장……!”
“아무 일도 없었어.”
일리아가 뒤늦게 그를 말렸다. 프란체는 가만히 있으면 귀족처럼 번듯하고 우아해 보였으나, 일리아와 연관된 일에서는 시정잡배처럼 날뛰었다. 욕도 어찌나 잘하는지, 일리아가 알고 있는 험악한 말들도 대부분 그에게서 배웠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를 전속 호위 기사로 삼은 이유는 하나였다. 실력. 성년식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프란체는 일리아가 아는 한,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였다.
“뭐, 짜증 나는 얼굴을 보긴 했는데…….”
“어떤 놈입니까?”
리하트를 떠올리며 말하자, 프란체가 눈을 희번덕거렸다. 평소라면 중재 역할을 맡을 말렉도 눈빛이 달라졌다. 만약 일리아가 이름만 대면 그놈을 당장 끌고 올 터였다.
프란체가 금방이라도 안으로 달려갈 것처럼 굴자, 말렉이 어깨에 손을 턱 얹었다.
“프란체, 여기서 소란을 일으키면 아가씨께 폐를 끼칠 테니 일단은 참아라.”
“하지만…….”
프란체는 분한 듯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말렉이 그를 한쪽으로 끌고 가서 뭐라고 수군거렸다. 습격 어쩌고 하는 말이 들려왔다. 일리아는 그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난 괜찮아. 신경 쓸 거 없어.”
일리아는 화려한 불빛으로 가득 찬 연회장을 바라보았다. 저곳에서 다른 이들에게 둘러싸여 웃고 떠들 리하트가 눈에 선했다. 고개를 조금 더 올리니, 아까 서 있었던 테라스가 보였다.
에반테온 소공자…….
바람이 불어왔다. 일리아의 환한 금발이 바람결을 따라 흐트러졌다.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일리아가 테라스에서 시선을 떼고 말했다.
“복수는 내가 직접 할 거니까.”
***
“으……. 머리야.”
늦은 아침, 잠에서 깨어난 일리아는 머리를 짚었다. 누군가가 제 머리를 중앙에 두고 톱질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독한 술을 마셨더니 숙취가 있는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느릿하게 이불을 밀어내고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잠시 멍하니 벽을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일리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열리더니, 고용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쟁반이 들려있었다. 일리아는 쟁반에 놓인 묽은 토마토 수프를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일어나시면 꼭 드시라고 하셨어요.”
“오라버니가?”
아무래도 헤인리는 자신이 술을 마신 것을 알고 숙취에 좋은 음식을 보낸 것 같았다.
일리아는 그릇을 받아 수프를 먹었다. 배 속이 따뜻해지는 것과 동시에 기분이 묘했다. 이전이었다면 있는 듯 없는 듯, 서로에게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후로 무시할 줄 알았는데…….’
며칠 전, 일리아는 헤인리에게 사과했다. 지은 죄가 있으니 사과를 받아주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고작 한 발자국 나아갔을 뿐이지만, 그때의 사과는 절대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완전히 비틀어졌다고 생각했던 관계에 희망이 보였다. 일리아는 빈 그릇을 내밀며 말했다.
“오라버니께 잘 먹었다고 전해줘.”
“네, 아가씨.”
고용인이 방을 나가고, 일리아는 어제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정리해 나갔다. 역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카르한 에반테온이었다.
‘그 사람이 에반테온 소공자일 줄은…….’
지나가는 인연이라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재회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처음 오르골 가게에서 봤을 때는 단순히 호구라고 생각했는데, 그 악명 자자한 에반테온 소공자일 줄이야.
수많은 소문을 휘감고 다니는 그는 생각보다 더 희한한 사람이었다. 높은 자리에 있음에도 지위를 이용할 줄 모르는 남자.
권위라거나 자만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도리어 이용당하기 딱 좋을 정도로 자기주장이 약했다. 그래서 일리아는 그 점을 이용했다.
-동맹을 맺고 서로의 파혼을 돕는 거예요.
스스로 생각해도 무척 당돌했다. 아무리 유한 성격이라 한들, 상대는 에반테온이었다. 말 한 마디로 타인을 짓누를 수 있는 막대한 권력을 쥐고 있었다.
심지어 일리아는 그를 회유하기 위해 가족들에게도 감춰놓은 비밀을 털어놓았다. 약혼자가 배신했으며 파혼을 생각 중이라는 것.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다시없을 기회였고, 가장 좋은 수였다. 일리아는 카르한의 신분이 필요했다. 리하트조차 감히 에반테온 가문에 대적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에반테온을 방패막이 삼는 대가로 일리아는 카르한에게 델로타 백작가문보다 더 많은 부를 쥐여줄 수 있었다.
마침 델로타와 작위도 같으니 이쪽이 더 나은 조건이라 할 수 있었다.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 일종의 등가교환인 셈이었다.
‘게다가 스텔라를 상대로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할 필요도 없고.’
스텔라 델로타에게는 지금까지 당한 게 많았다. 가문끼리 사이가 좋지 않은 데다가 만날 때마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왔다.
일리아는 착한 약혼자가 되고 싶어서 평판에 무척 신경 썼기에 매번 당하기만 했다. 드디어 되돌려줄 기회가 찾아왔다.
‘그 전에 에반테온 소공자가 거래를 받아들이는 게 우선이겠지만.’
일리아는 카르한을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
사흘 후, 약속 당일이 됐다.
일리아는 간단하게 치장을 끝낸 후, 최대한 눈에 덜 띄는 마차에 올라탔다. 약속 시간까지 아직 여유가 있었지만,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일찍 나갈 생각이었다.
번화가까지 나온 마차는 약속 장소인 시계탑을 지나쳤다. 그때 일리아는 시계탑 아래에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잠깐, 멈춰 봐.”
일리아의 말에 마차가 멈추었다. 일리아는 커튼을 완전히 걷어내고 창문을 통해 남자를 유심히 살폈다. 멀리서도 눈에 띈다 싶더니, 카르한 에반테온이었다.
일리아는 자신이 시간을 착각했나 하고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많이 남았는데?”
한 시간 동안 저러고 있을 생각이었나.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고위 귀족들은 대부분 약속 시간에 일부러 늦곤 했다. 상대에게 제 위치가 더 높다는 것을 인식시키는 간단한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초장에 기를 눌러놓으려고 몇 시간씩 늦는 이들도 허다했다.
그러나 카르한은 그런 얕은 수 따위 생각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정말이지 지나치게 착실한 남자였다.
일리아는 저만치 서있는 카르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카르한을 피해 빙 돌아갔다. 다들 필사적으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이었다.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저 서 있을 뿐인데, 보기 드문 장신이라 그런지 위압감이 느껴졌다. 게다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어두운 색이라, 무겁다 못해 무서웠다.
“얼굴이 아깝네.”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 활용할 줄을 몰랐다. 일단 칙칙한 옷부터 좀 어떻게 하고 싶었다. 일리아는 이렇게 된 이상 볼일을 뒤로 미뤄야겠다고 생각했다. 저대로 한 시간 동안 방치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아이고!”
카르한의 앞을 지나치던 노인이 돌부리에 걸려 휘청거렸다. 간신히 넘어지진 않았으나, 들고 있던 봉투에서 사과와 빵 같은 식료품이 바닥에 흩어졌다.
우두커니 서 있던 카르한이 허리를 숙여 사과를 주웠다. 그러자 노인이 화들짝 놀라서 무릎을 꿇었다.
“아, 안 됩니다! 저희 가족의 오늘 치 식량입니다. 제발 이것만큼은…….”
마치 카르한이 강탈하기라도 한 것 같은 반응이었다. 노인은 안 된다며 싹싹 빌었고, 그것을 본 주위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카르한은 말없이 사과를 내밀었다. 노인이 황급히 사과를 낚아챈 후에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도망치듯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 버렸다.
카르한은 노인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그의 얼굴에는 어떠한 동요도 없었다.
‘……익숙하다고 해서 괜찮을 리는 없지.’
거절도 못 하고 이리저리 휘둘리기 좋은 호구라고 생각했다. 수동적이며, 먼저 나설 줄을 모르는 사람.
하지만 방금 모습을 보고 일리아는 생각을 조금 바꾸었다. 호구는 호구인데, 천성이 착한 남자였다. 오해 받을 줄 뻔히 알면서도 노인을 도와준 것이었다.
어떻게 지금까지 진짜 성격을 안 들켰을까. 일리아는 아무것도 못 본 척 카르한에게 다가갔다.
“일찍 오셨네요.”
고개를 돌린 카르한은 예상치 못했다는 듯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언제 오신 거예요?”
“좀 전에 왔습니다.”
“아직 약속 시간까지 한 시간이나 남은 거 아세요?”
“……혹시 늦을까 봐.”
느릿하게 대답한 카르한이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왜 이렇게 일찍 왔느냐고 묻는 듯했다.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일찍 나왔는데, 취소됐어요.”
사실대로 말하면 자긴 괜찮으니 볼일 보고 오라고 말할 남자였다. 하얀 거짓말을 곁들인 일리아가 먼저 걸음을 뗐다.
“여기서 이야기할 일은 아니니, 일단 따라오세요.”
일리아가 앞장서고,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카르한이 뒤를 따랐다. 시계탑에서 동쪽으로 걸었다. 소광장의 삼 층짜리 분수대를 지나고, 수많은 간판을 지나쳤다.
번화가를 벗어나니, 옹기종기 모인 주택들이 늘어졌다. 아이비로 뒤덮인 담벼락 귀퉁이를 돌자 골목이 나타났다.
얼마나 걸었을까, 골목 끄트머리에 가게가 하나 있었다. 음지에서 유일하게 햇빛이 드는 자리였다. 무척 외진 곳이라 아는 사람만 찾아올 수 있을 듯했다.
카르한은 찻잔 그림이 그려진 나무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찻집인 모양이었다. 일리아가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갔다.
가게는 아늑하고 깔끔한 분위기였다. 테이블마다 간이 칸막이와 커튼이 달렸고, 타원형의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왔다.
테이블이나 의자는 전부 고급이었으며, 소품 하나하나 세심한 손길이 닿아 있었다. 번화가 목 좋은 자리에 있었다면 문전성시를 이룰 법한 훌륭한 가게였다. 그러나 위치가 위치인지라, 가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일리아는 가게 안쪽으로 걸어가 아무 자리에나 앉았다. 마치 주인처럼 거리낌 없는 태도였다. 잠시 망설이던 카르한이 맞은편에 앉았다.
“수행원은 데리고 오지 않았나요?”
“한 명 있긴 한데, 일이 있어서 오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무려 에반테온의 후계자인데, 호위 정도는 데리고 오는 게 당연하지 않나. 일리아가 의아하게 생각하자, 그가 말을 이었다.
“대부분은 다가올 생각도 하지 않는지라.”
대충 납득이 갔다. 아까도 카르한의 주변만 한산했었다.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던 그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무척 조용하군요.”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해뒀어요.”
“……대여하신 겁니까?”
“아뇨, 제 가게거든요.”
그는 곧장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일리아는 테이블 끄트머리에 놓여 있던 메뉴판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일상 이야기를 하듯 말을 이었다.
“이틀 전에 매입했어요. 이 가게 근방은 전부 제 소유예요.”
당황해서 눈을 깜빡이는 카르한에게 일리아가 메뉴판을 내밀었다.
“뭐 드실래요?”
“……영애와 같은 것으로.”
“홍차 두 잔 준비해주겠어?”
일리아의 목소리가 가게 안에 울려 퍼졌다. 그러자 문 쪽에 서 있던 호위 기사 말렉이 부엌으로 들어갔다.
카르한이 잠시 그쪽을 보는 사이, 일리아가 메뉴판을 치웠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그동안 생각해봤어요?”
일리아가 제안한 거래는 ‘서로의 파혼을 도와줄 것’이었다. 엄밀히 말해서 카르한은 아직 약혼하지는 않았으나, 이야기가 오가는 중이었다.
카르한은 말없이 제 손가락을 매만졌다. 길쭉한 손가락이 얽혔다가 풀리기를 반복했다. 한참 만에 그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사실, 제안을 거절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온 겁니다.”
일리아는 눈을 깜빡였다. 얼굴은 전혀 거절하고 싶지 않은 것 같은데……?
“거절하겠다고요?”
일리아가 묻자, 카르한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마치 훈계를 기다리는 사람 같았다. 거절하는 것이 무척 익숙하지 않아 보였다. 그를 찬찬히 살피던 일리아는 다시 질문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상대 집안과 논의 중이고, 집안에 폐를 끼칠 수는 없으니…….”
거절하는 이유 중, 그의 의견은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았다. 무언가에 잔뜩 억압된 사람 같았다. 가만히 듣던 일리아가 물었다.
“소공자의 의견은요?”
“……제 의견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소공자의 약혼이잖아요. 결정은 당신이 하는 거예요.”
일리아의 말에 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는 듯 당황한 모습이었다.
“당신이 원해서 하는 약혼이라면 납득할게요. 소공자는 진정 델로타 영애와 약혼하고 싶나요?”
카르한은 대답하지 못했다. 입술은 마치 목소리를 가두는 감옥이 된 것처럼 한참 동안 열릴 줄 몰랐다.
“저는…….”
곤혹스러운 듯 그의 시선이 허공을 배회했다. 일리아는 스스로의 마음을 파악하지 못한 카르한을 대신하여, 자신이 본 그대로를 말해주었다.
“제가 본 소공자는 약혼이 싫은데도 참는 것처럼 보였어요.”
꿰뚫어오는 시선에 카르한은 어깨를 짧게 떨었다. 한참 말이 없던 그가 느릿하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제가 감히 결정을 내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안 될 거 뭐 있어요.”
냉큼 돌아오는 대답은 시원했다. 마치 파혼 정도는 별일 아닌 것처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 또한 스스로 결정 내리지 못했어요. 늘 남의 의견을 따랐죠.”
“…….”
“하지만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일리아의 보라색 눈은 햇빛이 비치는 수면처럼 반짝였다. 생동감 넘치는 눈이 카르한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남들이 손가락질한다고 해도 어쩌겠어요. 그들이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닌데.”
무덤덤하던 카르한의 얼굴이 조금씩 허물어졌다. 속눈썹이 떨렸고, 단단히 다물린 입매에 틈이 생겼다. 짧은 시간 동안 무척 생각이 많아 보였다. 일리아는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혼자 결정을 내리기 두렵다면, 차라리 저한테 사기 당한 거라고 해요.”
일리아는 자기를 탓해도 된다고 당당히 말했다.
“만약 일이 잘못되면 제가 책임지겠어요.”
일리아의 말이 끝났을 때, 카르한은 침묵했다. 숨은 제대로 쉬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꼼짝 않았다.
일리아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잠자코 기다려주었다. 이제 그의 결정만이 남았다.
가게 안은 온통 조용해서 바깥의 바람 소리만이 숨소리처럼 희미하게 들려왔다. 길고 긴 정적을 깨고 그가 입술을 열었다.
“……영애를 믿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저 스스로를 속이고 싶지 않습니다.”
덤덤하지만 솔직한 말이었다. 카르한은 자신이 내뱉은 말을 곱씹듯 눈을 감았다. 다시 그가 눈을 떴을 때, 깊숙한 다락에 햇빛이 들듯 푸른색 눈동자에 빛이 돌았다.
“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
“잘 생각했어요.”
일리아가 활짝 웃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때마침 홍차가 나왔다. 나이든 남자는 홍차만 내어주고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를 매입하면서 함께 고용했어요. 차를 잘 끓이더라고요.”
귀가 들리지 않으니 어디다 이야기를 발설할 걱정도 없었다. 대신 일리아의 호위 기사가 직접 메뉴를 알려줘야 했지만 말이다.
일리아는 홍차를 한 모금 마신 후에 종이를 꺼냈다.
“계약서예요.”
카르한은 종이를 확인했다. 계약서는 이미 빈틈없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일단 계획부터 말씀해드릴까요?”
“예.”
일리아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우리는 앞으로 연인 행세를 할 거예요.”
카르한은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뭐, 처음에는 소문이 좀 더럽게 나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사그라들 거예요.”
“……어째서 그래야 하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이보다 간단한 방법은 없으니까요.”
일리아는 가방을 뒤져 종이 몇 장을 더 건넸다. 리하트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었다.
“제 약혼자는 저보다 신분이 높아요. 그리고 황실에도 연줄이 있죠. 아무런 보험 없이 무턱대고 파혼했다간 분명 보복하려 들 거예요.”
리하트의 성격으로는 파혼을 해주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일리아는 편리하고 돈이 끊이지 않는 물주였으니까.
하지만 일리아가 끝끝내 파혼하려고 하면, 집안에 압박을 가할 것이다. 권력을 이용해, 없는 죄까지 지어내며 꼬투리 잡을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오라버니인 헤인리가 테르시안 후작 밑에서 일하기 때문에 마음이 쓰였다.
“하지만 그는 자기보다 강한 자에게 약해요. 제 새로운 연인이 에반테온 소공자라면 당연히 눈치를 보겠죠. 그쪽 집안에서도 쉬이 나설 수 없고요.”
“…….”
“저는 당신의 신분을 방패 삼으려는 거예요.”
솔직하다 못해, 당돌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카르한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리고 공작 가문에서는 당신이 약혼하기를 바라고 있잖아요? 그러니 새로운 연인이 필요하겠죠.”
일리아는 선서하듯 우아하게 제 가슴에 손을 얹었다.
“같은 신분이라면 스텔라 델로타보다는 제가 나을 거예요. 그건 자신 있어요.”
카르한의 가족들도 처음에는 반발하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신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적어도 스텔라보다 뒤떨어지는 점은 없을 테니까.
“……평생을 속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물론이죠. 딱 일 년, 그때까지만 연인 행세를 해줘요.”
일리아는 계약서의 빈칸을 손으로 짚었다. 기간은 조율하기 위해서 일부러 적지 않았다.
“그동안 대비책을 세워둘 거예요.”
카르한은 천천히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계약서는 체계적이었고, 세세했다. 일리아에게만 유리하게 적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정해진 기간 동안 가짜 연인으로서 서로에게 충실할 것.
-계약 기간 동안 다른 연인은 만들지 않을 것.
-각자 약혼자와 파혼하기 위해 성심껏 도울 것.
-계약 내용은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을 것.
조항을 읽고 있는데, 일리아가 슬쩍 말했다.
“조율할 수 있으니까 이상한 점이 있으면 읽고 말해줘요.”
“딱히…… 없는 것 같습니다.”
카르한이 계약서를 내려놓는 것과 동시에 일리아는 재빠르게 깃펜을 내밀었다.
“아래에 서명하세요.”
“만약 계약을 파기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건 파기해보면 알겠죠?”
일리아가 웃었다. 상냥한 미소 아래 칼날이 번뜩이는 듯했다. 카르한은 잠시 멈칫했으나, 발을 빼기엔 이미 늦어버렸다.
계약서 하단에 유려한 서명이 새겨졌다. 마지막으로 서명을 마친 일리아가 계약서 두 장 중에서 한 장을 내밀었다.
“갑자기 연인이 되었다고 하면 다들 의심할 테니, 서로 첫눈에 반한 것으로 하죠.”
“알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남들 앞에서는 다정한 연인인 척 연기하는 거예요.”
“……어렵지만 노력해보겠습니다.”
계약서를 집어넣은 일리아는 홍차를 전부 마셨다. 카르한은 그제야 홍차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찻잔을 들었다.
“……!”
한 모금 마신 카르한이 찻잔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맛있죠?”
카르한은 묘한 얼굴로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제게 그런 말을 해준 사람은 처음이라는 듯이. 그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일리아는 뿌듯한 미소를 띤 채 가게를 둘러보았다.
“앞으로 여기가 우리의 거점이에요. 그러려고 매입했으니까.”
“그럼 저도 돈을…….”
“돈은 됐어요.”
칼 같은 거절에 카르한이 멈칫했다. 일리아는 두 손을 깍지 낀 채 테이블에 얹었다.
“당신은 신분을 담당해요. 나는 재력을 맡을 테니.”
두 사람은 황족을 제외하고, 제국에서 가장 신분 높은 남자와 가장 돈이 많은 여자였다. 그야말로 완벽한 만남이었다. 일 년짜리 가짜 연애라는 것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일리아는 카르한을 가볍게 훑었다. 계약까지 끝냈지만, 걱정되는 구석이 많았다. 카르한이 아직 사교계 활동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다른 사람들은 그의 성격을 몰랐다. 이렇게 호구라는 사실을 알면 다들 물고 뜯고 씹고 즐길 것이다.
다들 카르한을 만만히 보게 되면 그의 권력을 방패로 쓰려 했던 자신 또한 타격을 받을 테니…….
‘그냥 이대로 계속 오해 받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래도 도와주기로 했으니까 어쩔 수 없지.’
사람들이 불순한 목적으로 다가오면 자신이 쳐내주면 될 것이다. 그나저나 어떻게 지금까지 진짜 성격을 들키지 않았는지 궁금해졌다. 한 번쯤은 ‘사실 에반테온 소공자는 호구였다!’는 소문이 돌 법도 한데.
“일단,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무서워하지 않도록 만드는 게 우선이겠네요.”
여기까지 오게 된 계기는 따로 있었다. 저번 연회에서 일리아는 그의 고민을 해결해주기로 했다. 사람들이 그를 무서워하지 않게 해주겠다는 것. 그 조건으로 파혼이라는 거래를 내민 것이었다.
일리아는 카르한을 가볍게 훑었다.
“오늘 바쁘세요?”
“괜찮습니다.”
“잘됐네요. 저번부터 생각했는데, 옷장에 검은색 계열 옷만 있죠?”
“……어떻게 아셨습니까?”
진심으로 놀란 듯 카르한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안 봐도 뻔했다.
‘세 번 만났는데 연속으로 검은색 옷이라니, 무슨 상복도 아니고…….’
아무리 얼굴이 잘나도 온통 어두운 빛깔로 무장하면 다가가고 싶다가도 꺼려진다. 일리아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부터 사러 가요.”
두 사람은 가게를 빠져나왔다. 왔던 길을 그대로 걸어가니, 번화가에 도착했다. 일리아는 유명한 의상실이 즐비한 골목으로 먼저 들어섰다. 한때 리하트와 뻔질나게 다녀서 남성 의상실은 전부 꿰고 있었다.
“지금부터 우린 연인이니까, 나란히 걸어요.”
일리아의 뒤를 따르던 그가 옆에 섰다. 골목을 쭉 걸어가던 일리아는 저 멀리서 걸어오는 남녀를 발견했다.
어딘가 익숙한 것 같아서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이 마주친 순간, 남자가 눈을 부릅떴다.
“일리아……?”
원수는 의상실 골목에서 만난다고 하던가. 골목길에서 마주친 남자는 리하트였다.
***
테르시안 후작 가문은 공신 가문 중 하나로서 대대로 황실의 녹봉을 받아왔다. 그것을 바탕으로 입지를 다져, 수도 사교계에서 제법 영향력을 떨치는 가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리하트는 테르시안 후작 가문의 후계자였다.
리하트는 어릴 적부터 후계자 수업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자신이 후작이 될 터였다.
그는 공부보다는 타인과 어울리기를 좋아했으며, 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업고 황궁을 자유로이 드나들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황궁에 입궁한 날. 그날은 리하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리하트는 얼마 전에 발견한 정원으로 향했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 눈치 볼 필요 없이 놀 수 있었다. 그리고 정원에 도착했을 때, 그는 연못가에 쓰러져 있는 소녀를 발견했다.
리하트는 놀라서 소녀에게 달려갔다. 물에 빠졌던 것인지 소녀는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저기요!
재수 없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비싼 물건을 두르고 있으니, 분명 위세 높은 가문 출신일 터였다. 만약 이 소녀가 잘못되면 괜히 누명을 쓸지도 몰랐다.
이대로 도망갈까 고민하는데, 속눈썹이 날갯짓하듯 파르르 떨렸다. 곧이어 굳게 닫혀있던 눈꺼풀이 열리고, 보랏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
소녀가 기침하자 리하트는 안도의 한숨을 삼키며 물었다.
-괜찮습니까, 영애?
소녀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지, 입술만 벙긋거렸다. 리하트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선심 쓰듯 함께 있어 주기로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들이 찾아와서 소녀를 데리고 갔다.
며칠이 지나고, 그 사건이 기억 속에서 흩어질 무렵이었다. 소녀가 황금 마차를 줄줄이 이끌고 저택에 찾아왔다. 그녀는 부자로 유명한 블로든 가문의 막내딸, 일리아 블로든이었던 것이다.
-저를 구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그녀는 착각하고 있었다. 물에 빠진 그녀를 구해준 사람은 리하트가 아니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리하트는 저 스스로도 놀랄 만큼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내뱉고 말았다. 다행히 일리아는 철석같이 믿는 눈치였다.
일리아는 목숨을 구해준 대가로 엄청난 사례금을 주었다. 몇 번 사양하던 리하트는 마지못해 받는 척했다.
사례금으로 매일 사치를 일삼던 리하트는 문득 욕심이 났다. 일리아를 얻으면 지금과 같은 생활을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그 후로 리하트는 일리아에 관한 정보를 열심히 모았다. 블로든 가문의 고용인을 포섭하여 일리아의 일정도 알아냈다. 그리고 우연을 가장하여, 일리아와 만남을 가졌다.
-영애도 이걸 좋아하십니까? 저도 그렇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미리 알아두었기에 감동을 사기 쉬웠다. 배려하고, 친절을 베풀며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돈 때문에 접근했다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 재물에 욕심이 없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날이 갈수록 일리아는 그에게 마음을 열었고, 결국 리하트를 좋아하게 되었다.
리하트는 황제가 된 기분이었다. 일리아 블로든은 최고의 금줄이었다. 게다가 착하고 얌전한 성격이라, 제 말이라면 껌뻑 죽었다.
리하트는 돈 잘 쓰는 연인을 이용해 허영심을 채웠다. 연인에서 약혼자가 되고, 결국 두 사람은 결혼까지 앞두게 되었다.
리하트는 지금 일상이 만족스러웠지만, 단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자신의 연애가 여기서 끝이 난다는 것이었다.
‘아직 젊고 창창한데, 한 사람만 바라보라니.’
그래서 그는 밤놀이를 시작했고, 윤락가에서 만난 여자와 놀아났다. 일리아가 준 돈으로 여자들의 환심을 사는 것은 무척 쉬운 일이었다.
불장난은 점점 커져가, 나중에는 한 귀족 영애와 정기적으로 밀회를 가졌다. 그녀는 무척이나 도도한 여자였다. 시킨 대로 얌전하게 구는 일리아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점점 더 강한 자극을 찾게 된 리하트는 대낮에 그녀를 집으로 불렀다. 그리고 한창 즐기려는데, 일리아가 쳐들어왔다.
일리아는 가만히 서 있었다. 충격 받은 듯이 그저 허공을 바라보았다. 리하트는 당장 눈앞에 닥친 난관을 모면하기 위해 일리아를 비난했다.
-노크 없이 남의 방에 들어오다니. 예의부터 갖추는 건 어때?
명백히 제 잘못이어도, 조금 강하게 나가면 일리아는 먼저 사과해 왔다. 그러니 이번에도 이 정도는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일리아는 바들바들 떨더니 저택을 뛰쳐나갔다. 조금 심했나 생각했지만, 쫓아갈 마음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 후로 일리아에게서 어떠한 연락도 없었다. 리하트는 굳이 일리아를 찾지 않았다. 시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터였다.
어차피 일리아는 저를 좋아했고, 결혼식은 무사히 치러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착각에 불과했다는 걸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한 달 후 연회장에서 만난 일리아는 무척 달라져 있었다. 수채화처럼 흐릿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화려한 색감으로 채운 유화처럼 모두의 이목을 끌었다.
바뀐 것은 분위기뿐만이 아니었다. 저를 대하는 태도마저 완전히 달라졌다. 리하트는 늘 그렇듯이 일리아에게 이런저런 요구를 늘어놓았다.
-자, 다 들었지?
-제가 왜요?
모두의 앞에서 망신당한 리하트의 얼굴이 붉어졌다. 일리아는 단 한 번도 제게 이런 식으로 냉담하게 군 적이 없었다. 아무래도 그 일 때문에 아직까지 화가 난 듯했다.
리하트는 그대로 테라스로 나가버리는 일리아를 내버려두었다. 나중에 화가 풀리면, 이번 일에 대해 따끔하게 경고하는 게 좋을 듯했다.
리하트는 다른 이들에게 열심히 변명을 늘어놓은 후, 일리아를 잊고 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연회가 열린 날로부터 며칠 지난, 오늘.
리하트는 기분 전환이나 할 겸 번화가로 나왔다. 얼마 전에 우연히 알게 된 여자가 저를 알아보고 달라붙기에 내버려두었다.
리하트는 그녀와 함께 남성 의상실이 즐비한 골목을 걸었다. 그때 저 멀리서 익숙한 인영이 걸어오고 있었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긴가민가하던 것은 확신이 되었다.
“일리아……!”
리하트는 당황한 나머지 제게 매미처럼 매달려 있던 여자를 밀어냈다. 일리아가 표정 없이 리하트와 여자를 번갈아보았다.
‘하필이면 지금 만나다니, 재수 없기는.’
리하트는 속으로 혀를 차며 일리아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일단 내 말 좀 들어 봐.”
일리아는 한번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우리 저번에 안 좋게 헤어졌잖아. 네게 선물을 주면서 화해하려고 했어. 하지만 여자들이 뭘 좋아하는지 모르니 도움을 받으려고 했을 뿐이야.”
변명이 튀어나오는 속도가 번개보다 빨랐다.
일리아는 리하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가 미소 지었다. 상냥한 미소에 리하트는 안도했다. 이제 화가 다 풀린 것 같다고 생각하는 그때였다.
“남성 의상실이 널린 골목에서 내 선물을 산다고요?”
“……그건.”
“그렇게 열심히 설명할 필요 없어요. 무슨 말을 해도 변명처럼 들리니까.”
리하트의 살짝 벌어졌던 입술이 그대로 다물렸다.
“몇 년씩이나 연애했는데 연인이 뭘 좋아하는지 모르면, 우리 관계가 그거뿐이라는 거죠.”
말대꾸하는 일리아가 무척 낯설어, 리하트는 제대로 반박하지 못했다. 그는 뒤늦게 일리아의 옆에 서 있던 남자를 발견했다.
“너야말로 웬 놈이랑…….”
하지만 리하트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말을 멈추었다. 순식간에 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에반테온 소공자……?”
무시무시한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는 그는, 전장의 살인귀라 불리는 카르한 에반테온이었다.
리하트는 당황한 나머지 딱 소리 나게 입을 닫아버렸다. 두 사람이 왜 같이 있는 거지? 절대 접점이 없을 그들이었기에, 더욱 당황스러웠다.
“당신한테 말하려고 했는데, 마침 잘됐어요.”
일리아의 말에 리하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일리아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소개할게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뭐?”
리하트는 순간 멍청한 얼굴이 되었다. 방금 일리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일리아가 카르한의 팔을 붙들고 팔짱을 끼자 리하트는 눈을 부릅떴다.
“늦었지만, 진정한 사랑을 찾았지 뭐예요.”
일리아가 수줍게 속삭였다. 곧이어 꼿꼿하게 서 있던 카르한의 몸이 허물어지더니, 두 사람은 순식간에 밀착되었다.
리하트는 카르한의 손이 일리아의 허리에 닿은 것을 보고 숨을 멈추었다. 그제야 일리아가 한 말이 제대로 이해되었다.
“어차피 당신도 내가 지겨웠잖아요. 서로 잘된 일이죠?”
“……네가 지겹다니 무슨 말이야? 그럴 리 없잖아!”
리하트가 소리쳤다. 절대 그럴 리 없었다. 일리아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다니. 제 얼굴만 보면 배시시 웃고, 원하는 걸 말하면 당장 갖다 줄 정도로 좋아하면서.
그러나 언제나 저를 향하던 일리아의 눈은 다른 남자를 보고 있었다.
“정말 운명이란 게 있나 봐요. 이번 연회에서 서로 첫눈에 반해버렸거든요.”
일리아는 카르한을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그렇죠, 카르한?”
그러자 카르한이 어깨를 조금 떨더니, 입을 열었다.
“예, 일리아.”
리하트는 황망한 얼굴로 입술만 떨었다.
벌써 둘이 이름을 부를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고? 그것도 이번 연회에서 처음 만났는데……?
“거짓말하는 거지……?”
분명 거짓말이었다. 그 성격 나쁘기로 유명한 에반테온 소공자와 일리아가 사랑에 빠졌다니.
심지어 좋은 소문은 하나도 없는 남자였다. 손에 피가 마를 날이 없다는 전장의 악귀를 사랑한다고? 리하트는 진정하려 애썼다.
“아뇨, 난 진심이에요.”
일리아의 눈동자는 한 치의 떨림도 없었다.
“아, 그리고 저번 연회에서 못 했던 말이 있는데.”
일리아는 그에게 생긋 웃으며 말했다.
“파혼해요, 리하트.”
일방적인 통보를 내뱉은 일리아가 완전히 발을 돌렸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던 리하트가 소리쳤다.
“네가 나한테 어떻게……!”
리하트는 일리아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어깨를 붙잡기 위해 손을 뻗는 순간, 턱 하고 손목이 붙잡혔다. 꼼짝달싹할 수 없는 엄청난 힘에 리하트가 인상을 썼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리하트는 숨을 멈추고 말았다. 얼어붙을 것 같은 차가운 시선이 그에게 꽂혀 있었다. 순간 리하트의 머릿속에는 카르한을 둘러싼 소문들이 주르륵 떠올랐다.
-원한을 사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당한다던데요?
-3초 이상 쳐다보면 목 닦을 준비 하라는 뜻이래요.
-왜 별명이 전장의 살인귀겠어요? 내키는 대로 다 죽이고 다니니 그렇겠죠.
그 말처럼 사람 하나 베어낼 수 있을 법한 기세였다. 거대한 위압감이 거친 풍랑처럼 리하트를 집어삼킬 듯했다.
리하트는 결국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러자 손목을 잡고 있던 카르한의 손이 거둬졌다. 모든 것을 지켜본 일리아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가 천천히 리하트를 지나쳐갔다.
리하트는 더 이상 일리아를 붙잡지 않았다. 아니, 붙잡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