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구한 적 없다-106화 (106/118)

제106화

그것은 아리엘이 차마 내보이지 못한 진심이었다. 더불어 아리엘이 오필리아를 원망하며 죽은 것이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했다.

‘아리엘이 오필리아를 죽이려 한 것이 아니라면.’

오필리아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오필리아 본인에게 있다는 뜻이었다.

생각이 그에 미치자 알레한드로는 곧바로 로넨으로 향했다.

시간이 제법 흘러 있음에도 오필리아는 여전히 정물화처럼 누워 있었다. 잠에서 여전히 깨지 못한 채로.

‘잠을 자고 있다는 건 꿈을 꾸고 있다는 뜻이겠지.’

그렇다면 꿈의 내용을 알아보는 것도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남의 머릿속을 뒤져 보는 일은 시전자에게 타격이 커서 마법사들 사이에서 되도록 지양되는 행위였으나, 알레한드로는 가까스로 잡은 희망을 놓을 수 없었다.

알레한드로의 손이 오필리아의 머리를 짚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로넨 공국의 대공님이시라는데, 제국의 연회에 참석하시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지?”

“로넨 대공은 연회를 싫어하신다면서?”

“황제 폐하께서 간곡히 청하셨대. 일부러 대공을 초대하려고 연회를 크게 열었다는 소문이 자자해.”

부유하는 감각과 함께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난사하는 샹들리에 불빛에 눈이 부셔, 알레한드로는 미간을 찌푸렸다.

갑작스러운 빛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자 부연 시야가 걷히고 바뀐 장소가 드러났다.

밀레세트 황궁의 연회장. 그리고, 몰린 인파 한가운데 닭 무리 속 학처럼 유난히 시선을 잡아끄는 검은 머리칼의 남자.

이안 카를레 로넨.

시간대가 달라졌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안이 더없이 건강한 낯으로 미소 짓고 있었으니까.

관짝에 누워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던 얼굴은 누구라도 매력을 느낄 법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덕분인지, 그를 두고 소곤거리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왔다.

“내가 한번 가서 말 걸어 볼까? 이번이 아니면 만날 기회도 없잖아.”

“공비 자리라도 노리는 게 아니라면 관심 꺼. 저런 분은 황녀 정도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으실걸.”

“황녀도 황녀 나름이지. 둘째 황녀님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어? 첫째 황녀님처럼 변변한 본인 궁조차 없는 분이면 이야기가 다르지.”

이것은 알레한드로의 기억이 아니었다.

알레한드로는 이날 연회장으로 찾아가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이것이 누구의 기억일까.

답은 뻔했다.

‘오필리아.’

시선을 옮기자 붉은 머리칼에 수수한 차림을 한 여자가 곧바로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이안처럼 키가 크지도, 눈에 띌 만한 위치에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나 알레한드로의 시선에는 자석 달라붙듯 가장 먼저 들어왔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오필리아는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그녀는 크게 놀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찌푸려진 미간이 그녀의 당혹을 고스란히 보여 주었다. 그 끝에 오필리아의 시선이 향한 것은 결국 이안이었다.

오필리아가 크게 동요하는 것이 선명히 보였다.

‘이때부터 사랑했던 걸까.’

오필리아의 사랑 이야기를 본의 아니게 훔쳐보는 기분이 들어 알레한드로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리 길지는 않았다.

알레한드로가 시선을 돌리려는 찰나, 오필리아가 돌연 걸음을 돌려 어디론가 향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녀의 바로 뒤에 있던 발코니였다. 오필리아는 거침없이 문을 열고, 난간으로 다가섰다. 그 직후 투신했다.

“……오필리아.”

온몸의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알레한드로의 기억 속에 오필리아가 라딘으로 가기 전 다쳤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설마.’

오필리아가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건가?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곱씹을 틈은 없었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순간 이동을 써 스스로를 발코니 아래로 옮겨 둔 탓이었다.

모란 떨어지는 듯한 실루엣이 시야에 잡히고, 그다음 순간 알레한드로는 두 팔 가득 들어차는 무게감을 느낄 수 있었다.

손에 잡히는 여체가 선명했다. 흩뜨려진 붉은 머리칼이 팔을 스쳤다.

눈이 마주쳤다.

확연한 놀람이 오필리아의 푸른 눈동자 안에 자리했다.

“……알레이.”

오필리아의 입술에서 제 이름이 나온 순간. 알레한드로는 오필리아의 꿈이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안이 아리엘을 오필리아로 오해하지 않은, 그리하여 이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은 세계.

그것이 오필리아의 소망이었다.

* * *

제아무리 인어의 비늘이 인어의 목숨을 대가로 만들어지는 강력한 마력체라고 해도, 인어의 비늘이 이뤄 낼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인어를 비롯한 마법을 사용하는 인외 종족들은 마법을 통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수 없었으므로.

그러니 아리엘의 비늘이 오필리아를 영원한 잠에 빠지게 만든 이유는 간단했다.

아리엘의 비늘이 오필리아의 소망을 들어 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필리아의 소망은 아리엘이 현실에서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오필리아가 원했던 것은 이 모든 것들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었고, 그걸 만들어 내기 위해 현실의 시간을 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그래서 아리엘의 비늘은 편법을 쓴 것이다.

오필리아의 현실을 영원히 멈추게 하고, 오필리아의 꿈 속에서 과거로 돌아가 소망을 이뤄 주는 것.

알레한드로가 오필리아의 꿈을 들여다보았을 때, 바뀐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오필리아가 자신이 겪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는 점.

그것은 어떻게 보자면 작은 변화였으나, 아주 중요한 열쇠이기도 했다.

오필리아가 과거의 기억을 가진 채로 시간을 거슬러 온다면 모든 비극을 만들어 낸 오해를 풀어낼 수 있었으므로.

그러니 오필리아를 살리고자 한다면 단순히 시간을 돌리기만 해서는 안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과거로 돌아가 봐야 같은 과오를 반복할 뿐이니까.

만약 알레한드로가 제 생각대로 물체의 기억을 되살려 복구하는 마법을 썼더라면 아마 비극이 수없이 되풀이되었으리라.

하여 알레한드로는 다른 방식을 가용했다. 바로 아리엘의 비늘을 이용하는 것이다.

아리엘의 비늘을 매개로 조건식 마법을 걸어, 그 비늘이 만들어 낸 환상을 현실로 만드는 것.

그를 위해 알레한드로가 내놓은 것은 스스로의 지위였다. 마탑의 주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지위.

마탑의 주인이 스스로 지위를 내려놓는다면 그 말로는 추방일 뿐이다.

마법이 성공할지도 불분명한 상황에서 그런 행위는 제정신이 아니라는 말도 아까운 수준이었지만, 알레한드로는 시행했다.

정신이 부유하는 감각과 함께 눈을 떴을 때는 사위가 바뀌어 있었다.

오필리아가 누워 있던 로넨의 성이 아니라, 익숙한 돌벽 너머 창으로 날카로운 암초가 보이는 마탑.

마법이 성공한 걸까?

희망이 고개를 든 순간, 끔찍한 고통이 전신을 강타했다.

“크윽!”

산 채로 거죽을 뜯기는 듯한 감각. 고통에 눈물이 줄줄 흐르고, 토기가 치밀어 바닥을 굴렀다.

갑작스러운 고통의 원인은 명확했다.

‘마법이 성공했구나.’

마탑의 주인은 마탑과 한 몸이나 다름없는 존재로, 그 직위를 내려놓는다면 사지가 뜯기는 것과 같은 고통을 느끼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머릿속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멍청한 것.]

평상시에는 알레한드로에게만 들리는 마탑 세이렌의 목소리였다.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채, 알레한드로가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헉, 허억, 세이렌…….”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는 있느냐?]

“콜록! 네 기억도, 여전한 건가?”

[네가 거래한 상대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조건식 마법은 거래의 형태를 띠고 있다.

마법사들은 그 거래가 막연히 신과 같은 절대자와의 것이리라 짐작했으나, 실상은 조금 더 가까이 있었던 셈이다.

[너는 스스로 자리를 내려놓은 것도 모자라, 섭리를 거스르기까지 했다. 너는 곧 모든 기억을 빼앗기고 대륙에 버려질 거다.]

“허억, 기억까지, 큿, 빼앗아가는 건가? 각박하군.”

[멍청한 소리. 네 목숨을 거두지 않은 것을 감사히 여겨라.]

마탑이 핀잔하며 혀를 찼지만, 알레한드로의 입술에서는 비죽 웃음이 샜다.

성공한다면 기억을 잃게 될 것을 모르지 않았다.

결국 시간 선은 한 번 꼬인 띠와 같아서, 원인과 결과가 서로 꼬리를 물고 있었으므로.

“그 숲은 좀 적적하던데.”

기억을 잃은 채 처음 눈 떴던 그때를 떠올린 알레한드로가 대꾸했다.

아무래도 좋았다.

오필리아를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