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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한 적 없다-108화 (108/118)
  • 제108화

    몸이 공중으로 떨어지는 감각과 함께, 머잖아 등과 어깨를 받치는 느낌이 났다.

    어딘지 퍽 익숙한 느낌이기도 했다. 오필리아는 이것을 황궁에서 한 번 겪어 본 적이 있었기에.

    단지 받아 준 사람이 그때와는 달라져 있었다. 산테는 왜인지 상당히 기분이 나빠 보였다.

    미간을 구긴 그가 금빛 날개를 그들 위로 둘러 시야를 가렸다.

    굳이 묻지 않아도, 오필리아는 산테가 은신을 쓰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구겨진 낯으로 산테가 입을 열었다.

    “살다 보니 이런 일을 다 겪는군.”

    “세이렌은 흥미를 좇는 종족이잖아요. 흥미롭지 않아요?”

    “그래. 너무 자극적이라 말년이 걱정될 지경이라 문제지.”

    산테가 비아냥거렸지만, 오필리아는 개의치 않고 미소 지었다. 모든 계획이 순조로웠으니 웃지 않을 도리가 있나.

    오필리아 밀레세트는 이제 죽었다.

    남은 것은 마탑으로 가는 것뿐이다.

    * * *

    “……그래서, 그렇게 된 이야기에요.”

    오필리아의 설명이 끝나고, 알레한드로는 두 손에 낯을 묻었다.

    언제나 그녀의 이야기는 그를 기함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었다. 전생에도, 이번 생에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자리에 산테가 없다는 점이었을까.

    -제일 어린 놈들이 제일 말썽이군. 훈육 좀 하고 오마.

    산테는 조금 전 세이렌 삼 형제가 난리를 치는 것을 보더니, 한숨을 쉬며 자리를 떴다.

    그렇게 불탄 숲에 둘만 남은 상황.

    알레한드로는 무엇부터 지적해야 할지 몰라 마른세수만 하다가, 애써 진정하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부터 꺼냈다.

    “그렇게 된 건 알겠는데, 그럼 옷은 또 어디다 팔아먹고 온 겁니까?”

    오필리아는 산테의 것이 분명한 깃털 망토를 두르고 있었는데, 문제는 그 아래 보이는 것이 얇은 네글리제뿐이라는 점이었다.

    날이 어두워서, 그리고 산테의 망토가 있어서 망정이지 그렇잖았다면 분명 눈 뜨고는 못 볼 민망한 상황이었으리라.

    그러나 오필리아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완전범죄를 위해 옷은 버리고 왔어요. 분명 유해를 찾으려는 시도가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것은 오필리아가 곧바로 알레한드로에게 진상을 알려 줄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산테가 절벽 아래서 그녀를 받아 준 이후, 그녀는 아래로 내려가 편평한 암초 위에 자리를 잡은 뒤, 품에서 무언가를 하나 꺼냈다.

    현재는 사용되지 않는 데다가, 세월을 직격으로 맞아 잔뜩 부식된 오래된 동전.

    물건을 알아본 산테가 알은체를 했다.

    “인어들이 준 건가?”

    “네, 맞아요. 이렇게 빠르게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아리엘의 자매들 중 첫째 인어. 그녀는 오필리아를 노을곶으로 데려다 주며 작은 친애의 표시를 건넸다.

    -네가 아리엘을 구해 주었으니, 그리고 아리엘이 네게 친애를 가지고 있으니 우리도 네게 친애를 표하는 게 옳겠지. 이건 그 표식이다.

    -표식이요?

    -그래. 이 동전을 바다에 던지면 언제든, 그리고 어디에서든 우리가 너를 도우러 가마.

    창해에 던져지더라도 한 번은 구명할 수 있는 기회라니. 뜻밖의 횡재였다.

    오필리아는 이를 잘 받아 두었고, 그녀가 생각하기에 지금이야말로 그것을 사용할 적기였다.

    오필리아는 동전을 바다에 던지고, 입고 있던 옷과 장신구들을 모두 뜯어내 인어들에게 건넸다. 로브부터 드레스에 이르기까지,

    “이걸 이 인근 해안에 둬 주세요. 사람이 발견할 수 있도록.”

    “꼭 그렇게 다 벗어야 하나?”

    “이안은 날 반드시 찾으려 할 거예요. 이런 걸 바다에서 발견한다면 분명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겠죠.”

    그러니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

    그 탓에 반라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다행히 산테의 망토가 있어 민망한 일은 피할 수 있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오필리아의 생각이고, 알레한드로에게는 아니었지만.

    알레한드로는 다시 조금 착잡해진 낯을 했다가, 한숨을 쉬며 산테의 망토를 벗기고 제 것을 둘러 주었다.

    다른 때였더라면 그녀에게 언질이라도 줄 수 없었겠느냐고 투정했겠으나, 상황이 얼마나 급박하게 돌아갔는지 알고 있었기에. 알레한드로는 오필리아를 이해했다.

    오필리아는 언제나 알레한드로보다 몇 걸음을 앞서 있었고, 알레한드로가 느끼는 간극은 그로부터 기인한다는 점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앞선 면모에서 자신이 오필리아에게 매료되었다는 점도.

    그러니 알레한드로가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입니다, 오필리아.”

    오필리아가 굳이 앞선 그 몇 걸음을 돌아왔다는 사실이 그저 기쁘고 고마웠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만 같던 절망은 오필리아의 존재에 씻은 듯 사라졌다.

    알레한드로는 오필리아의 손을 잡고, 그에 입 맞추듯 낯을 기대었다.

    절망이 사라졌다고는 해도 일순 머물렀던 비탄의 잔재가 그를 휘청이게 만들었으므로.

    “당신을 또 잃었다면, 나는. 정말…….”

    “알레이. 날 봐요.”

    오필리아의 음성이 알레한드로의 고개를 잡아챘다. 그는 아직 물기 남은 낯으로 오필리아를 응시했다.

    어둠 속이었으나 지척이었기에 오필리아가 어떤 시선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지, 알레한드로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늘 그를 보던 그 눈이다. 친애와 호의가 깊게 가라앉은 눈. 그리고 어딘지 회한을 품은 모양새.

    “우리는 여전히 여기에 있어요. 당신도, 나도.”

    그러나 누군가 한 명이 사라진다면, 그것을 감내해야 할 필요도 있었다.

    오필리아는 알레한드로가 자신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쩌면 구원자라는 이름을 붙여도 이상하지 않을 위치라는 것도.

    그녀가 알레한드로의 기억을 찾는데 지대한 도움을 주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더불어 오필리아 또한 알레한드로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

    하지만 오필리아는 그로써 알레한드로가 무너지길 바라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의 구원자가 아니잖아요. 그러니 서로가 사라진다고 그렇게 무너져야 할 이유도 없어요.”

    “알고 있습니다.”

    알레한드로의 낯을 타고 남은 눈물이 빗물 떨어지듯 툭 흘러내렸다.

    “하지만 당신이 나를 구한 적 없다고 해도, 내가 당신을 구한 적 없다고 해도. 여전히 나는 당신에게 머물러 있을 겁니다. 고작 그런 의미가 없어도 당신은 내게 중요한 사람이니까.”

    나는 어떤 방식으로든 당신에게 매료되었을 것이고, 당신을 사랑했을 것이다.

    당신이 내게 어떤 위치를 갖지 못해도, 달맞이꽃이 달에게 으레 그러하듯 홀린 듯이 바라보게 되었으리라.

    오필리아는 알레한드로가 거듭된 생애와 껍데기뿐인 삶에서 유일하게 찾은 가치였다.

    “그러니 날 두고 가지 마세요. 나는 당신이 없으면 견딜 수 없으니…….”

    “……우습네요.”

    자못 냉랭한 대답에, 알레한드로는 저도 모르게 떨어트렸던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환히 웃고 있는 오필리아의 낯이 보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우리가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게 우스워요.”

    “……오필리아.”

    “당신이 누구였든 나는 당신을 분명 소중히 여기게 되었을 테니까. 누군가 묻지 않아도 당신에게 돌아갔겠죠.”

    그리고 어쩌면, 오필리아 그녀는 이 감정을 알고 있었다. 사람 한 명 때문에 살고 싶었다가, 또 죽고 싶기도 했던 그 감정을.

    여전히 오필리아는 제 모든 것을 내던질 만큼 감정이 깊다고 느끼지는 않았으나, 그 존재를 부정할 생각 또한 없었다.

    “알레이, 나는 내가 없어도 당신이 살길 바라요. 하지만 그만큼 당신을 원하기도 하고.”

    부정하고 도망쳐 봐야 결국 이 감정으로 돌아오게 될 운명이었던 모양인 건지.

    알레한드로는 오필리아의 덤덤한 고백을 들으며 잠시 얼이 나갔다.

    오필리아도 같은 생각이라니.

    과거 그녀를 잃었던 기억과 현재의 안도, 그리고 벅참이 교차하는 순간.

    폐허가 된 숲을 배경으로 오필리아가 알레한드로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이제 가요. 더 있다간 정말 사람이 올 것 같으니까.”

    “행선지는?”

    “이제 남은 곳이 더 있겠어요?”

    마탑 세이렌.

    그렇게 말하는 오필리아의 손을 맞잡으며, 알레한드로는 생각했다.

    가능하다면 이 손을 영영 놓고 싶지 않다고.

    “길은 내가 안내하겠습니다.”

    “……알레이, 설마 기억을 찾은 건가요?”

    “예. 기억을 찾았습니다. 마탑으로 가는 데 문제는 없을 겁니다.”

    그 말을 듣자 오필리아의 낯 위로 확연한 안도의 빛이 서렸다. 그 뒤로 새벽 어스름이 깔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지나간 밤.

    또 다른 여명이 찾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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