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구한 적 없다-113화 (113/118)

제113화

오필리아의 부름에 창가에 비스듬히 앉아 있던 산테가 시선을 틀었다.

접지 않아 여전히 휘황한 느낌을 내는 금빛 날개가 대답 대신 한 번 까딱했다.

“글쎄, 내 의견이 중요한가? 나는 마탑에 속한 것도 아닌데.”

“하지만 알레이가 마탑을 떠나 있는 동안 마탑의 최상층과 많이 교류했을 거 아니에요.”

“뭐, 그렇긴 하지. 나는 디안 놈을 찾아온 건데 왜 너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아까도 말했잖아요. 알레이는 씻으러 갔다고.”

그렇게 말하는 오필리아의 머리칼 역시 살짝 젖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알레한드로가 마법으로 바람을 만들어 내 말려 주기는 했으나, 본디 긴 머리는 말리기 쉽지 않은 법이다.

게다가 바람은 특히나 조절이 어려워서, 괜히 꼼꼼히 말리겠답시고 세기를 올렸다간 이 방 전체가 뒤집어질 수도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오필리아는 꽤 만족하고 있었다.

‘절절매는 게 귀엽기도 했고.’

조금 전 허둥대던 알레한드로를 떠올린 오필리아의 입매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

-저, 젖어 있으면 안 되는데……! 제, 제가 해 드리겠습니다!

-왜 이렇게 깍듯해요? 편하게 해도 되는데.

-오, 오해입니다. 저는 이게 편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행여 머리카락을 만지다 오필리아의 목이라도 건드릴까 벌벌 떠는 모양새였지만. 그것도 그것 나름 사랑스러웠다.

다른 데에서는 모두 능숙한 남자가 쑥맥처럼 구는 꼴이 제법 봐줄 만하다고 한다면 성격이 나쁜 걸까.

‘굉장히 바람둥이 같은 생각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새빨개진 얼굴과 떨리는 손끝, 설탕으로 쌓은 탑을 건드리기라도 하듯 조심스러운 손길은 아무리 겪어도 달콤하게 느껴졌으니까.

게다가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그 사이사이 마냥 무르지 않은 부분들이 불쑥 튀어나온다는 점이었다.

갈증을 억누르는 것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라거나, 제게 입 맞추고 싶어 안달이 난 찰나의 순간들.

-가능하다면 난 당신을 가두었을 겁니다. 나 외에는 아무도 생각할 수 없고, 나 외에는 아무도 만날 수 없는 곳으로.

찡그린 미간과 인내하는 낯이 억눌린 독점욕을 고스란히 표출하고 있었다.

그가 손 한 번 튕기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 특히나 그의 인내를 자극하는 듯했다.

-그곳에서라면 내가 이토록 불안하지 않겠지. 당신을 잃을 생각도 하지 않을 테고, 당신에게 입 맞추는 것도, 당신을 원하는 것도 거리낄 이유가 없겠지…….

알레한드로는 그렇게 괴로운 듯 속삭이며 오필리아에게 몇 번이고 키스했다.

그때를 떠올리니 목덜미가 조금 뜨거워져, 오필리아는 손을 들어 제 뒷덜미를 쓸어내렸다.

아직도 그의 입술이 스쳤던 감각이 남아 있었다. 그 화인 같은 감각이.

오필리아는 저도 모르게 얼마 지나지 않은 기억을 되짚어 보다가, 산테에게 핀잔을 들었다.

“어린 것들이 발랑 까져서는, 쯧.”

“……당신한테 어리다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이상하네요.”

“왜? 네 할아버지보다도 내가 더 나이가 많을 텐데.”

탁, 산테의 발끝이 바닥에 부딪히며 가벼운 소음을 냈다. 그는 고작 걸음 몇 개로 오필리아와의 거리를 좁혔다.

“이제 와서 내외라도 할까?”

놀리듯 속삭이는 목소리와 함께, 한 입 거리나 될까 싶은 여체가 세이렌의 눈앞에 놓였다.

여전히 한 줌밖에는 되어 보이지 않는 허리와, 조금만 힘을 주면 으스러뜨릴 수 있을 것 같은 손목.

얇은 카디건 아래 언뜻 비치는 실루엣이 포식자를 더욱 자극했다.

본디 세이렌은 인내에 익숙지 못한 종족이나, 산테가 자극을 인내할 수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우습게도 그와 동시에 보호 본능이 산테의 뇌리를 장악했던 탓이다.

눈앞의 존재를 어느 곳 하나 다치지 않게 두고 싶다는 마음. 날이 차가워지기만 해도 걱정이 앞서는 마음이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산테는 만약 오필리아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자신이 이성을 잃으리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아마 절벽에서 그녀를 받아 냈던 순간일까. 어쩌면 그보다 더 전일지도 모르겠지만.

“……장난도 못 치겠군. 인상 펴.”

그는 굳은 빵을 건드려 보듯 오필리아의 굳은 낯을 검지로 툭 치더니, 제 털 망토를 오필리아의 어깨 위로 둘러 주었다.

그러나 투덜거리는 듯한 말은 어째 빼놓을 수가 없었다.

분명 낯을 굳힌 채 서 있던 오필리아의 얼굴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까닭이리라.

“날 무슨 파렴치한 놈으로 봐도 정도가 있지. 그렇게 볼 건 또 뭐야?”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 뭔데?”

“당신이 만월이랑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요.”

오필리아가 산테의 등 뒤를 가리켰다. 산테의 머리보다 조금 더 위에 뜬 보름이 달빛을 쏟아 내고 있었다.

그제야 산테는 오필리아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호의 어린 눈동자가 자신을 또 얼마나 좋은 모습으로 그려 놓았을지.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고작 사람 하나 때문에 이런 감정이 들 수 있다는 것도 신기하고, 별것 아닌 감정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도 신기하다.

‘이게 다른 종족들이 한다는 사랑이라는 건가.’

고작 사랑이란 이름 아래 묶여 서로에게 피해를 끼치며 구질구질하게도 살아간다 생각했는데.

산테는 이제 아리엘을 걱정하던 인어들을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생각이 그에 닿자, 산테는 잊고 있던 것을 하나 끄집어 냈다.

“아, 그러고 보니 네게도 용건이 있었군.”

“내게요?”

“아리엘이 다시 한번 만났으면 하던데.”

“우리가 다시 만나야 할 이유는 이제 없는 걸로 아는데요. 혹 그녀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 건가요?”

“글쎄, 만나 보면 알겠지. 나도 해역을 지나다가 붙들렸던 거라. 자세한 이야기는 몰라.”

직접 만나서 얘기해 보시라고.

덧붙인 산테가 오필리아를 스쳐 가, 침실의 소파에 비딱하게 걸터앉았다.

“그리고 아까 내 의견을 물었지. 메르시아라는 놈을 조심해야 할 것 같으냐고.”

“아, 네.”

“네가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다만, 자리를 비운 사이 나도 내 나름의 조사를 해 봤다. 마탑에서 신전으로 편지를 보낸 사람이 있는데, 그게 누구일까 싶어서.”

하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편지를 배달해 준 세이렌은 누구에게서 자신이 편지를 받았는지도 기억하지 못했고, 메르시아의 마력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래서 손을 뗐지. 건드릴수록 수상한 문제에 대해서는 파헤치지 않는 것이 우리 신조라.”

건드릴수록 수상하게 느껴진다는 건 곧 그들이 범접할 수 없는 무언가가 그걸 은폐하려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대개 이런 문제를 파헤치다 보면 자연을 거스르기 마련이라, 본능이 경고하는 셈이다. 그만 손을 떼라고.

하지만 오필리아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특히나 누군가 신전으로 편지를 보내기까지 했다면 더더욱.

“정말 그게 최선인 건가요?”

“네가 무얼 걱정하는지는 안다. 하지만 오필리아. 장담컨대 네가 마탑에 있는 한 너를 해칠 수 있는 건 없을 거다.”

“왜 그렇게 단언하죠?”

“당연하지. 마탑이 디안 놈의 편이니까.”

마탑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지켜보고 있고, 또 언제든 범죄자를 색출해 낼 수 있는 마탑 세이렌.

제 주인마저 쫓아냈는데 고작 오필리아를 해치려 한 이들을 쫓아내지 못할 리 없었다.

“그걸 아니까 디안 놈도 저렇게 느긋하게 있는 거고. 걱정 마라.”

그들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목욕을 마친 알레한드로가 욕실에서 나온 까닭이었다.

“언제 온 거냐? 온 줄도 몰랐군.”

“뭐, 온 김에 네 피앙세와 간만에 담소도 하고. 오필리아 때문에 온 마탑이 시끄럽다며?”

“그 소문…… 너도 들은 거냐?”

“당연히.”

산테가 씩 웃자 알레한드로의 낯이 와락 구겨졌다.

두 사람은 그 뒤로도 장난 섞인 대화를 주고받았고, 오필리아는 그런 그들을 잠시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지 신산스러운 마음이 들었던 탓이다.

‘마탑이 알레이의 편이라니.’

마탑이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차라리 내가 직접 마탑이라는 걸 만나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런 오필리아의 생각을 뒤로 밤은 깊어져 갔다.

며칠 뒤, 그 생각이 현실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