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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한 적 없다-112화 (112/118)

제112화

깊은 밤. 코르넬리의 입에서 허탈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 소문이 도는데 조금도 몰랐다니.”

“넌 언제나 소문에 느렸잖아. 뭘 새삼스럽게.”

예니트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들은 몇 시간 전 코르넬리가 알레한드로의 집무실에 들이닥쳤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코르넬리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충격에 빠진 알레한드로를 위해 자리를 비켜 주었다가, 연구 자료를 보충하기 위해 최상층으로 올라왔다 돌아가는 참이었다.

한 팔에는 두꺼운 책을 끼고 층계를 내려가며, 널찍한 로브 소매를 둘둘 걷은 예니트가 내친김에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가기 시작했다.

“자, 보자. 네가 마법식 쓰던 종이에 머리 박고 자서 뺨에 수식이 인쇄된 채로 돌아다녔을 때도 네가 제일 늦게 알았고, 널 좋아하던 여자애가 동네방네 고백할 거라고 소문을 내고 다녔는데도 너는 고백을 받은 줄도 모르고 있었지?”

“그 얘기는 왜!”

“네가 수석을 하는 동안 차석이 널 내내 죽일 듯이 노려봤는데도 넌 그 애랑 절친인 줄 알았고. 저번엔 사귀다가 파투난 애들한테 100일 선물을 챙겨 줬다며? 너도 참 대단하다.”

“난 정말 사귀는 줄 알고 있었단 말이야! 나한테는 그런 이야기를 한 번도 안 했으니까-”

“보통은 분위기로 알아차리거나 소문으로 듣거든요. 이 책상물림아. 매일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으니 알 리가 있냐.”

“그, 그러는 너는! 너도 몰랐잖아!”

코르넬리가 이렇게 당할 수만은 없다는 듯 애써 반격하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예니트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마법사가 아니었다.

“내가 너냐? 이야기가 돌고 있다는 건 진작 눈치챘어. 다들 날 볼 때마다 뭔가 묻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는데, 정작 얘기를 못 꺼내니까. 어련히 시간이 지나면 알 수 있게 되겠지 싶어서 알아볼 생각을 안 한 거고.”

예니트는 코르넬리가 처음으로 임신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 희비가 교차하던 알레한드로와 오필리아의 표정이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한 명은 우스워 죽겠다는 표정이었고, 다른 한쪽은 당장 창밖으로 뛰어내려 죽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물론 전자가 오필리아고 후자가 알레한드로다.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은 했지.’

예니트는 마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필리아에게 자초지종을 들으며, 오필리아에 대한 신뢰를 회복했다.

그리고 마탑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이에 대해 제대로 사과를 건네기도 했다.

-죄송합니다, 오필리아.

-그럴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은 했으니 사과할 것 없어요. 오해가 풀렸으니 된 거지.

그리고 오필리아는 관대했다. 그녀는 어느 정도 예상한 부분이라는 듯 웃으며 이렇게 말하기까지 했다.

-적어도 다른 소문이 돌거든 예니트에게 또 다른 오해를 받을 염려는 줄었네요.

-그러고 보니 소문 말인데요, 오필리아도 느끼지 않았습니까?

-무엇을?

-당신에 대해 소문이 도는 것 말입니다.

예니트는 그렇게 말하며 방 건너편을 엄지로 가리켰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부두의 짠내처럼 벽에 스미어 있었다. 오필리아가 온 이후로 어딜 가나 이랬다.

오필리아를 비롯해 함께 마탑으로 돌아온 이들이 등장할 때면 잠깐 멎어 들었다가도, 사라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수군수군.

예니트가 혀를 차며 말했다.

-화제가 워낙 부족한 마탑이니 이럴 거라 예상은 했지만, 정 신경 쓰인다면 오필리아를 위해 알아 오겠습니다.

-뭐 어때요. 다들 날 싫어하는 것도 아닌 것 같던데.

-그래도 당사자나 알레한드로 님 정도는 무슨 말이 돌고 있는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버려 둬요. 간만에 고향에 온 것 같고 좋네요. 그것보다 훨씬 부드러운 환대라서 더 좋고.

오필리아의 고향이라 함은 밀레세트의 황궁일 것이다.

오필리아가 황궁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잘 모르는 예니트는 오필리아가 좋다니 그저 고개를 주억거릴 따름이었다.

-무엇보다 사람이 오면 떠들게 되는 건 자연한 수순이니까요. 무엇보다 이렇게 나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퍼지면 좋은 점도 있거든요.

코르넬리라면 분명 그 좋은 점이 뭔지 캐물었겠으나, 예니트는 알레한드로를 제외한 사람들에게 일관되게 관심이 없는 인물이었다.

‘눈치 챙기지 않고, 오지랖 부리지 않는 게 쉽게 사는 법이지.’

예니트의 인생관이 그러했으나 미안한 점도 있으니 나름 오필리아에게 오지랖을 부려 볼까 했는데, 당사자가 괜찮다니 더 말할 게 있나.

예니트는 신경을 껐다. 그리고 오필리아는 본인의 말대로 소문의 정체를 알고 나서도 그저 우스워할 뿐이었다.

그녀 옆의, 눈치를 챙기지 않는 게 아니라 눈치가 없어서 못 챙기는 어느 멍청이 하나에게는 이야기가 달랐던 모양이지만 말이다.

“그런 소문이 도는데도 몰랐다니…….”

“에휴, 등신아.”

예니트는 아직도 충격에 빠져 있는 코르넬리의 등짝을 한 번 두드려 주고는, 마저 층계를 내려갔다.

“정신 그만 빼놓고, 아까 얘기하던 거나 마저 해 봐. 오필리아가 마법사 시험을 보게 될 거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아, 그거! 맞아. 오필리아가 마법에 흥미가 있다더라고. 그게 아니더라도 마탑에 외부인이 들어온 걸 곱게 보지 않는 눈도 있으니, 친화력 검사나 한번 해 보자고 하더라. 친화력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고…….”

코르넬리가 종알거리는 사이, 층계의 창밖으로는 달이 수면을 비추고 있었다. 로넨에서 지낼 때 가장 그리워했던 풍경이기도 했다.

예니트는 저도 모르게 멈추어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코르넬리의 부름에 다시 걸음을 뗐다.

“예니, 뭐해? 어서 내려와.”

“어어, 가.”

연구실은 알레한드로가 지내는 최상층, 그다음 고위직들이 주로 머무르는 층보다 한 층 더 아래에 있었다.

아직 마법을 충분히 이수하지 못한 상급반도 오갈 수 있어야 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자연히 간부진들이 사용하는 상층을 지나기 마련인데.

‘불이 켜져 있네.’

문득 예니트의 시선이 복도 안쪽을 향했다. 층계에서는 제대로 보이지 않으나,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불빛이 눈에 띄었다.

만약 고위직들이 이 시각에 공적인 회의를 한다면 응당 제게도 말이 들어왔을 텐데.

‘들은 바가 없단 말이지.’

알레한드로가 돌아온 이후 고위 마법사들이 미묘하게 두 부류로 나뉜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알레한드로를 반기는 쪽과 반기지 않는 쪽.

후자는 당연히 알레한드로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자들이었다.

마탑의 주인이 권력을 가지는 것을 당연히 여기다, 호랑이가 없어진 사이 여우가 산 주인 행세를 했으니 다시 내놓고 싶을 리가 있나.

짚이는 주모자는 있다.

‘알레한드로 님이 자리를 비우신 동안은 메르시아가 머리 노릇을 했다고 했는데.’

그래서인지 돌아왔을 때도 썩 탐탁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 오히려 당황하는 투라고 해야 할까.

-어, 어서 오십시오. 알레한드로 님. 함께 오신 분은…… 오필리아, 시라고요? 실례지만 신원이,

-마탑이 언제부터 신원을 그렇게 따졌다고. 내 손님으로 모셔라. 크게 틀린 것도 아니니.

-……알겠습니다.

마탑의 편애를 받는 알레한드로를 제가 뭐 어떻게 할 수는 없으니 두고 보는 것 같지만, 알레한드로에게는 이제 오필리아라는 약점이 생겼다.

‘알레한드로 님을 공격하기 위해 오필리아에게 해코지를 할 가능성도 있어.’

게다가 이렇게나 소문이 과장되어 퍼져 있기까지 하다면…….

예니트는 무슨 생각에선지 잠시 멈추어 서 있다가, 다시 한번 재촉을 받아야 했다.

“왜 계속 거기 서 있는 거야? 뭐라도 있어?”

“별일 아냐.”

예니트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두 손바닥을 꺾이게 포개었다.

엄지 사이의 틈으로 입김을 불어 넣자, 풍선이 부풀듯 연기가 새어 나오더니 이내 작은 새의 형상을 띠고 그들이 걸어온 반대 방향으로 날아갔다.

“연락할 일이 있었던 게 지금 생각났어.”

이렇게 급조한 전령은 먼 거리를 갈 수 없어 먼 거리의 연락책으로는 부적합했지만, 마탑 안에서라면 충분했다.

‘이 정도면 별일 없겠지.’

오지랖은 이만하면 됐다. 예니트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리를 떴다.

* * *

“……그래서, 메르시아라는 사람을 주의하라고 하네요.”

오필리아가 말을 마치며 손을 폈다. 한때 새의 형상을 하고 있었던 연기가 피어올라 공중으로 사라졌다.

“당신의 의견은 어떤가요, 산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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