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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한 적 없다-118화 (완결) (118/118)

제118화

이안이 로넨으로 돌아가면, 그 다음에는 인어들이 나설 예정이었다.

“로넨은 다행히 인접한 바다가 많으니까, 로넨에 그분이 돌아가면 그때 기억을 지우기로 했어요.”

그것 또한 오필리아의 부탁이었다.

이안을 다시 사랑할 수는 없으나, 그가 평생 고통 속에 살길 바란 것은 아니었으므로.

하여 오필리아는 제 언니들이 떠나고도 남아 조잘거리는 아리엘의 이야기를 들으며, 희미하게 미소 지어 대답했다.

“그래요, 잘 부탁해요. 그편이 그에게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자비겠죠.”

하고, 자신이 사랑한 이가 망가진 것에 대한 유감을 담아서.

* * *

아리엘과의 대화는 해가 기울 때까지도 이어졌다.

아리엘이 워낙 말이 많은 성격인 데다, 전할 근황이 많았던 까닭이었다.

물속의 언니들에게는 하지 못하는 이야기가 오필리아에게는 쉽게 나오는 것도 한몫했으리라.

오필리아는 해변의 암초에 앉아, 파도가 야트막한 층을 몇 번이고 다시 쌓는 것을 보며 아리엘과 근황을 나누었다.

“그러면, 그렇게 편지를 보내서 마법사 분들을 곤경에 빠트린 게 세이렌 님이셨다는 건가요?”

“그런 셈이죠. 그걸 알고 알레이가 얼마나 어이없어하던지…….”

“세상에! 정말 놀랐어요! 전에 산테 님을 만났을 때는 마탑 내에 내부 고발자가 있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었거든요!”

“아, 그것 말이죠.”

이야기를 나누던 오필리아가 다시 생각해도 우습다는 듯 픽 실소했다.

임시 신전으로 편지를 보낸 이를 찾기 위해 경계를 곤두세우던 일.

그 일은 돌이키자면 완전히 헛다리 짚었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겠다.

정작 범인이 모든 세이렌을 다룰 수 있는 마탑 장본인이었으니 말이다.

산테도, 알레한드로를 포함한 다른 이들도 모두 마탑의 2인자였던 메르시아를 겨냥하던 것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우스운 일이었다.

-그러니까 마탑이 범인이라는 겁니까? 아니, 생각해 보자면 마탑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데 작당 모의라니. 간도 크다고 생각했지만…….

-세이렌……. 그걸 다 알면서 내가 이러는 걸 구경만 했단 말이지.

특히나 메르시아에 대한 경계를 곤두세우고 있던 예니트와 알레한드로는 유독 맥 풀린 모양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기뻐 보이기도 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메르시아는 물에 물 탄 듯, 밍밍한 반응이었다. 늘 그래왔듯이.

-절 의심하셨다고요? 합리적인 발상이군요. 제가 알레한드로 님의 소식을 가장 먼저 받아 보기도 했고, 또 알레한드로 님의 부재를 가장 크게 느꼈을 사람이니…….

-서운하진 않아요?

-저는 당연한 일을 그렇게 받아들일 만큼 속 좁은 사람이 아닙니다.

-아니, 메르시아 님! 그럼 대체 그 밤엔 뭘 하고 있었던 겁니까? 늦은 시각에 간부들을 다 모아 가지고서!

-아, 그것 말입니까…….

메르시아는 도리어 그 질문에 머뭇거리더니, 민망한 듯 주저 끝에 입을 열었다.

-결혼식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예?

-오필리아 님께서 아이를 가지셨다면 최대한 빠르게 식을 올리셔야 할 텐데, 알레한드로 님께서 함구하고 계셨으니 직접 여쭙기도 그렇고……. 그렇게 된 거 저희끼리라도 준비하고자…….

메르시아는 그렇게 말하며 주섬주섬 결혼식 구상안들을 잔뜩 꺼내 놓았다.

민망해하는 것치고는 상당히 들뜬 반응이었다.

-마탑 상층의 가장 넓은 홀에서 식을 올리는 겁니다. 입장 시에 꽃잎과 폭죽이 터지는 장치를 만들고, 자동으로 음악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를 꾸려서……. 입장은 꽃으로 장식한 마차를 타고 하시는 게…….

덕분에 난데없는 결혼식 구상안 1부터 10까지를 모두 들은 오필리아는, 메르시아에 대한 평가를 다소 조정해야 했다.

그 역시도 마탑의 괴짜 중 하나라고.

“메르시아라는 사람은 좀 멀쩡해 보였는데, 내 예상이 틀렸던 거죠. 마탑에는 정말 특이한 사람이 많아요.”

“왜요? 재밌어 보이는데! 깜짝 결혼식도 괜찮을 것 같아요!”

“…….”

오필리아는 설명을 그만두었다. 사실, 마탑의 사람들과 인외 종족들은 사고방식이 상당히 비슷했다.

아리엘은 정말로 메르시아의 구상안들이 탐나는지, 눈을 반짝이기까지 했다.

“우리도 결혼식을 하긴 하지만, 대개는 크게 하지 않거든요. 이미 그 전부터 반려라는 게 인식이 되어 있으니까요.”

“그리 소란을 떨 일이 아니라는 거군요.”

“맞아요. 그런 의미에서 인간들은 정말 재밌게 사는 것 같아요!”

그 목소리에 담긴 동경에, 오필리아는 저도 모르게 질문했다.

“아직도 뭍으로 가길 원하나요?”

“맞아요.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어요. 일이 이렇게 되었지만…… 저는 여전히 뭍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거든요.”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게 해야겠죠.”

“언니들하고도 이야기를 마쳤어요. 당장 뭍으로 가면 위험하니까, 우선 인간의 다리를 얻게 되면 마탑에서 지내면서 인간의 생활에 적응하는 걸로요.”

“그렇게 되면 바다로는 다시 돌아가지 못할 텐데, 괜찮겠어요? 인간의 수명은 인어에 비해서 훨씬 짧기도 하고,”

“언니들을 아예 볼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저는 수명에 큰 미련이 없어요. 제가 인간이 된다고 해서 바다가 제게 가혹해지는 것도 아니니까요.”

인간이 된다 해서 바다에 몸을 담그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새로운 삶을 얻는 것뿐이다.

대륙을 떠나 마탑으로 새로운 삶을 찾아온 오필리아는 아리엘의 뜻을 절실히 이해했다.

제각기 이유는 달라도 저마다 꿈꾸는 새로운 삶이 있으리라.

아리엘과 오필리아는 그런 것마저 닮아 있었다.

“언니들은 인어로서 바다에 있는 것이 자유라고 했지만, 저는 인간이 더 자유로워 보였어요. 바다도 뭍도 어디든 갈 수 있잖아요.”

물론 당장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현재로서는 부작용 없이 인어가 인간의 다리를 얻는 방법이 없었고, 하여 인어들은 마탑에 연구를 부탁했다고 했다.

성공한다면 아리엘은 뭍으로 갈 수 있으리라.

“그렇게 되면 저도 그분을 다시 만날 수 있겠죠.”

그분이 누구인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안. 오필리아가 뭍에 두고 온, 아리엘의 사랑.

“여전히 그를 사랑하는 건가요?”

“여전히, 라기에는 아직 1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걸요? 인어들의 사랑은 잘 식지 않아요, 오필리아.”

사실 수명이 긴 모든 생물이 그러하다고, 아리엘은 말했다.

“홀로 쌓은 시간이 긴 만큼, 우리에게 사랑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져요. 우리가 몸담은 곳을 집이라고 한다면, 마음 담을 곳은 그 사랑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외사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매달리기도 하고, 반려를 잃고 헤엄치는 법을 잊는 인어도 있다고.

그들은 주어진 시간이 긴 만큼 모든 감정이 길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아리엘은 신나게 종알거리다, 한 박자 늦게 아차 하는 소리를 냈다.

“아, 너무 제 얘기만 했나요? 생각해 보니 인간들은 여러 번의 사랑을 한다고 들었는데, 그리 와 닿지 않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네요.”

“아뇨, 재밌게 들었어요. 무엇보다 나도 평범한 사람에 비해 긴 시간을 살았으니까.”

아리엘의 이야기를 들으며 오필리아는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에 대한 자신의 감정도.

“이해할 수 있어요.”

감정 하나에 수십 년을 앓는 인어들도, 반려가 사라지고 헤엄치는 법을 잊는 인어들도 모두 이해가 갔다.

고작 사람 하나가 제 삶의 모든 부분을 결정지을 수는 없어도, 다시 그가 없었던 시절로 돌아가지도 못하리라.

사람은 변하고 깎이기 마련이라지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상대방의 모양을 따라서 풍화된다는 것이므로.

그걸 이해한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자면 또 이런 의미가 되리라.

“나도 사랑을 하고 있으니까요.”

알레이, 내가 당신을 깊게 사랑한다는 것.

* * *

오필리아는 아리엘과 헤어져 백사장으로 돌아 나왔다.

인적 하나 없는 백사장에 서 있노라면 처음 라딘으로 왔던 때가 떠올랐다.

도피인지, 유배일지 모를 감찰을 다니던 시기. 매일 곳 없어 정처 없이 흔들렸던 시기.

많이 떠돌았어도 바다를 보는 것은 처음이라, 어느 아침에 무작정 발 닿는 대로 해변으로 향했다.

희붐한 새벽 어스름 짙게 깔린 해변은 공기마저도 젖어 있었다.

그렇게 오필리아는 알갱이조차 집히지 않는 백사장을 딛고 서 일출을 보았다.

뺨을 스쳐 가는 눅눅한 공기와 폐부를 메우던 이슬 냄새가 기억 속에 선명했다.

붉은 머리칼이 바람 따라 흩날리고, 뒤이어 제 머리색을 닮은 빛으로 하늘이 물들었다.

오필리아는 그날의 경탄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 빛이 지평선을 가르며 공허를 제 품에 떠안겨 주던 그 순간을.

일출의 순간, 그 공간에 자신이 혼자 있다는 게 절실히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이 제게는 너무도 익숙하다는 것도.

그렇게 익숙했던 것이 처음으로 낯설게 느껴졌던 순간. 오필리아는 자신이 여태 잊고 살아왔던 고독과 직면했다.

순간 별 이유도 없이 눈물이 났다. 온 바다를 끌어안아도 마르지 않을 듯한 눈물이었다.

시간을 돌아와도, 숱한 아침과 일출을 맞아도 한 번도 멎은 적 없던 눈물.

그러나 이제는 그 또한 옛이야기다.

오필리아는 더는 인적 없는 해변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녀의 일출은 고독보다는 희망을 안겨 주었으므로.

그리고 그것은 그녀가 정말로, 이제 더는 홀로 서 있지 않기 때문인 탓도 있었다.

“오필리아.”

모래 밟히는 소리와 함께 들려온 호명에 오필리아는 뒤를 돌았다.

언제 마중을 나온 건지, 알레한드로가 오필리아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야기는 잘 마쳤습니까?”

“그럼요.”

“돌아갈 즈음이 되면 부를 줄 알았는데 영 부름이 없어 와 보았습니다. 해변을 구경하고 계셨던 겁니까?”

“맞아요. 옛날 생각이 나서요.”

“옛날 생각?”

“라딘에서 바다를 처음 봤던 날. 그리고 당신하고 처음으로 의견이 맞았던 때도.”

알레한드로가 이안을 공격하고, 오필리아가 그걸 말리느라 해변에 나왔던 때. 알레한드로가 제 저열함을 고해하고, 오필리아가 제 이름을 허락했던 날.

“어쩌면 그때 처음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날 우리의 마음은 지나치게 맞닿아 있었고, 당신은 너무 아름다웠으니까.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그렇다니 놀랍군요. 나도 그 즈음부터 당신에 대한 사랑을 인정하기 시작했는데.”

“인정이라면, 날 좋아하게 된 건 그보다 이르다는 건가요?”

“함구하겠습니다.”

“비밀이 너무 많은데.”

“그런 걸 물으시려면 적어도 입이라도 한 번 맞춰 주고 물어봐야 하는 게 아닙니까?”

기본이 안 되어 있다며 타박하는 알레한드로의 말에, 오필리아가 잘게 웃음을 터트렸다.

웃는 그녀를 당겨 안은 알레한드로가 바람결에 드러난 관자놀이와 이마, 콧잔등에 연신 입 맞춘 뒤에야 놓아주었다.

파도 구르는 소리가 두 연인의 속삭임 너머로 스며들었다.

앞으로도 이어질, 행복의 순간이었다.

< 당신을 구한 적 없다 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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