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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한 적 없다-117화 (117/118)
  • 제117화

    말하면서도 믿기지 않는 건지, 예니트는 조금 얼떨떨해 보였다.

    마법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삶을 살았다고 알고 있던 오필리아의 마력 친화도가 역대 최고라니.

    “알레한드로 님께 밀레세트의 황족은 모두 어느 정도 마력 친화도 높다고 듣긴 했습니다만, 이 정도인 겁니까?”

    “밀레세트의 황족들은 마력 친화도가 높게 태어난다고? 다 마법사를 해야 하는 거 아냐?”

    옆에서 코르넬리가 적잖이 부러운 눈치를 했지만, 오필리아는 대답 대신 제 이마를 짚을 뿐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기억이 돌아오는 것에 대한 여파였다.

    그녀의 어머니, 아멜리아가 지우고 간 것은 단순히 그녀의 기억뿐이 아니었다.

    -저 애가 그 애인 겁니까? 폐하께서 인어와 통정하여 태어났다는…….

    -쉿. 애가 듣겠네.

    -들어 봐야 제가 무얼 알겠습니까? 괴물 따위가 인간 행세를 하는 것도 놀라운데, 거기다 아이라니요. 대체 괴물을 어떻게 인간으로 만든 겁니까?

    -자세히는 나도 모르지만, 황실에 대대로 내려오는 기물이 있다더군. 듣기로는 무슨 소원이든 이루어 준다고.

    -그런 귀한 걸 저딴……. 하아, 됐습니다. 그래서 저 애는 인간이 맞는 겁니까?

    -그래. 신전에 모든 검사를 맡겨 보았네. 지극히 정상이야. 너무 지극히 정상이라 폐하께서 실망하시더군. 어떤 능력조차 없다니, 쯧쯔.

    이야기를 나누던 얼굴까지는 보이지 않았으나, 어렴풋한 목소리에 섞인 경멸만큼은 또렷하게 기억이 났다.

    더불어 그 기억보다도 더 어린 날, 아멜리아가 자신을 보고 착잡한 낯을 하던 것.

    -아가, 그건 어떻게 꺼낸 거니? 네가 저기에 손이 닿을 리 없는데…….

    -이르케!

    어린 오필리아가 의기양양하게 제가 했던 것을 재현해 보이자, 아멜리아의 낯에 걸린 수심은 한층 더 짙어졌다.

    -벌써 그런 것도 할 줄 알고, 우리 딸…… 다 컸구나.

    -헤헤, 웅!

    -그래, 네가 내 딸이니까…….

    빨리 잊어야 할 텐데. 설핏 중얼거리며 오필리아를 안아 드는 손이 떨렸던 것이 떠올랐다.

    어린 오필리아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절실하게 와 닿는 것들.

    아멜리아가 어떻게 오필리아를 황궁에서, 그리고 이 삶으로부터 지켜 냈는지.

    오필리아의 뺨을 타고 눈물이 투둑 떨어졌다.

    “오, 오필리아?”

    “정말 괜찮은 겁니까?”

    옆에서 다른 마법사들이 놀라서 괜찮은 거냐며 그녀를 불렀지만, 오필리아는 희미하게 웃을 따름이었다.

    “정말 괜찮아요.”

    오히려 오랜 응어리가 풀린 기분이다.

    “알레한드로 님께 밀레세트의 황족은 모두 어느 정도 마력 친화도 높다고 듣긴 했습니다만, 이 정도인 겁니까?”

    한평생 사랑받아 본 적 없다고 생각했다. 한갓 동화 속 공주들의 불행한 이야기를 위안 삼아야 할 만큼 사무친 일이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사랑을 속삭였던 남자조차 자신을 등졌으니 그 생각이 더욱 뿌리박힐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제게도 자신을 사랑해 준 이가 있었다.

    자신을 사랑해 제 삶마저 포기하길 서슴지 않았던 이들이 있었다. 이 삶이 그 증거였다.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알레이 한 명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이토록 눈물이 나는 걸 보니 어쩌면 그 또한 제 오만이었을까.

    정처 없는 바람처럼 몸 붙일 곳 찾지 못해 떠돌았던 일생. 자신이 알지 못했던 사랑이 짙은 그림자처럼 제 발목을 붙들었다.

    살아 있음이 이토록 기뻤던 날이 없다. 오필리아는 울며 웃었다.

    눈물의 연유를 모르는 마법사들이 주변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게 보였다.

    그 아래 오필리아의 주변을 둘러싸는 새싹 같은 것들도.

    그 난리가 우스워 오필리아는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자신이 만나야 할 사람을 떠올렸다.

    아버지가 다른, 바닷속의 제 이부자매들.

    * * *

    “……그래서, 그 뒤로는 마법을 쓸 수 있게 되었어요.”

    오필리아는 인어들에게 간단히 설명을 마쳤다. 그녀가 기억하는 것들과, 마탑 세이렌이 알려 준 것에 대해.

    굳이 그녀가 이야기를 따로 꺼낼 필요도 없었다.

    아리엘과 함께 약속 장소에 나온 인어들은 오필리아를 보자마자 그녀가 무언가 달라졌음을 알아차렸으므로.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을 때부터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지.”

    “세이렌이 정말로 부탁을 들어주었을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어딘가에는 살아 계실 거라고 믿고 싶었어…….”

    “아버지께도 이 이야기를 전해야 할 텐데.”

    “또 인간들이 쓸려 오는 걸 보게 생겼군.”

    인어들의 감상은 저마다 제각각이었다. 나이가 어릴수록 동요가 심했고, 나이가 많을수록 덤덤했다.

    그러나 저마다 눈가가 젖어드는 것은 모두 같았다. 인어들의 가족애는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오필리아는 그들 앞에서 죄인이 된 기분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런 오필리아의 손을 잡아 준 것은 다름 아닌 첫째 인어, 루벨리아였다.

    “그런 표정 짓지 마라. 네 잘못이 아니니.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야. 네 어머니와 우리의 어머니가 다르지 않고, 가족을 잃은 슬픔이 비견될 수 없으니 죄책감 가질 것도 없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단순히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우연이 아니었다니 놀랍구나.”

    루벨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한 가지 이야기를 했다. 인어들은 서로의 가족을 따라하는 습성이 있다고.

    “그래서 우리의 이름은 모두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름자를 따서 지었지. 나는 루벨리아, 저 애는 라멜리. 저 애는 테리아고…….”

    루벨리아는 자매들의 이름을 하나씩 소개해 주었다. 그 끝에는 오필리아와 꼭 닮은 막내, 아리엘이 있었다.

    “특히 오필리아라는 이름은 어머니의 어머니…… 그러니까 할머니의 것이었지. 어머니께서 왕비가 되시고 마법을 쓰게 되시기 전에 돌아가셔서,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고 종종 슬퍼하셨었다.”

    인어와 세이렌이 처음부터 마법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마법을 그들 종족에게로 전해 준 아멜리아는 전능에 가까운 마법을 구사했으나, 정작 제 가까운 가족의 죽음에는 손 쓸 수 없었음을 비통해했다고 루벨리아는 말했다.

    “그런데 네 이름이 오필리아라니 단순한 우연일까 싶었는데……. 이런 사정이었을 줄은.”

    “근황을 전하러 나왔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을 줄은 몰랐네요.”

    아리엘이 말을 거들었다. 이 약속의 주최자인 아리엘 또한 혼란스러워 보이기는 매한가지였다.

    “나는 사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없어서 언니들처럼 가깝게 느껴지지는 않아요. 만날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 정도?”

    그보다 오필리아와 가족이었다니 정말 놀랍다면서, 아리엘이 오필리아의 손을 잡았다.

    “이상하게 처음 봤을 때부터 끌렸는데, 가족이라니 정말 신기하지 않아요?”

    “나도 같은 생각이에요.”

    굳이 말하자면 거기에 아리엘에게서 어머니를 빼앗은 것에 대한 죄책감도 있었지만, 오필리아는 내색하지 않았다.

    아리엘이 애써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방싯방싯 웃는 것이 느껴졌으므로.

    그리고, 정말로 마음 한 편으로는 기쁘다는 생각도 있었던 탓에.

    “마탑으로 오면서 조금은…… 혼자가 된 기분이었는데, 몰랐던 가족이 생겼다니 기쁘네요.”

    뭍을 완전히 떠나, 밖과는 단절된 마탑으로 향하는 것은 예정했던 일임에도 다소 신산스러운 기분을 주었다.

    혼자서는 육지로 돌아갈 수도 없고, 사방이 바다라 설령 도망가야 할 일이 생기더라도 갈 곳이 없는 탓일지도 모른다.

    혼자라는, 오필리아의 안에 남아 있는 해묵은 불안은 그녀의 행복 기저에서 이따금 고개를 치들었다.

    한때 잃었던 것들이 또 다른 형태로 오필리아 안의 구멍을 메워 왔다.

    “이제 불안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오필리아는 아리엘의 손을 잡고 웃었다.

    파란 수면과, 물빛의 하늘이 맞닿은 해변. 얕은 물살이 오필리아의 발끝을 부드럽게 적셨다.

    불안 한 줌 없는 한낮이었다.

    * * *

    아리엘의 언니들은 머잖아 돌아갔다.

    혼란을 정돈할 시간도 필요했고, 애초에 약속 장소에 나온 이유는 단지 오필리아에게 약속을 잘 이행했음을 전달하기 위함이었으니까.

    인어들은 맑은 물을 띄워 그들이 본 것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아주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오필리아의 찢긴 옷가지를 붙들고 우는 남자.

    -제발, 안 돼! 오필리아……!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모습이었으나 오필리아는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이안 카를레 로넨.

    그는 끝까지 오필리아의 죽음을 부정하다, 결국 끌려갔다.

    아마도 이 해변에서는 다시 볼 일이 없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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