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 - 1장 (1/28)
  • 목차

    1장

    2장

    3장

    4장

    1장

    “내 평생 이렇게 재물운이 좋은 사람은 처음이에요.”

    카드를 확인한 점술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녀는 한참 심각한 얼굴로 카드를 훑다가 고개를 들었다.

    “단순히 길을 가다가 돈을 줍는 정도의 재물운은 많지요. 하지만!”

    점술사가 탁자를 강하게 내리쳤다. 깜짝 놀란 일리아가 흠칫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건 숨 쉬다가도 돈벼락을 맞을 운수입니다. 세상의 돈이 전부 당신을 따르고 있군요.”

    신통하다더니 정말이었다. 점술사의 말처럼 일리아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돈 문제로 골치를 앓아본 적이 없었다. 아니, 돈이 너무 많아서 고민이었다.

    일리아는 유복한 백작가문에서 태어났다. 원래도 부자로 유명한 가문이었는데, 일리아가 태어난 후로는 돈이 끊이질 않았다.

    손대는 사업마다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름도 몰랐던 먼 친척이 엄청난 유산을 남겼으며, 경품이 걸린 행사는 언제나 1등이었다.

    돈 한 푼 없이 외출한 날에는 길을 걷다가 금화를 주웠고, 들어간 식당에서는 만 번째 손님이라며 돈을 받지 않았다. 점술사의 말처럼 일리아는 재물운 하나는 끝내주는 사람이었다.

    일리아는 점술사 쪽으로 몸을 좀 더 끌어당겨 앉았다.

    “사실 재물운은 저도 알고 있고……, 곧 결혼할 거라서 연애운이 궁금하거든요.”

    “물론 봐드려야지요.”

    새로 카드를 뽑아보라는 말에 일리아는 신중하게 카드 다섯 장을 골랐다. 전부 선택하자, 점술사는 카드를 하나씩 뒤집어나갔다.

    카드를 확인하던 점술사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마지막 카드까지 드러났을 때, 점술사는 참았던 숨을 크게 내뱉었다. 덩달아 긴장한 일리아는 카드를 내려다보았다.

    관에 누워있는 사람, 심장을 관통한 칼, 의자에 앉은 해골……. 잘 모르는 자신이 봐도 심상치 않아 보였다.

    “연애운은…….”

    카드를 전부 확인한 점술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주 씨가 말랐네요.”

    “……네?”

    “한마디로 망했다는 겁니다.”

    안타깝다는 시선에 일리아의 얼굴이 구겨졌다.

    “아니, 어째서요?”

    3년 전에 약혼식을 치른 연인과는 결혼식을 앞두고 있었다. 정략혼도 아니고, 연애하다가 결혼하는 것이었다. 약혼자와 관계도 순탄해서 딱히 흠 잡을 곳이 없었다.

    침음을 삼킨 점술사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아가씨의 연애운은 재물운이랑 바꿔먹은 것 같습니다.”

    악담이나 다름없는 말을 듣게 된 일리아는 점술사의 멱살을 잡고 흔들 뻔했다가 겨우 참았다. 그리고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저 약혼자 있어요.”

    “그래요? 곧 없어질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일리아가 미간을 찌푸리자, 점술사는 카드를 정리하며 말했다.

    “오늘 돈은 받지 않겠습니다. 대신 후에 제 말이 옳다면 그때 지불해주세요.”

    점술사는 그렇게 일리아를 내보냈다.

    가게를 나온 일리아는 무척이나 찝찝해졌다. 앞에 재물운은 기가 막히게 맞히더니, 연애운을 보는 실력은 영 형편없었다.

    “찾아간 보람이 없잖아.”

    수소문해서 일부러 갔건만, 연애운의 씨가 말랐다는 소리나 들으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일리아는 기분 전환을 하러 번화가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점술사가 했던 말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씨가 마르다 못해서 파멸해버린 연애운. 심지어 약혼자는 곧 없어질 거라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괜히 심란했다.

    길을 걷던 일리아는 우뚝 멈춰 섰다.

    “…….”

    자꾸 찝찝하고 거슬려서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았다. 아무래도 지금 당장 약혼자인 리하트를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얼굴을 보고 나면 막연한 불안감도 해소될 것이다. 못 본 지 제법 되었으니, 지나가는 길에 얼굴이라도 잠깐 보려고 찾아왔다는 핑계를 대도 괜찮을 터였다.

    일리아는 연락 없이 곧장 테르시안 후작가로 향했다. 후작 저택에 도착한 일리아는 못 보던 마차 한 대를 발견했다. 낯선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현관으로 걸어가자, 일리아를 발견한 고용인이 화들짝 놀라며 막아 세웠다.

    “정말 죄송하지만 오늘 도련님께서 안 계시는지라…….”

    일리아는 쩔쩔매는 고용인에게 질문했다.

    “손님이 온 것 같은데. 저 마차의 주인은 누구죠?”

    “그건…….”

    당황했는지 고용인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우물쭈물하는 모습에 나쁜 직감이 들었다. 분명 뭔가 있었다.

    “직접 확인해봐야겠어요.”

    일리아는 고용인을 뒤로한 채 저택 안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걸음에 속도가 붙을수록 심장도 빠르게 뛰었다. 마침내 일리아는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문 앞에서 멈춰 섰다.

    “블로든 님……!”

    고용인의 만류보다 일리아가 문을 여는 것이 더 빨랐다.

    문이 열리자, 안쪽에서 누군가가 발칵 화를 냈다.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했, ……일리아?”

    일리아를 본 리하트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윗옷을 입지 않은 채였다. 일리아의 시선이 옆으로 빗겨갔다. 침대 위에는 옷을 입지 않은 채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올린 여자가 있었다.

    바닥을 나뒹구는 속옷까지 확인했을 때, 일리아는 점술사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연애운은 박살났다는 것을.

    ***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제대로 기억나질 않았다. 정신 차리니 침대에 엎드려서 울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전부 오해야.

    아무 사이도 아니다. 누님의 손님인데, 옷에 음료를 흘려서 벗고 있던 것이다. 리하트는 어린아이도 믿지 않을 뻔한 변명을 내뱉었다.

    충격에 휩싸인 일리아가 어떤 대답도 하지 않자, 리하트는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돌변했다.

    -아무리 약혼자라고 하지만,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오다니 불쾌한데.

    -노크 없이 남의 방에 들어오다니. 예의부터 갖추는 건 어때?

    리하트는 사과하기는커녕 일리아를 탓하고 비난했다.

    일리아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숨 죽여 울었다. 그가 내뱉은 말이 화살처럼 제 몸을 찌르고 헤집었다. 심장이 짓이겨진 것처럼 너무 아파서 신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리하트는 일리아의 첫사랑이었다. 하나뿐인 운명이라고 생각했고, 혼자 짝사랑했다. 그러다 갖은 노력 끝에 약혼식까지 치르게 되었다.

    일리아는 그에게 사랑받기 위해서 지금껏 노력했다. 리하트가 착하고 다정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말을 주워듣고 성격까지 바꾸었다. 늘 미소를 달고 다녔으며, 친절하고 상냥한 약혼자가 되려고 애썼다. 심지어 리하트가 말한 이상형에 가까워지려고 취향과 취미까지 바꾸었다.

    리하트는 그런 일리아의 노력을 당연시했다. 못내 서운했지만 표현이 서투른 사람이라 그렇다고 납득했다. 저를 좋아하지 않으면 약혼식까지 치를 리 없을 테니까. 하지만 전부 착각이었던 것이다.

    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소중하게 가꾸었던 사랑이었다. 크기는 달라도 함께 가꾼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는 관심도 없었고 저 혼자만 아등바등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일리아는 매일매일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함께했던 추억이 모두 끄집어내지고, 마지막에는 저를 비난하던 얼굴만이 떠올랐다.

    일주일이 지났을 때는 더 이상 눈물도 나오질 않았다.

    격한 감정이 한 꺼풀 걷히자, 그제야 외면해온 일이 하나씩 떠올랐다. 언제나 연락을 기다리던 것은 자신이었다. 그는 항상 필요할 때만 일리아를 찾았다. 사랑한다는 말조차 늘 구걸하듯 청해야 듣곤 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수많은 감정을 태우고 태워서 남은 것은 증오라는 찌꺼기뿐이었다.

    “뺨이라도 때릴걸.”

    누워 있다가도 그때 생각이 나서 열이 올랐다. 따질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청하게 집으로 돌아온 것이 후회됐다.

    일리아는 애꿎은 베개를 잡아 뜯었다. 이게 리하트의 머리카락이면 얼마나 좋을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현장을 발각한 그때 엎어버리는 건데.

    일리아는 베개를 집어던진 후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 허리까지 굽이치는 환한 금발과 맑은 자색 눈동자가 비쳤다.

    일리아는 찬찬히 살펴 내려갔다. 수척해진 제 모습이 낯설었다. 살도 제법 빠졌고, 핏기가 없어서 아파 보이기까지 했다. 외출은커녕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일리아는 시선을 다시 위로 한 채 제 얼굴을 보았다. 내려간 눈꼬리나 오목조목한 이목구비는 선할 것 같다는 편견을 가지게 했다. 심지어 늘 웃고 다녔기에 일리아를 만만하게 보는 사람도 제법 있었다.

    그러나 예전과 달리 거울에 비친 일리아는 무표정했다. 버릇처럼 웃지 않는 스스로가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이제 됐어.”

    착한 척하느라 지금까지 얼마나 참고 살았던가. 화가 나도 성격을 죽이느라 웃음으로 무마한 적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더 이상 상냥한 약혼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 자식 때문에 손해 본 게 얼마야.”

    마음뿐만 아니라 돈도 엄청나게 퍼주었다. 아마 자신이 준 돈으로 여자랑 놀아나기나 했을 것이다.

    “배려심이 많은 게 아니라 호구였지.”

    일리아는 멍청했던 과거의 자신을 욕하며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한 달 동안 침실에 박혀 있었더니, 계속 잠옷 차림이었다.

    옷걸이에 걸린 드레스를 훑던 일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커다란 방 안을 가득 채운 드레스는 전부 리하트의 취향이었다.

    “……옷부터 새로 맞춰야겠어.”

    적당히 편해 보이는 옷을 고른 일리아는 드레스룸을 빠져나왔다. 침실 문을 열자, 복도에 대기하고 있던 고용인이 화들짝 놀라서 다가왔다.

    “아가씨…….”

    고용인이 울먹였다. 오랫동안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더니 많이 걱정한 모양이었다.

    “걱정시켜서 미안해. 이젠 괜찮아.”

    일리아는 살짝 웃어준 후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부모님은? 오라버니는 황궁에 계신가?”

    “다들 외출하셨어요.”

    “그래?”

    그러고 보니 가족들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한 지 제법 오래되었다. 리하트를 챙기느라 그간 가족들을 등한시한 것이다. 과거를 되새겨보던 일리아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도 지금 외출할 건데, 준비해주겠어?”

    일리아는 고용인의 도움을 받아 간단하게 치장을 끝낸 후 곧바로 현관으로 내려왔다.

    아치형의 현관은 수십 명의 사람이 한꺼번에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웅장했다. 그곳에서 화려한 마차 한 대와 함께 두 남자가 일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호위 기사인 프란체와 말렉이었다.

    “아가씨……!”

    눈이 마주친 순간, 두 사람이 놀란 목소리로 일리아를 불렀다. 그들은 하고 싶은 말이 무척 많아 보였다. 한참 망설인 끝에 말렉이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멀쩡해.”

    “아프신 곳은 없으시죠?”

    프란체의 물음에, 일리아는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우물쭈물하던 프란체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마차 문을 열어주었다.

    “일단 번화가로 가자.”

    일리아는 목적지를 말해준 후 마차에 올라탔다. 드넓은 정원을 가로질러 저택을 빠져나왔다. 창밖을 바라보던 일리아는 상념에 잠겼다.

    자신이 고통 받은 만큼 리하트의 눈에서 눈물을 뽑고 싶었다. 그럼 그 전에 파혼부터 해야 하는데…….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더니, 까맣게 잊고 있던 점술사가 떠올랐다.

    -저 약혼자 있어요.

    -곧 없어질 겁니다.

    생각해보면 점술사는 일리아의 은인이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아무것도 모르고 리하트와 결혼할 뻔했다.

    -오늘 돈은 받지 않겠습니다. 대신 후에 제 말이 옳다면 그때 지불해주세요.

    일리아는 맞은편에 앉아있던 프란체에게 말했다.

    “은행부터 들러야겠어.”

    부드럽게 굴러간 마차는 커다란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대리석으로 지어진 건물은 수도에서 가장 많은 현금을 보유한 은행이었다.

    일리아가 호위 기사를 대동하고 들어서자, 번듯하게 차려입은 중년 사내가 달려왔다. 이 은행의 지점장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일리아 블로든 님. 무슨 용무로 오셨는지요?”

    “내 금고에서 돈을 좀 찾아야겠어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사내가 곧바로 일리아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특별한 손님들만 들어올 수 있다는 응접실이었다. 신경 써서 꾸민 것 같으나, 백작 저택의 남아도는 방보다는 못했다.

    일리아는 푹신한 소파에 앉았다. 다른 직원이 차를 내어오는 사이, 사내가 종이를 내밀었다.

    “인출하실 금액을 써주십시오.”

    일리아는 원하는 액수를 쓰고 하단에 서명했다. 금액을 확인한 사내가 곧바로 직원을 불렀다. 돈을 꺼내오는 동안 일리아는 차를 홀짝였다. 잠시 후 인출한 돈을 전부 마차에 실었다는 보고에 일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도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은행을 나오자, 직원들이 일렬로 서서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다. 부담스러운 친절이었지만, 은행 입장에서 이 정도는 절대 과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하 3층부터 7층까지 전부 블로든 가문의 금고로 이루어져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켜보던 다른 손님들은 놀라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저 사람이 누군데?”

    “그 유명한 블로든 가문이잖아.”

    “뭐, 블로든? 삼대가 말아먹어도 부자일 거라는 그 블로든?”

    손님들의 눈빛이 경탄으로 바뀌었다. 수많은 이들의 시선을 받으며 일리아는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는 곧바로 점술사가 운영하는 가게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게 앞에 도착했다. 일리아는 기사들에게 자루를 들고 오라고 명령한 뒤에 문을 열었다.

    어둑한 내부에 햇빛이 밀물처럼 흘러들어갔다. 문이 닫히자 다시 어둠이 내려앉았다. 적막한 공간에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일리아는 안쪽으로 걸어가 자줏빛 커튼을 걷어냈다. 테이블 앞에 앉아있던 점술사가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지금은 영업을 하지 않는……. 아가씨?”

    얼굴을 확인한 점술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일리아는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때 당신 말이 맞았어요.”

    일리아가 고개를 까딱였다. 거대한 자루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프란체와 말렉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이 자루를 거꾸로 들고 흔들었다. 자루에 담겨있던 금화들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금빛 물결 속에서 점술사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맙소사’를 연발했다. 점술사가 금화에 반쯤 파묻혔을 때, 일리아가 입을 열었다.

    “내 연애운 좀 다시 봐줘요.”

    금화에 파묻힌 점술사는 입만 떡 벌린 채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부족한가요?”

    일리아의 물음에 점술사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흔들었다.

    “충분합니다! 아니, 오히려 너무 많아서…….”

    “많다뇨. 이 정도는 지불해야죠. 덕분에 인생을 구제받았거든요.”

    점술사를 만나지 못했다면 리하트에게 들어갈 돈이었으니, 전혀 아깝지 않았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점술사는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일리아의 미래는 훤히 들여다보았지만, 자신이 부자가 될 미래는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연애운은 지금 바로 봐드리겠습니다.”

    점술사는 헤엄치듯 금화 속에서 빠져나왔다. 금화를 한쪽으로 쓸어둔 후, 일리아가 점술사의 맞은편에 앉았다.

    수십 장의 카드가 부채처럼 둥글게 펼쳐졌다. 일리아는 신중하게 카드를 선택했다. 전부 고르자, 점술사가 카드를 하나씩 뒤집었다. 찬찬히 카드를 확인한 점술사가 난감해했다.

    “……한 달 만에 운명이 크게 바뀌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일리아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망했다는 말이네.’

    사실 당장 연애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저 자신의 연애가 리하트라는 쓰레기로 끝나는 것이 싫어서, 시험 삼아 보았을 뿐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결혼은 단념하는 것이 좋을 듯했다.

    “하지만…….”

    점술사는 마지막 카드를 보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운명의 상대가 있긴 합니다.”

    “그래요?”

    점술사는 카드 두 장을 더 뽑더니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그녀가 구체적인 점괘를 내놓았다.

    “상대는 박복한 운명인데, 아가씨를 만나서 꽃을 피우는군요.”

    “그 자식은 바람피운대요?”

    “……거기까지는 알아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귀인 중의 귀인이네요.”

    권력의 정점에 설지도 모른다며 점술사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카드 한 장을 앞으로 밀며 말했다.

    “오늘 서쪽으로 가보세요. 좋은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가게를 빠져나온 일리아는 곧장 서쪽 번화가로 향했다. 원래 외출 목적이었던 의상실에 들를 생각이었다.

    블로든 가문 정도면 손만 까딱여도 유명한 디자이너들을 집으로 소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리아는 직접 보고 구입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었고, 오랜만에 바람도 쐬고 싶었다.

    번화가에 도착한 일리아는 산책 삼아 천천히 걸었다. 한가로운 오후라 그런지 거리는 한산했다.

    정처 없이 걷다가 고급 의상실이 즐비한 골목으로 들어섰다. 척 봐도 비싸 보이는 건물들이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유리창을 통해 옷을 구경하던 중 잊고 싶은 기억을 떠올렸다.

    일리아는 종종 리하트나 그의 가족들과 쇼핑을 다니고는 했었다. 한나절 넘게 끌고 다니는 것으로 모자라 계산은 늘 일리아의 몫이었다. 그때는 리하트에게 뭔가 해줄 수 있다는 것이 마냥 기쁘기만 했다.

    잠시 후회하던 일리아는 평소에 눈여겨보던 의상실로 들어섰다. 자신의 취향이지만, 리하트의 취향과 정반대라서 항상 아쉬워하며 지나치던 곳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일리아를 알아본 점원들이 활기차게 인사를 건넸다. 일리아는 이 골목에서 유명 인사였는데, 한번 왔다 하면 최소 일주일 매출을 올려주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내부를 둘러본 일리아는 속으로 감탄했다. 생각보다 더 취향이었다.

    ‘진작 와 볼 걸 그랬네.’

    일리아는 가만히 서서 눈으로 옷을 훑었다. 직원은 일리아가 옷을 고르기를 기다렸다.

    “이거랑 저거, 그리고 저것까지…….”

    점원은 재빠르게 일리아가 고른 옷 세 벌을 집어냈다.

    “빼고 전부 주세요.”

    점원이 잠시 멈칫하더니, 들고 있던 옷들을 내려놓았다. 이윽고 다른 점원까지 뛰쳐나와 드레스를 포장하기 시작했다. 좀 많이 샀나 싶었지만, 가지고 있던 드레스를 전부 버릴 거니 이 정도는 필요했다.

    사실 일리아는 기성복보다는 맞춤 제작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오래 걸리는 데다가, 한 달 동안 살이 많이 빠져버렸다. 나중에 체형이 돌아오면 맞추는 쪽이 좋을 듯했다.

    드레스를 훑던 일리아는 가장 마음에 드는 옷 한 벌을 골라서 갈아입었다.

    “어때?”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지켜보던 프란체와 말렉이 박수를 보냈다. 무엇을 입어도 최고라고 하는 두 사람이었기에 일리아는 픽 웃고 말았다.

    -넌 이런 게 더 잘 어울려.

    그러다가 문득 취향을 강요하던 리하트가 떠올랐다. 일리아의 입가에 미소가 싹 사라졌다.

    그놈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나온 건데, 자꾸만 머릿속을 떠돌았다. 일리아가 우뚝 서 있으니, 점원이 물었다.

    “입고 오신 옷은 포장을…….”

    “태워주세요.”

    단호한 말에 점원이 눈만 깜빡였다. 놀란 점원을 뒤로하고, 일리아는 미련 없이 의상실에서 나왔다.

    그 후 골목에 있는 가게들을 하나씩 공략해 나갔다. 가방, 양산, 구두, 장신구……. 일리아가 가는 곳마다 상인들은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오랜만에 이렇게 싹쓸이하듯 쇼핑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오로지 제 취향에 맞춰서 하는 쇼핑이라 더 만족스러웠다.

    한창 쇼핑을 하던 일리아는 차와 음료를 파는 가게로 향했다. 고급스러움과 거리가 멀었지만, 맛도 좋고 분위기도 괜찮아서 일리아가 좋아하는 곳이었다.

    이전에 리하트를 데리고 갔다가 왜 이런 후진 곳에 데려왔느냐며 짜증 내는 바람에 발길을 끊은 곳이기도 했다.

    일리아는 프란체와 말렉에게 음료를 한 잔씩 쥐여주었다. 엄청난 선물이라도 사준 것처럼 두 사람이 감동했다. 일리아는 마시기 아깝다는 듯 잔을 쥐고만 있는 프란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푸른색 머리카락을 가진 프란체는 일리아보다 어렸다. 빈민가 출신이었지만, 곱상한 외모와 반듯한 자세를 보고 있으면 좋은 집안의 귀족 자제 같았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진짜 귀족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일리아는 시선을 돌려 음료를 마시고 있는 말렉을 보았다. 감색 머리카락과 건장한 체격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말렉은 일리아보다 열 살 많았는데, 오래전부터 호위 기사로 일해 왔다. 가문이 블로든 가에 은혜를 입고, 호위 기사가 되기를 자청했다고 전해 들었다.

    프란체와 말렉은 성향이 정반대였다. 프란체는 다혈질이었고, 말렉은 차분하고 이성적이었다. 그래서 말렉이 흥분한 프란체를 눌러주곤 했다. 두 사람을 살피던 일리아가 물었다.

    “힘들지?”

    “아닙니다. 저희는 무척 즐겁습니다.”

    그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로지 본인을 위해 아낌없이 돈을 쓰는 일리아를 보고 있으면 그저 흐뭇했다.

    “오르골을 하나 살까 싶어. 그것만 사고 집으로 돌아가자.”

    세 사람은 마지막 목적지인 오르골을 파는 가게로 향했다. 가게 내부는 그리 크지 않았기에, 한꺼번에 들어가면 비좁을 것 같았다.

    “여기서 기다려줘.”

    머뭇거리던 프란체와 말렉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면 유리창을 통해 안쪽이 훤히 보였기에 위험할 일은 없을 듯했다.

    일리아는 홀로 가게에 들어갔다. 그러자 점원이 곧바로 달라붙어서 이것저것 추천하기 시작했다. 느긋하게 구경하고 싶었던 일리아는 가볍게 거절했다.

    “도움이 필요하면 부를게요.”

    점원이 아쉬운 얼굴로 물러났다. 일리아는 찬찬히 진열대를 살폈다. 예쁜 오르골을 보고 있으니, 문득 가족들이 떠올랐다.

    예전에는 가족들에게 선물을 자주 주었는데, 언젠가부터 하지 않게 되었다. 리하트를 만난 후로 그에게 선물을 갖다 바치기 바빠서 가족들은 신경도 쓰지 못한 것이다.

    일리아는 조용히 반성했다. 이번 일뿐만 아니라, 리하트와 사귀는 문제로 가족들의 속을 많이 썩였다. 오늘 집에 돌아가면 오르골을 선물하며 지난 일을 사과하고 싶었다.

    일리아는 신중하게 오르골을 살폈다. 그러던 중 시야 끄트머리에 커다란 무언가가 어른거렸다.

    “……?”

    일리아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가게 바깥에 웬 사내가 서 있었다.

    어둠이 흐르는 듯한 새까만 머리카락과 짙푸른 눈동자. 반듯하게 벌어진 넓은 어깨와 누구라도 우러러볼 수밖에 없을 듯한 장신. 분명 감탄이 나올 정도의 미남이었지만, 인상이 사나워 오래 쳐다보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사내는 차마 가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모양새였다. 아기자기한 오르골 가게라 부끄러워서 망설이는 걸지도 몰랐다.

    그런 사내가 수상했는지 프란체와 말렉이 그쪽을 노려보았다. 일리아는 가볍게 눈짓하여 기사들을 만류했다. 저와 연관되면 지나치게 날을 세우니……. 너무 성실한 것도 문제였다.

    사내는 한참 만에야 안으로 들어왔다. 밖에 있을 때도 존재감이 대단했는데, 좁은 가게 안에 들어오니 시선이 온통 그쪽으로 갔다.

    “어서 오세요.”

    점원의 인사에 머뭇거리던 사내가 진열장으로 향했다. 원체 차가운 분위기라, 점원은 일리아가 들어왔을 때처럼 그에게 바로 들러붙지는 못했다. 새로운 손님을 탐색하던 점원이 슬그머니 물었다.

    “……혹시 찾으시는 물건 있으세요?”

    사내가 점원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점원이 움찔했다. 이윽고 그가 고개를 내젓자, 점원의 눈빛이 돌변했다.

    “그럼 제가 추천해드릴게요.”

    점원이 재빠르게 상품을 보여주었다. 물건을 고르던 일리아는 두 사람을 힐끗댔다. 신경 쓰고 싶지 않았는데, 가게가 좁다 보니 자꾸 눈에 들어왔다.

    “이게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상품이에요.”

    일리아는 점원이 추천하는 물건을 슬쩍 살폈다. 아까 슥 보고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내려놓은 것이었다.

    “재료는 전부 최고급이고, 여기 보시면 태엽이…….”

    점원의 말을 엿듣던 일리아는 미간을 좁혔다. 아무리 판매가 목적이라지만, 상품 가치를 과하게 부풀리는 느낌이었다. 꼭 사야 한다며 계속 부추기는 꼴은 강매나 다름없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사내는 점원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가격도 150크로엘밖에 안 하죠.”

    가격을 들은 일리아가 멈칫했다.

    150크로엘? 아까 가격표를 봤을 때는 60크로엘이었는데?

    점원은 사기를 치고 있었다. 하지만 호구가 아닌 이상, 저 가격을 주고 살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저 남자도 절대 구입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던 때였다.

    “……이걸로 주십시오.”

    사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는 호구였던 것이다.

    “150크로엘이면 정말 저렴한 거예요.”

    점원이 호구 하나 물었다는 얼굴로 활짝 웃었다.

    어디서 약을 팔아. 어이가 없어진 일리아는 대놓고 그쪽을 보았다.

    “이것도 어제 입고된 건데, 어떠세요? 선물 받는 분들은 다 좋아하실 거예요.”

    점원은 적극적으로 추천하며 물건을 눈앞에 들이밀었다.

    사내는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그러나 일리아의 눈에는 난감해하는 것이 보였다. 그가 거절하지 못하고 입술만 열었다가 닫았다.

    “이건 마침 하나밖에 안 남았는데, 손님은 운 좋으시네요.”

    점원이 바구니에 물건을 슬쩍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 뒤로도 온갖 물건들을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집어넣었다. 점원이 강매하는 꼴을 전부 지켜본 일리아가 나섰다.

    “운이 좋은 게 아니라 사기 당하는 거겠죠.”

    “……네?”

    일리아가 당황해하는 점원 앞으로 다가갔다.

    “아까 가격표 봤을 땐 60크로엘이었는데, 그사이에 올랐나 봐요?”

    점원이 뜨끔했는지 눈을 크게 떴다. 일리아는 오르골을 집어 들었다. 하단에 붙어 있던 가격표가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래도 가격표를 슬쩍 떼어내고 숨긴 모양이었다. 사장 몰래 제 주머니를 채울 심산이 그득해 보이는 짓이었다.

    일리아는 고개를 돌려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나워 보이는 사내의 표정 아래에 당혹스러움이 묻어있었다.

    지나친 참견인 줄 알면서도, 일리아는 호구 같았던 과거의 자신이 떠올라서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다면 차라리 제가 추천해줄게요.”

    일리아는 점원이 가득 채운 바구니를 밀어냈다. 표정이 굳어진 점원은 일리아를 위아래로 훑더니 나긋하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가격은 사장님이 정하셔요. 그리고 이 정도 품질에 150크로엘이면 절대 비싼 게 아니에요.”

    귀족 아가씨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름대로 공손하게 말하고 있지만, 내포하는 의미는 ‘네가 뭘 아느냐’였다.

    일리아는 점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점원이 움찔했다.

    “사장님이 가격을 정한다고요?”

    “네. 저는 그저 정해진 대로 판매할 뿐이에요.”

    사장이 가게에 없으니 저렇게 뻔뻔한 거짓말을 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손님께서는 많이 부담스러우신 모양인데, 좀 저렴한 걸로 추천해드릴까요?”

    점원이 방긋 웃으며 물었다. 고작 150크로엘도 못 내냐며 비꼬는 것이었다.

    일리아는 헛웃음을 삼켰다. 돈으로 도발을 걸어오는 사람은 참 오랜만이었다.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프란체가 황급히 가게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프란체.”

    일리아는 그에게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작게 속삭여 명령을 내리자, 프란체는 재빠르게 가게를 나섰다.

    지켜보던 점원이 지금 뭐 하느냐는 시선을 보내왔다. 일리아는 점원을 무시한 채 잠시 시간을 때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프란체와 함께 한 남자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블로든 님!”

    어찌나 급히 뛰어왔는지 얼굴이 벌겠다. 그러나 그는 숨도 돌리지 않고, 일리아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여기 매입 증명서입니다. 다른 필요한 서류는 저택으로 보내겠습니다. 제 서명은 마쳤으니, 블로든 님만 서명하시면 됩니다.”

    일리아가 손바닥을 내보이자, 프란체가 휴대용 잉크펜과 종이를 덧댈 수 있는 나무판을 건네주었다.

    일리아는 나무판에 종이를 대고 서명을 끝냈다. 그리고 품에서 백지 수표를 꺼내 남자에게 내밀었다.

    “시세보다 두 배를 주시다니, 배포가 대단하십니다.”

    남자는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그 광경을 고스란히 지켜보던 점원이 당황한 얼굴로 남자를 불렀다.

    “사, 사장님?”

    “어허, 지금부터 나는 사장이 아니니 그렇게 부르지 마라.”

    “……예?”

    “사장님은 이쪽이니까.”

    남자가 일리아를 가리켰다. 점원이 고개를 돌려 일리아를 바라보았다. 일리아는 프란체에게 나무판과 잉크펜을 건네며 점원에게 말했다.

    “이제 내가 사장이니까, 가격은 내 마음대로 정할 수 있겠죠?”

    마치 과자 하나를 산 것처럼 덤덤한 말투였다.

    점원의 입술이 점점 벌어지더니, 금방이라도 턱이 빠질 것 같았다. 일리아는 아까 150크로엘을 불렀던 물건을 손에 쥐었다.

    “나는 60크로엘로 하고 싶은데, 불만 있나요?”

    “그…….”

    점원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상황을 따라잡지 못한 듯했다.

    “왜 말이 없어요?”

    “아, 아닙니다.”

    정말로 일리아가 가게 주인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점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일리아는 점원에게 손짓했다.

    “뭐 해요? 일 안 하고. 가격표부터 새로 작성하세요.”

    멍하니 서 있던 점원이 그제야 움직였다.

    “먼지가 많으니 청소도 좀 하고요.”

    일리아는 허둥대는 점원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차피 오늘 치 일급은 줘야 할 테니, 잡일은 다 시켜둔 뒤에 해고할까.’

    일리아는 제 가게를 가볍게 둘러보았다. 어떤 사람은 생각 없이 헛돈을 쓴다며 나무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건 일리아를 몰라서 하는 말이었다.

    일리아가 손을 댄 것은 결국 돈이 되었다. 한 컵을 퍼내면 양동이째 다시 채워졌다. 오늘 쓴 돈도 몇 배로 채워질 터였다. 오르골 가게가 갑자기 대박이 나거나, 막말로 여기서 금맥이 터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가게를 살피던 일리아가 멈칫했다.

    ‘아참. 그 남자.’

    분명 호구 잡힌 사내를 도와주려고 나섰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고개를 돌린 일리아가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그가 한 걸음 물러나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마치 위해를 가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몸짓 같았다. 아무래도 평소에 외모 때문에 오해를 많이 사는 모양이었다.

    어찌 되었든 이제 손님과 손님이 아니라, 사장과 손님 사이가 되어버렸다.

    “음……. 어서 오세요……?”

    일리아의 인사에 사내가 미간을 찌푸렸다. 위협적인 표정이라고 판단했는지 프란체가 나서려 했다.

    “프란체, 나가 있어.”

    “……예.”

    하지만 일리아의 말에 프란체는 바로 꼬리를 말고 터덜터덜 가게를 나갔다. 전면 유리창을 통해, 가게 밖에서 프란체와 말렉이 사내를 노려보는 것이 보였다.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둔 일리아는 사내를 유심히 살폈다. 미간을 찌푸렸지만, 무섭진 않았다. 위협적이지도 않았고, 불쾌한 느낌도 없었다. 아무래도 당황하면 인상을 쓰는 버릇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까 끼어들어서 미안했어요. 정신없었죠?”

    “……아닙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매정해 보이는 얼굴과 달리, 정중한 말투였다. 일리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조언했다.

    “저런 사람은 한번 받아주면 계속 밀어붙이니까, 딱 잘라 거절하는 게 좋아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던 사내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거절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의 어깨가 축 처졌다. 마치 시무룩한 흑곰 같았다.

    얼굴만 봐서는 칼같이 거절 잘하게 생겼는데…….

    거기까지 생각한 일리아는 빠르게 반성했다.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것은 나쁜 버릇이었다. 자신만 봐도 다들 착하고 만만할 거라고 착각했다.

    “오르골 사러 오셨으면 제가 추천해드릴까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무척 예의 바른 태도에 일리아는 속으로 웃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흔치 않은 남자였다.

    일리아는 음악 취향을 물어본 후에 이것저것 추천해주었다. 그때마다 그는 대단한 사람을 보는 듯한 눈빛을 보내왔다.

    “선물하는 거죠?”

    일리아가 반쯤 확신을 담아서 묻자, 사내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것도 괜찮아요. 호불호가 덜한 편이거든요.”

    사내는 일리아가 소개해준 오르골을 찬찬히 살폈다. 신중하게 고르던 그가 작은 오르골 하나를 집어 들었다.

    태엽을 돌리니, 맑고 통통 튀는 음악이 들려왔다. 딱딱하기만 하던 사내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던 일리아는 생각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줄 건가 보네.’

    그리고 일리아는 자연스럽게 리하트를 떠올렸다. 저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일리아의 얼굴을 본 사내가 움찔하더니, 조용히 말했다.

    “제가 시간을 많이 뺏은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오해한 모양이라, 일리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사내는 눈치 보더니 사려고 했던 물건을 계산대에 올렸다.

    일리아는 사장의 권한으로 원래 금액보다 좀 더 저렴하게 가격을 깎아주었다. 그런 후에 가족들에게 선물하려고 봐두었던 오르골을 집어 들었다.

    계속 가게에 있을 수는 없으니 이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가게는 이전 사장에게 며칠간 맡기고, 조만간 따로 점원을 고용할 계획이었다. 일리아가 가게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사내가 불러 세웠다.

    “저기.”

    “네?”

    “적은 금액이지만…….”

    일리아는 제게 내밀어진 금화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뭐지……?

    금화를 확인한 일리아가 고개를 들어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이게 뭐예요?”

    “사례금입니다.”

    뜻밖의 말에 일리아가 미간을 좁혔다. 웬 사례금?

    설명하라는 시선에 사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물건을 추천해주시기도 했고…….”

    “사장이 손님한테 물건 추천하는 건 당연한 일이죠.”

    아까 직접 나선 이유는 그저 호의를 베풀기 위함이었다. 보답을 바라고 한 행동이 아니었다.

    ‘물건 값도 깎아줬더니, 왜 이래?’

    선의가 빛바랜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나한테 돈으로 사례하려고 한 사람, 당신이 처음이에요.”

    일리아의 말에 그가 움찔했다.

    “사양할게요.”

    “그럼 다른 거라도…….”

    사내가 물러서지 않자, 일리아는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거든요. 그리고.”

    가게 문을 열며 일리아가 말했다.

    “돈은 필요 없어요.”

    문이 열리자, 가게 앞에 세워진 마차가 보였다. 마차를 확인한 사내의 눈동자가 커졌다.

    질 좋은 가죽과 보석으로 치장된 마차는 황족이나 탈 법했다. 마차를 이끄는 네 마리의 말은 한눈에 봐도 명마였다. 깃발에는 코흘리개 꼬맹이도 안다는 블로든 가문의 인장이 떡하니 박혀 있었다.

    일리아가 마차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디며 그에게 속삭였다.

    “나는 블로든이거든요.”

    얼빠진 남자를 뒤로한 채 일리아는 가게를 완전히 벗어났다.

    “집으로 돌아가자.”

    일리아의 말에 프란체와 말렉이 빠르게 달라붙었다. 그들은 꼼짝하지 않는 사내를 노려본 후에 마차 문을 열어주었다.

    마차에 올라타자, 창문 너머로 사내가 보였다. 일리아는 멍하니 마차를 바라보는 사내에게서 시선을 떼고, 커튼을 쳐버렸다. 어차피 다시 볼 사람도 아니니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자 순식간에 피로가 몰려왔다. 생각해보니 하루 종일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돌아다녔다.

    은행도 들르고 쇼핑도 하고……. 오늘 있었던 일을 하나씩 떠올리던 중, 문득 점술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오늘 서쪽으로 가보세요. 좋은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좋은 일이 있었던가?”

    생각해보니 가게를 하나 사긴 했다.

    ‘아무래도 그 가게가 나중에 잘될 건가 보다.’

    일리아는 대충 생각하고 넘겨버렸다.

    마차는 번화가를 가로질러 수도 남쪽에 위치한 블로든 백작가로 향했다. 부지가 워낙 커서, 거대한 대문을 통과하고 나서도 한참을 달렸다.

    창밖으로 돈과 정성을 다해 꾸민 정원이 스쳐지나갔다. 길 양옆으로는 높이를 맞춘 관목들이 늘어서 있었다.

    실타래처럼 이어진 관목이 끊기자, 분수대가 놓인 원형의 공터가 보였다. 아기천사 셋이 둥근 그릇을 받쳐 들고 있었고, 그곳에서 끊임없이 물이 차올랐다.

    비산하는 물방울이 노을빛을 받아 붉게 빛났다. 리하트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도 꼭 저렇게 선명한 적색이었다. 특히 햇빛을 받으면 불에 타오르는 것처럼 강렬했다.

    ‘그만 생각하자.’

    쓸데없는 생각에 일리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오랫동안 사귄 연인이었던 만큼, 리하트는 일리아에게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다른 생각을 하려고 애써도 끝끝내 비집고 들어왔다. 리하트를 완전히 잊으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릴 모양이었다.

    마차는 어느새 현관 앞에 도착했다. 프란체가 마차 문을 열고, 일리아는 말렉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린 일리아는 현관에 서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짙은 금발과 은테 안경 속에 가려진 연녹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

    “오라버니……?”

    그는 일리아의 오라버니인 헤인리 블로든이었다.

    ***

    헤인리 블로든.

    그는 블로든 가문의 장남으로, 아카데미에서 늘 수석을 차지하는 수재였다. 아카데미를 조기 졸업한 후에는 공직에 올라, 황궁에서 일하고 있었다.

    상냥한 얼굴과 달리 매서운 독설을 날리기로 유명한 그였지만, 오직 여동생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오라버니였다.

    어릴 적, 헤인리는 바쁘신 부모님을 대신해 어린 동생을 업어 키웠다. 나이 차이도 제법 나는 탓에 무척이나 귀여워했다. 어찌나 아꼈는지, 동생이 걱정된 나머지 아카데미 입학도 늦출 정도였다.

    그런데 헤인리의 여동생인 일리아에게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어디서도 듣도 보도 못할 특별한 운이 따른다는 것이었다.

    일리아가 태어난 후로 부모님은 하는 사업마다 성공을 거뒀고, 예상하지 못한 거대한 유산까지 굴러 들어왔다.

    일리아가 산책을 나가서 주워온 돌멩이가 엄청나게 비싼 보석이었다거나, 복권을 샀는데 1등 당첨이 되었다는 것은 무척 소소한 이야기였다. 수많은 일화 중 가장 전설적이라 할 만한 것은 역시 금맥이었다.

    오래 전 여름 별장을 짓기 위해 가족들이 모두 땅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여기는 어떠니?

    -구경할래요.

    어머니의 물음에 일리아는 혼자 타박타박 걸어갔다. 한참 걷던 일리아는 다리가 아프다며 뒤돌아섰다.

    일리아의 운을 철석같이 믿고 있던 부모님은 일리아가 걸은 곳까지만 땅을 사들였다. 그리고 별장을 지으려고 터를 다지다가 금맥이 터졌다. 매장된 금이 얼마나 많은지, 지금도 캐는 중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옆 땅 주인도 열심히 파고 뒤집었지만, 아무것도 건질 수 없었다. 정확하게 블로든 백작가가 산 땅에만 금맥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블로든 백작가는 제국 제일의 부자가 되었다.

    하지만 신은 일리아에게 재물운을 준 대신에, 남자를 보는 눈은 주지 않았다. 리하트 테르시안을 사랑하게 된 것이었다.

    리하트는 헤인리의 직속 상사인 테르시안 후작의 아들이었다. 일리아가 연인이라며 리하트를 소개하자마자, 헤인리는 결사반대했다. 집안만 믿고 노력도 하지 않을뿐더러, 방탕하게 논다고 소문이 난 놈이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테르시안 후작만 보아도 거들먹거리기 좋아하는 전형적인 귀족이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놈은 안 돼.

    헤인리는 일리아에게 헤어지라고 열심히 설득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였을까. 일리아는 마치 비련의 연인처럼 리하트에게 더욱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약혼까지 하겠다고 했을 때, 헤인리는 처음으로 화를 냈다.

    -제정신이 아니구나.

    상처받은 일리아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했다. 너무 심하게 말했나 싶었지만, 그때는 약혼을 막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러나 일리아의 고집은 대단했다. 가족들 중 누구도 일리아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결국 일리아는 가족들의 반대에도 리하트와 약혼식을 치르고 말았다.

    헤인리는 답답하고 야속한 마음에 이전처럼 일리아를 대할 수 없었다. 싸늘한 태도와 차가운 말이 자꾸 튀어나왔다.

    일리아는 그런 그를 멀리했고, 둘 사이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하지만 헤인리는 그 이후로도 일리아의 소식을 꾸준히 전해 들었다. 대부분 화병이 날 것 같은 소식이었으나, 화를 냈다간 사이가 더 틀어질까 싶어서 인내했다.

    그리고 이번에 리하트와 크게 싸운 모양인지, 일리아가 울면서 저택으로 돌아왔다. 무려 한 달 가까이 침실에 틀어박혀서 나오질 않았다.

    사람을 시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았지만, 자세히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리하트와 연관된 일이라는 추측만 할 수 있었다.

    사이가 틀어졌다 해도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일리아 생각에 온통 사로잡혀,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걱정 가득한 한 달을 보내다 오늘. 일리아가 외출해서 쇼핑을 즐겼다는 소식을 듣고 화가 치밀었다.

    또 리하트 그 자식에게 잘 보이려고 선물을 산 건가? 가족들이 걱정하고 있는 줄도 모르나? 도대체 언제쯤 정신을 차릴 생각인지. 이번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헤인리는 일리아를 따끔하게 혼내야겠다고 결심했다.

    ***

    일리아는 고개를 들어 현관 앞에 서 있는 오라버니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헤인리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갑작스럽게 쇼핑이라니. 이번에는 또 무슨 생각이지, 일리아.”

    뜻밖의 상황에 일리아는 당황했다. 과거에는 한없이 다정한 오라버니였지만, 사이가 틀어진 후로 냉랭해졌다. 특히 오늘은 더 심한 것 같았다.

    일리아가 대답하지 않자,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마차를 확인했다. 마차 뒤에 가득 실린 선물 상자를 확인했는지 헤인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또 그놈 주려고 산 건가?”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뻔했다. 일리아는 뒤늦게 고개를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쓸 물건이에요.”

    “……전부?”

    “네.”

    일리아의 대답에 헤인리는 다시 마차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헤인리의 좁혀진 미간이 풀어지고, 팽팽하던 기류도 흐트러졌다. 일리아는 그제야 좀 더 자세히 그를 볼 수 있었다.

    헤인리는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햇빛을 녹인 듯한 금발은 블로든 가문의 상징이었고, 눈동자 색만 일리아와 달리 연녹색이었다. 그 또한 어머니를 많이 닮아 선한 느낌이 들었는데, 인상을 바꾸기 위해서 주로 은테 안경을 썼다.

    두 사람 사이가 틀어진 것은 일리아가 리하트와 약혼식을 치르고 나서부터였다.

    헤인리는 리하트를 무척 싫어했다. 연애할 때도 사사건건 훼방을 놓더니 약혼까지 반대했다. 결국 대판 싸우고 마지못해서 화해했지만, 그 뒤로 줄곧 서먹하게 지냈다.

    그때는 헤인리가 저를 이해해주지 않아 서럽기만 했다. 그리고 지금 와서야 그의 진짜 마음을 알게 되었다. 헤인리는 일리아를 걱정하고 염려한 것이었다.

    두 눈을 가리고 귀를 막은 것은 자신이었다. 그저 제 사랑이 전부여서, 가족들이 옳은 말을 하는데도 외면하기만 했다.

    “오라버니.”

    헤인리의 시선이 제 얼굴에 닿았다. 일리아는 천천히 눈을 내리깔고 최대한 미안한 감정을 담아서 말했다.

    “제가 잘못했어요.”

    그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뜻밖의 말을 들은 사람처럼 놀란 얼굴이었다.

    “오늘 말도 없이 외출해서 죄송해요.”

    일리아는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철없이 굴고, 걱정 끼친 것도 죄송해요. 사과드리고 싶어요.”

    이전에 했어야 할 사과를 이제야 겨우 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헤인리는 한참 만에야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질문했다.

    “……어디 아픈 거냐?”

    “저는 멀쩡해요.”

    돌아온 대답에 헤인리는 미간을 좁혔다.

    “……일단 들어가자.”

    헤인리가 먼저 등을 돌려,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를 걷는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그의 걸음이 빨랐기에 따라가는 것도 버거웠다.

    종종걸음으로 쫓아가자, 헤인리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그제야 그와 발을 맞추어 걸을 수 있었다.

    마침내 헤인리는 복도 끝에 위치한 응접실로 들어섰다. 저택의 화려한 방들과 달리, 아늑하고 실용적인 공간이었다.

    헤인리가 먼저 자리에 앉고 맞은편에 일리아가 앉았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 앉은 그가 일리아를 똑바로 응시했다. 살짝 긴장해서 두 손을 모으는데, 헤인리가 훅 치고 들어왔다.

    “그래서 한 달 전에 무슨 일이 있었지?”

    질문과 동시에 일리아는 한 달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낯선 여자와 침대에 누워있던 약혼자.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다가 끝내 저를 몰아세우던 모습. 살면서 가장 끔찍한 기억이었고, 아직도 고통스러웠다. 일리아는 한참 만에 입술을 열었다.

    “……나쁜 일이 있었어요.”

    헤인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그것을 보지 못한 일리아는 생각에 잠겼다.

    마음 같아서는 솔직하게 전부 털어놓고 싶었다. 리하트가 바람을 피워서 파혼하고 싶다고. 그러나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당장 파혼하기엔 많은 문제가 걸려 있었다.

    아무리 블로든 가의 재력이 대단하다 한들, 이슈타르 제국은 신분제 사회였다. 후작가와 백작가의 신분 차이는 엄연히 존재했다.

    그리고 테르시안 후작의 조카가 황태자비였다. 황실 연줄을 이용하여 세금 탈루 등, 누명을 씌울 가능성도 다분했다.

    거기다가 블로든 가문은 황실이나 고위 귀족들과 사이가 그리 좋지 않은 편이었다. 알아서 뇌물을 바치지 않고 뻣뻣하게 군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만약 싸움이 나면 황실이나 고위 귀족들이 누구의 편을 들지는 뻔했다.

    심지어 황궁에서 일하는 헤인리의 직속상사는 리하트의 아버지인 테르시안 후작이었다. 이번 일로 상사인 테르시안 후작이 직위를 이용하여 보복할 수도 있었다.

    그것도 골치인데, 금전적인 문제도 얽혀있었다. 두 가문은 일리아와 리하트의 약혼을 계기로 공동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여기서 발을 빼면 리하트만 좋은 일 시켜주는 것이었다.

    ‘역시 지금은 말하지 말자.’

    리하트가 한 짓을 알게 되면, 부모님은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당장 파혼시킬 것이 분명했다. 아무런 대책 없이 후작가와 틀어지게 되는 것이다.

    현장에서 들킨 것 말고는 바람피운 증거도 잡지 못한 데다가, 리하트가 파혼을 순순히 받아들일 리 없었다.

    일리아는 어느 정도 구체적인 계획이 세워지면 그때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겠다고 결론 내렸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해도 될까요?”

    일리아가 말을 흩뜨리자,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헤인리는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 확신을 담아 물었다.

    “리하트 때문이지?”

    일리아가 침묵하자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까지는 네가 좋다고 하니 참았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그놈을 두둔하겠다면……,”

    “아니에요.”

    그의 오해에 일리아가 단호히 잘라냈다. 헤인리는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이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며, 일리아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가 예상하신 대로 리하트와 다툼이 있었어요.”

    “…….”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해서 말할 수 없었던 거예요. 그리고…….”

    헤인리는 잠자코 일리아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의 표정을 확인한 일리아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좀 더 힘을 주어 말했다.

    “결혼식 준비를 중단하고 싶어요.”

    “……뭐? 결혼식을 중단하겠다고?”

    헤인리는 보기 드물게 당황했다. 일리아가 얼마나 결혼식을 고대했는지 지켜봤기 때문이었다.

    “네, 결혼식을 미루고 싶어요.”

    “이번에 다툰 것 때문에?”

    단순한 변덕은 아니냐는 눈빛이었다.

    “다툰 것도 그렇지만, 요즘 자꾸 어긋나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이대로 결혼하면 불행해질 것 같았어요.”

    파혼에 대한 초석을 깔아둘 필요성이 있었다. 나중에 가족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말이다.

    “어차피 결혼식 준비는 우리 쪽에서 전담하고 있었으니 중단하기도 쉬울 테죠.”

    테르시안 후작가는 그저 숟가락만 걸치고 있었다. 비용부터 시작해서 장소, 의상, 하객들에게 돌릴 청첩장까지 전부 블로든 가문에서 책임지고 있었다.

    그러니 결혼식을 미루자는 제안 정도는 받아들일 것이다. 물론 그 결혼은 절대 열리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헤인리는 생각에 잠겼는지 한참 말이 없었다. 잠시 후 그가 팔걸이에 손바닥을 얹으며 몸을 살짝 일으켰다.

    “지금 바로 테르시안 후작가에 사람을 보내도록 하지.”

    “제가 직접 말하고 싶어요.”

    헤인리가 고개를 돌려 일리아를 응시했다. 눈이 마주치고,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은테 안경 너머로 날 서 있던 눈빛이 서서히 풀렸다.

    “그러도록 해라.”

    딱딱한 말투였지만, 끝이 한결 무뎌져 귓가에 부드럽게 꽂혀왔다.

    할 말이 끝나자 침묵이 내려앉았다. 오랫동안 단절된 관계만큼 어색함도 깊었다.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고받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일리아는 용기를 내서 다시 대화를 이어보았다.

    “부모님은요?”

    “남부 지방에 내려가셨으니 열흘 후에 오실 거다.”

    “그렇군요. 부모님께도 제가 직접 말씀드릴게요.”

    헤인리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가락을 매만지던 일리아는 종이 감촉을 느꼈다. 아까 마차에서 들고 내렸던 종이 가방이었다.

    “그리고 이거…… 별것 아니지만 선물이에요.”

    헤인리는 가방을 받아,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들었다. 상자 속에는 자그마한 오르골이 들어있었다. 그러나 헤인리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 물어보고 살 걸 그랬나. 일리아는 속으로 후회하며 몸을 살짝 일으켰다.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런데, 먼저 가 봐도 될까요?”

    헤인리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짤막한 인사와 함께 일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문 닫히는 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

    혼자 남게 된 헤인리는 한참 동안 오르골을 매만졌다.

    ***

    일리아는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누웠다. 헤인리와 대화를 얼마 나누지도 않았는데, 벌써 진이 다 빠졌다.

    일리아는 휴식을 조금 취한 후, 고용인에게 커다란 상자 하나를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고용인이 가져온 상자에 물건을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리하트와 함께 맞춘 물건, 졸라서 받아낸 편지, 그가 준 취향이 아닌 향수……. 쓰레기를 버리듯, 그 행동에 망설임은 없었다.

    깊은 밤이 되었을 때 얼추 정리가 끝났다. 방에는 태풍이 쓸고 지나간 듯 남은 것이 거의 없었다.

    “속이 시원하네.”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린 기분이었다.

    일리아는 마지막으로 책상 서랍을 열었다. 서랍 구석에는 보석함이 놓여 있었다. 책상 위에 보석함을 올려놓고 한참 바라보다가 뚜껑을 펼쳤다.

    보석함에 낡은 단추 하나가 덩그러니 들어 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오래된 단추였다. 하지만 일리아에게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었다. 일리아는 단추와 함께 묻어두었던 과거를 회상했다.

    예전에 일리아는 황궁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첫 방문에 신이 나서 가족들 손을 놓친 줄도 모르고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일리아는 연못 한복판에 놓인 누각을 발견했고,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누각과 이어진 다리를 건넜다. 그러나 전날에 비가 왔는지 돌다리는 무척 미끄러웠다. 일리아는 그대로 발이 미끄러져 연못에 빠지고 말았다.

    불행히도 일리아는 수영을 할 줄 몰랐고, 주위엔 개미 한 마리 지나다니지 않았다. 누군가가 발을 끌어당기는 것처럼 몸이 점점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이대로 죽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시야는 까맣게 물들어버리고 말았다.

    -……!

    일리아는 물과 기침을 함께 토했다. 정신 차렸을 때, 제 몸은 잔디 위에 놓여 있었다.

    -괜찮습니까, 영애?

    햇빛을 받아 새빨갛게 빛나는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이 리하트 테르시안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손에 단추가 꼭 쥐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저를 구하러 뛰어든 리하트의 옷을 끌어당기다가 단추가 뜯어진 모양이었다.

    시간이 지나 몸이 회복된 후, 일리아는 감사 인사를 하러 후작가로 찾아갔다.

    -저를 구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겸손한 리하트의 모습에 일리아는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사례금도 몇 번이나 거절했다. 돈만 보고 제게 접근하는 다른 이들과 달랐다.

    그 후로 그의 이야기가 들려올 때마다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졌고, 연회나 번화가에서도 종종 마주치는 일이 있었다.

    몇 번 반복된 인연은 곧 운명이 되었다. 후원에 목련이 가득 피어나는 봄, 일리아는 사랑에 빠졌다.

    “…….”

    리하트가 목숨을 구해줬던 날 손에 쥐고 있었던 단추는 아직 주인에게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일리아는 단추를 꽉 쥐었다가 놓았다. 항상 리하트를 생각할 때면 가슴속에 작은 불꽃이 타오르곤 했다.

    따뜻하고 생명력 넘치는, 심장을 데우는 듯한 감각. 그때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이런 거구나 하고 깨닫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이미 폐허가 된 가슴에는 재만 흩날렸다. 자신은 꺼져버린 불씨를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사실 한 번쯤은 그가 저를 찾아올 거라 믿었다. 미안하다고, 용서해달라고…… 싹싹 비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나 리하트는 방문하기는커녕 서신조차 보내지 않았다. 덕분에 마음을 빠르게 정리할 수 있었다. 만약 그가 용서를 빌었다면 멍청하게도 받아들였을지도 몰랐다.

    일리아는 단추를 쓰레기통에 버리려다가 멈칫했다. 역시 이것만큼은 직접 돌려주는 것이 좋을 듯했다. 그럼 제 마음도 완전히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민 끝에 일리아는 다시 단추를 서랍에 보관하였다.

    “아가씨.”

    바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일리아가 들어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고용인이 커다란 상자를 가지고 들어왔다.

    “이게 뭐야?”

    “지금까지 아가씨 앞으로 온 서신이에요.”

    무려 한 달 동안 쌓인 서신이었다. 일리아는 의자에 앉아 서신을 빠르게 분류했다. 대부분은 티파티나 생일 연회 초대장이었다. 리하트와 연관된 사람이거나, 안면만 튼 사람들에게서 온 것들이었다.

    돈을 목적으로 얄팍한 관계를 맺으려는 심산이 뻔히 보였다. 이전이라면 마지못해서 한 번쯤 얼굴을 비쳤을 테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초대장을 전부 쓰레기통으로 밀어 넣던 중 반짝이는 봉투 하나를 발견했다. 봉투를 뜯어 확인하니, 황궁에서 귀족 영애와 영식을 위한 연회가 열린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그 자식도 똑같은 초대장을 받았겠지.’

    리하트는 연회를 좋아하니, 분명히 참석할 것이다. 일리아는 들고 있던 초대장을 꽉 쥐었다. 뻔뻔한 약혼자의 면상을 확인해볼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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