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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한 적 없다-109화 (109/118)
  • 제109화

    떠난 이들의 흔적은 선명히 남았다.

    임시 신전은 다시 복구가 되지 않을 정도로 불타 버렸으며, 원래도 발 들이는 사람이 많지 않았던 청록색 숲은 근처에 가기만 해도 매캐한 냄새를 풍겼다.

    그러나 놀라운 점은 그 거대한 화재로 죽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부분이었다.

    사람들은 그 점을 두고 신이 도왔다며 수군거렸다.

    그러나 사람들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화재가 일었던 밤, 라딘에 머무르던 황녀 중 한 명이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부분이었다.

    정작 화재로는 죽은 사람이 없는데, 생판 다른 곳에서 사람이 죽었다니. 게다가 그게 황녀라니!

    루헤일의 신자들은 문책을 피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머잖아 수도로 귀환하라는 부름을 받게 되었다.

    한동안 라딘을 시끄럽게 만들었던 이들을 모두 포함해서 말이다.

    사고가 컸으니 그 부름에 반발하는 이는 없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서 말이다.

    “대공 각하!”

    철썩, 파도가 높게 치며 흰 물보라를 자아내는 난폭한 해안.

    사람을 휘청이게 할 만큼 물살이 센 와중에도 얕은 바다를 미친 것처럼 서성이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바닷바람에 제멋대로 헝클어진 검은 머리칼과, 빛을 잃어 광증을 띠는 눈.

    카델리아는 치맛단을 걷어붙이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오필리아가 죽은 이후로 이성을 잃은 이안은 거리가 좁혀질수록 망가진 것이 선명히 보였다.

    얼마나 울었는지 퀭한 눈가가 죄 짓물러 있었고, 손에는 찢길 대로 찢긴 옷이 하나 들린 채였다.

    카델리아의 이복 언니가 절벽에서 떨어졌던 날 입었던 옷이다.

    ‘고작 사생아 황녀가 뭐가 좋다고…….’

    그녀는 입술을 한 번 깨물고는, 이안을 붙들었다.

    오필리아에게 이안이 푹 빠진 것은 보고 싶지 않으나, 잘하면 이것은 그녀에게 기회가 될 수 있었다.

    “각하,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오늘은 수도로 돌아가셔야 해요!”

    “나는 못 갑니다. 폐하께도 그리 전하십시오. 나는 오필리아를 찾기 전까지는-”

    “언니는 이미 목숨을 달리했어요! 옷이라도 찾은 게 기적이라고 다들-”

    “입 닥쳐!”

    더 듣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이안이 버럭 화를 냈다. 핏대가 선 눈이 사납게 일렁였다.

    “분명 내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어제 이곳에서 붉은 머리칼을 봤다고!”

    “그건 헛것이에요! 이러다 각하까지 위험하게 되시면 밀레세트가 얼마나 우습게 되겠어요. 이러고 계시면 안 돼요!”

    “내 뜻은 변하지 않으니 이거 놓으십시오. 나는…… 도저히 여길 떠날 수가 없습니다. 오필리아가, 오필리아가 여기서…….”

    때마침 바람이 불어 물살이 세차게 이안의 다리를 치댔다.

    이안은 고작 그것으로도 쉽게 허물어졌다. 짜디짠 물 위로 이안의 흐느낌이 흩어졌다.

    고작 오필리아의 흔적만 남은 옷을 부둥켜안고서, 제 모든 것을 잃은 사람처럼 서럽게.

    카델리아는 그 모습을 인상을 찌푸린 채 보고 있다가, 뒤에 서 있던 시종들에게 손짓해 이안을 끌어내게 했다.

    한때는 그 누구보다 완벽해 보였던 사람이었는데. 대체 왜 이런 꼴이 된 건지.

    ‘오필리아가 뭐라고.’

    그녀의 죽음에 애도하는 이가 몇 있었으나, 카델리아는 조금도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고 싶지 않았다.

    오필리아가 죽었으니 크센트의 왕에게 팔려갈 순번이 제 앞으로 부쩍 다가온 탓이다.

    어젯밤까지도 울고불고, 부황께 간청하는 편지를 썼지만 여전히 묵묵부답.

    짝사랑하던 이는 제 이복 언니를 못 잊어 폐인 꼴이 되었고, 주교 베일란은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을 지고 루헤일의 모든 은총을 박탈당했다.

    정말 요란한 죽음이 아닐 수 없다.

    카델리아는 인상을 쓴 채 몸을 돌렸다.

    “……?”

    문득, 바위틈에서 붉은 머리칼을 본 것 같았다. 광증이 옮기라도 하는 걸까.

    카델리아는 눈을 제 눈을 비볐다. 바다는 여전히 사나울 뿐, 붉은색은 보이지도 않았다.

    역시 헛것이리라. 카델리아는 해안선을 등지고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 * *

    동이 터오며 사위가 주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해역.

    얼핏 보면 잿더미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을린 로브를 뒤집어쓴 예니트가 투덜거렸다.

    “살다 살다 신전 놈들을 돕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좋은 일 해 놓고 왜 그렇게 죽상이야, 예니트.”

    “기껏 도와줬더니 또 붙잡으려고 난리잖아!”

    예니트가 버럭 화를 내며 그을음 묻은 로브를 툭툭 털었다. 아직도 화마의 열기가 제게 머물러 있는 것 같아 하게 된 행동이었다.

    루헤일의 불꽃이 마법사들에게 얼마나 취약한지 모르는 사제는 없을 것이다.

    그런 불꽃을 무릅써 가면서 기껏 구해 주었더니 화마가 사그라들자마자 제 팔부터 붙드는 게 아닌가.

    -용기 있게 행동한 것은 높게 사지만, 그로 모든 죄를 청산할 수는 없다.

    라면서.

    게다가 예니트는 사제들을 구하느라 모든 마력을 짜낸 이후라, 저항도 하지 못하고 꼼짝없이 붙잡힐 위기에 처해 있었다.

    때마침 알레한드로에게 이야기를 전해 듣고 시기 좋게 등장한 코르넬리가 아니었더라면 그대로 다시 붙잡혔으리라.

    “배은망덕한 놈들.”

    “어쨌든 무사히 나왔으니까 진정해. 마탑으로 돌아가면 다시 마주칠 일도 없는걸.”

    코르넬리가 저것 보라며 앞을 가리켰다. 해가 떠 오는 방향으로, 그들보다 조금 더 앞서 있는 이들이 있었다.

    “알레이, 그러니까 이게 결계라는 거죠?”

    “그렇습니다.”

    “손에 잡히지도 않는데 신기하네요.”

    오필리아가 조심스럽게 결계에 손을 뻗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결계에 닿자 손이 그만큼 사라져가며 그 존재를 드러냈다.

    이 결계는 사물을 통과시키니, 아마 사라진 오필리아의 손 나머지는 결계의 반대편에 있으리라.

    “결계가 느껴진다는 게 내가 마탑에 여전히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은 아니겠죠?”

    “결계를 느끼기 때문에 출입이 가능한 겁니다. 일반인에게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을 테니까요.”

    알레한드로가 빙긋 미소 지으며 오필리아의 손을 잡더니, 그대로 결계 너머로 들어갔다.

    끝이 보이지 않는 물은 여전하지만, 결계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이 그제야 드러났다.

    베일 것처럼 날카롭게 솟은 암초들과, 그 너머 높게 자리한 석탑.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곳이 전부 세이렌의 영역이라는 것을.

    오필리아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마탑의 이름이 세이렌인 이유가 있었군요.”

    “어원이야 저도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이런 풍경을 보다 보면 그런 생각이 자주 들긴 합니다.”

    알레한드로가 가볍게 긍정하며 오필리아를 수면 위로 내려놓았다.

    찰랑이던 물은 오필리아와 알레한드로의 발이 내려앉을 즈음이 되자 서서히 수면이 낮아지더니, 수면 아래 감추어 두었던 다리를 드러냈다.

    오필리아가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자, 뒤에서 화를 삭이고 있던 예니트가 알은체를 해 왔다.

    “이 다리도 오랜만에 보는군요.”

    “그러고 보니 예니트도 마탑이 간만이겠군요?”

    “예. 그렇긴 합니다만, 마탑이 잠들어 있는 동안에는 다리가 열리지 않아서요.”

    예니트는 결계의 안쪽은 모두 마탑의 권한으로 움직인다고 말했다. 그러니 마탑의 주인이 더더욱 중요한 존재라는 것도.

    “예니트 말이 맞습니다. 마탑이 잠들어 있어서 제가 뭍까지 가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요!”

    코르넬리가 뒤에서 말을 거들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병아리 마법사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적잖이 즐거워 보였다.

    “알레한드로 님이 돌아오셨으니 마탑도 일어난 거겠죠. 지금쯤이면 마탑에서도 알레한드로 님이 돌아오셨다는 것을 다 알고 있을 거예요.”

    코르넬리가 싱글거리며 앞서 나갔다.

    예니트도 간만의 고향이라 그런지, 마탑의 연구 시설들이나 그리웠던 곳들을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하며 코르넬리와 보폭을 맞추고 있었다.

    모든 것이 평화로워서일까, 오필리아 또한 굉장히 들떠 있었다.

    ‘정말 왔구나.’

    마탑 세이렌. 자신과는 연이 없을 거라고 여겼던 곳.

    오필리아는 앞서 간 이들을 따라 걸음을 내디뎠다.

    걸음마다 석재로 만들어진 다리에 파도가 잔잔히 부딪히며 물거품을 만들어 냈다.

    두 팔을 양껏 벌려도 다 담을 수 없는 풍경이 그녀의 앞에 놓여 있었다. 길었던 시간을 돌아 처음으로 그러쥔 삶.

    그 무엇도 그녀를 강제할 수 없었고, 그 무엇도 그녀를 괴롭게 만들지 않았다.

    삶이라는 것이 으레 회한을 만들고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자아내더라도 오필리아는 자신이 더 이상 그것들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들은 오롯이 그녀가 만들어 낸 선택이었으며, 그녀가 쟁취한 것이었으므로.

    벅찬 감정이 오필리아의 폐부에 스몄다. 어쩐지 웃음이 터졌다.

    간만에 맞은, 눈물이 없는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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