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화
그렇게 하룻밤을 꼬박 고통에 시달린 뒤에야 알레한드로는 마침내 그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잊고, 걷고 뛰는 법을 제외하면 아는 것 없는 갓 태어난 새끼 사슴과 다를 바 없는 비천한 마법사 알레이로.
모든 기억이 돌아온 뒤에야 알레한드로는 이번 생의 기묘한 일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이할 정도로 많은 것을 알고 있던 오필리아, 그리고 그녀에게 이상하리만치 이끌렸던 과거까지.
‘돌이켜 보자면 오필리아를 만났던 날도 그랬지.’
그들이 만난 곳은 연회장의 정원이었다. 다시 말해 말단 마법사에 불과한 알레한드로가 그곳에 갈 이유는 조금도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그가 오필리아와 만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였다. 길을 잘못 들었다는, 정말 별것 아닌 우연.
황궁은 출입이 제한된 곳이 많아서 알레한드로도 모든 길을 아는 것은 아니었다.
하여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을 알고 궁을 빠져나가려 하던 중 오필리아가 떨어진 것을 보게 된 것이었다.
그때는 단순히 대단한 우연이구나 싶었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자면 아리엘의 비늘 때문이었겠군.’
그 비늘이 만들어 낸 꿈에 알레한드로가 들어갔고, 오필리아와 이런 방식으로 마주쳤으니까.
꿈을 현실로 만들자 그들의 만남 또한 바뀌게 된 것이다.
라딘에서 황녀와 마법사로 마주쳤던 것이, 황궁에서 옛 지인과 재회하는 것으로.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은 전부 당신이 알려 준 거예요.
오필리아의 말이 기억을 스쳤다. 자신을 향하던 시선 속 선명하던 호의와 그리움도.
그것은 마지막으로 헤어졌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태도였다.
그때의 오필리아는 알레한드로에게 선을 그었지만, 이번에는 가장 안쪽까지도 내보이길 주저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런 변화가 무색하게도, 현실은 다시 같은 궤도를 밟아가고 있었다.
오필리아는 절벽 아래로 추락했고, 그는 이번에도 오필리아를 지키지 못했다.
게다가 이번에는 과거보다 상황이 나빴다.
‘과거에는 오필리아가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었는데.’
이번에는 오필리아의 온전한 유해조차 찾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 상황이었으니.
기껏 시간을 돌려놓고도 상황을 더 악화시키기만 했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다가왔다.
신체의 고통보다도, 자신이 잊고 있던 것들이 주는 충격보다도 당장 눈앞에 닥친 비극의 무게 때문에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을 멎을 길이 없었다.
불길이 그친 탓에 도주한 마법사들을 뒤늦게 수색하고 있기라도 한 건지, 근처에서 인기척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알레한드로는 움직일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알레한드로가 되찾은 것은 고작 기억뿐이 아니었다. 그는 잃어버렸던 제 지위가 다시금 돌아온 것을 느꼈다.
마탑과 정신이 연결되는 것이 느껴진 덕분이었다.
마탑은 한 세대에 오직 한 명의 주인만을 두기 때문에, 만약 이대로 알레한드로가 기억을 찾지 못했더라면 계속 잠에 빠져 있다가 다음 세대에서 새로운 주인을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알레한드로는 돌아왔고, 마탑은 그를 반겼다.
그러니 그가 마음먹는다면 고작 시골에 임시로 세워진 신전을 탈출하는 것은 알레한드로에게 일이라고 말할 법한 수준도 아닐 것이 분명했다.
지나치게 뛰어나고 지나치게 전능하면 반대로 의욕을 잃기 마련이었다.
희미한 삶의 의미를 어떻게든 붙들어 놓던 존재가 사라지자 알레한드로는 모든 의지를 상실했다. 감각마저 무뎌졌다.
차라리 비탄이 해일처럼 실체가 있는 것이라서, 자신을 끝도 없는 심해로 쓸어갈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테, 저거 아무래도 울고 있는 거 맞죠?”
“아주 펑펑 울고 있군 그래.”
그리고 그때, 인기척들이 수군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중요한 것은 그 목소리가 굉장히 익숙한 종류였다는 사실이었다.
“역시 미리 말을 해 주는 게 좋았을까요?”
“말을 하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던 것 아니었나?”
“사실 여기까지 올 줄 몰랐거든요. 기껏 불까지 질렀으니 어떻게 잘 숨길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오판이었을까요. 여상한 태도로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익숙했다.
알레한드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필리아?”
완연한 어둠 속, 진녹색의 깃털 망토를 로브처럼 두른 인영이 있었다.
그 옆에는 장신의 남자가 서 있었는데, 인영이 머리까지 두르고 있던 망토를 걷자 감추어져 있던 붉은 머리칼이 바람에 날려 불꽃처럼 화륵 날렸다.
그러나 불꽃과 달리 그것이 어둠을 밝힐 수 있을 리는 만무한데.
알레한드로는 어쩐지 그 모습을 본 순간 사위가 밝아지는 것을 목격한 기분이 되었다.
“알레이.”
나긋한 음성이 그를 불렀다. 어둠 속에 인영이 방긋 미소 짓는 것이 보인 것 같았다.
제가 헛것을 보는 걸까. 벌써 미쳐 버린 걸까.
놀람이 가시지 않아 그대로 굳어 버린 알레한드로의 낯에, 남은 눈물이 툭 빗금을 그리며 떨어졌다.
그러나 등대를 발견한 이상 배가 항로를 돌릴 길은 없었다.
알레한드로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떼어 무언가에 떠밀리기라도 한 듯 앞으로 몇 발짝 나아갔다.
나뭇가지가 발아래 부서지는 소리가 나고, 손이 붙들렸다. 부드러운 온기가 알레한드로의 젖은 뺨을 쓸었다.
“많이 놀랐어요?”
크게 뜨인 시야에 오필리아의 낯이 들어차고, 다정한 음성이 귓가를 쓸었다.
그즈음 청록색 숲의 유해가 세찬 바닷바람에 소란을 떨며 만드는 소음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알레한드로는 팔을 뻗었다. 제 눈앞의-아직도 조금은 허상처럼 느껴지는-인영을 붙들어 품으로 당겼다.
가슴팍에 닿는 부피감과 뜨끈한 온기가 부재한 감각을 도로 불러왔다. 품 안의 상대가 웃음을 터트리는 것이 느껴졌다.
“……오필리아.”
그녀가 돌아왔다.
* * *
사실 이것은 처음부터 계획된 이야기였다.
이야기는 오필리아가 동전을 가지고 산테와 이곳 절벽으로 향했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필리아, 너무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좋을걸. 바람이 너무 불어서 갑자기 떨어지기라도 하면-”
“당신이 받아 줄 수 있나요?”
산테의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었던 그 말.
오필리아는 라딘으로 향할 때부터 자신의 죽음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사회적 죽음을.
“마탑으로 가기 위해선 내가 죽어야 해요. 오필리아 밀레세트라는, 밀레세트 제국의 황녀가.”
그래야 수색도 받지 않을 수 있을 테고, 마탑과 제국이 번거로운 문제로 얽히지 않을 수도 있을 터였다.
그래서 오필리아는 사람을 일부러 모아 놓고 자신의 죽음을 위장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알레이가 임시 신전에 붙잡혔다는 이야기를 듣자 아주 괜찮은 계획이 생각났다.
임시 신전에서 실랑이를 벌여 소동을 만들고, 도주해 인파를 청록색 숲 안으로 유인한 다음 절벽에서 투신하는 계획이 말이다.
알레한드로가 들었더라면 분명 제정신 아닌 계획이라 했을 법한 계획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이번만큼은 이 계획에서 논외였다.
그래서 오필리아는 임시 신전으로 떠나기 전, 세이렌들에게 지령을 내렸다.
“딜로, 너는 코르넬리에게로 가. 네가 셋 중에서는 제일 빠르잖니? 네가 일찍 도착해 줘야 하는 일이야. 코르넬리는 성문 쪽 치료소에 있을 테니 찾기 어렵지 않을 거고. 오늘은 성에 들어오지 말라고 전해 줘.”
“맡겨 줘!”
“그리고 둘째, 실로. 너는 산테를 찾아. 네가 눈썰미가 좋으니 네가 가장 잘 찾을 거라고 믿어. 산테를 찾거든 이 말을 전해 주렴.”
“응! 무슨 말?”
“뱃삯을 받으러 가겠다고. 그렇게 전하면 알아들을 거야.”
“알겠어!”
실로는 그렇게 떠났고, 무사히 돌아왔다. 오필리아가 이안과 실랑이를 하던 그 찰나에.
이안이 세이렌들의 공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오필리아는 은밀히 실로에게 물었다.
“실로, 산테는 찾았니?”
“응! 말도 전했어! 알겠대!”
활기찬 대답에 오필리아는 빙긋 미소 지었다.
어차피 목격자는 한 명만 있으면 되었다. 그것도 목격담에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한 명이면 더욱 좋으리라.
오필리아는 이안을 일부러 유인해 숲 안으로 들어갔고, 절벽에 다다랐다.
“말도 죽을 자리는 알아보는 모양이군. 도망은 다 쳤나?”
“……더 갈 곳도 없어 보이니까, 그런 셈 치죠.”
무대는 완성되었다.
남은 것은 배우들의 몫이다.
“우리 여기서 그만 끝을 내죠.”
오필리아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절벽 아래로 투신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도박이었으나, 두렵지는 않았다.
그녀는 이미, 뛰어내리기 직전 진녹색으로 변해가는 금빛 깃털이 바람결에 스쳐 가는 것을 보았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