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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한 적 없다-105화 (105/118)
  • 제105화

    내가 어떻게 해야 했을까.

    알레한드로는 비탄 속에 수없이 자문했다.

    숱하게 얽힌 인과 속에서 제가 잘못 꿰었던 단추를 찾고자. 그러나 아무리 자문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저 미동조차 없는 오필리아만이 캔버스 앞의 정물화처럼 존재할 뿐.

    그날의 일이 반복해서 뇌리를 맴돌았다. 오필리아의 선 밖으로 쫓겨났던 날.

    알레한드로가 오필리아에게 아리엘과의 관계를 침묵했던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오필리아가 스스로의 비극에 대해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오필리아는 황녀였고, 공비였다. 숱하게 나열되는 그녀의 지위들은 곧 자존심과도 직결되었다.

    곧은 자존심은 어쩌면 그녀를 망가뜨린 주범일지도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그것이 그녀를 지탱하는 가장 큰 축이었다는 사실이다.

    오필리아는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수치스러워 했다.

    이안과 말다툼을 하고 울면서 자신을 마주쳤을 때도, 그녀는 서둘러 눈물을 닦아 내고 태연히 웃었다.

    -어딜 가요, 알레이?

    -……우십니까?

    -……조금. 이제 괜찮아요. 못 보일 꼴을 보였네요.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최근 들어 자꾸 감정적으로 변한다면서, 오필리아는 애써 변명했다.

    평정심을 유지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황족의 교양이었으니, 그녀에게는 울고 화내는 일조차 치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알레한드로는 자신이 아리엘을 알고 있다고, 그리고 그녀가 로넨 성에서 어떤 위치인지 알고 있다고 먼저 말할 수 없었다.

    마침 마법사들이 지내는 외탑은 성과 떨어진 곳이었으니, 눈치 없는 괴짜 마법사를 연기하는 일은 수월했다.

    그렇게 오필리아와 함께 아리엘의 일로부터 눈을 돌렸다. 그게 오필리아를 위한 길이라고 스스로에게 되뇌면서.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확신할 수 없었다. 차라리 오필리아를 위한다는 말로 타인을 자처하지 않았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그녀의 모든 상황을 알고 있으니 이곳을 벗어나자고 권했더라면, 적어도 오필리아가 깨어날 수 없는 상황에 이르지는 않았을 텐데.

    붉은 머리칼이, 곧게 감긴 눈꺼풀이 정교한 인형처럼 보였다.

    그러나 눈을 감은 고요한 낯에는 아직 혈색이 맴돌고 있었다. 의식이 없을 뿐 손은 부드러웠으며, 온기는 여전했다.

    그러니 식물인간이라는 말이 도는 것도, 그녀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는 다른 남자가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것도 일리가 있었다.

    오필리아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 그녀의 남편.

    대체 오필리아가 쓰러진 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몰라도 그는 알레한드로의 기억과는 사뭇 판이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다소 강퍅해 보이기는 해도 미색이 완연하던 낯에는 흉터가 군데군데 자리 잡혀 있었고, 푹 꺼진 눈두덩이와 볼이 죽은 자를 연상시키게 했다.

    게다가 매일 밤 성 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리는 울음소리는 그의 것이었던지.

    “당장 원인을 밝혀내. 오필리아가 왜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하는 거지?”

    본디 듣기 좋은 저음이었던 그의 목소리는 온통 갈라져 마물의 울음소리처럼 들리기까지 했다.

    이 얼마나 한심한 몰골인지.

    핏발 선 눈과 버석한 낯짝을 보자 혐오감이 울컥 올라왔다.

    이안 카를레 로넨, 이 위선자가 그간 얼마나 오필리아를 내버려 뒀는지 알레한드로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리고 오필리아가 이안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도, 그는 아주 잘 알았다.

    -이안이 있으면 내가 살아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별것 아닐지 모르겠지만…… 그런 사람이 있어요. 존재만으로도 살아갈 이유가 되는 사람.

    이안과 사랑할 때의 오필리아는 정말 행복해 보였다. 상기된 뺨과 애정으로 반짝이는 눈동자가 더없이 아름다웠다.

    그 기억이 제게는 아직도 선명했다. 제가 사랑한 보석을 가장 끔찍한 꼴로 망쳐 놓은 이안에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노기 어린 목소리가 느리게 흘러나왔다.

    “……공비님께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신 지 얼마나 된 겁니까?”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내가 네게 요구한 건 분명 다른 일일 텐데.”

    그렇게 쏘아붙이는 이안의 눈동자에는 확연한 경계와 독점욕마저 서려 있었다.

    그 작태가 우스워 알레한드로는 헛웃음을 흘렸다. 구겨진 낯에서 흘러나오는 실소가 날카로웠다.

    이안은 오필리아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희망을 잡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알레한드로는 아니었다.

    “공비님은 돌아오실 수 없습니다. 숨을 거두신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포기하십시오.”

    “뭐? 지금 이게-”

    “숨만 멎지 않았다 뿐인 사람을 살았다고 믿고 싶은 겁니까?”

    “오필리아는 살아 있어! 감히 내 앞에서 그따위 망발 지껄이지 마라. 오필리아를 깨울 생각을 해야지, 멀쩡히 산 사람을 포기하라고?”

    로넨에 있을 때 오필리아와 가깝게 지냈던 것은 다 잊어버렸느냐며, 이안이 화를 냈다.

    화를 내고 싶은 쪽이 알레한드로라는 사실은 조금도 모른 채.

    알레한드로는 이를 악물고 오필리아가 살아 돌아올 수 없는 이유를 꾸역꾸역 설명했다.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하시는 것 같으니 설명해 드리죠. 공비님께는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그 때문에 시간이 멈춰 계시고. 영원한 잠에 빠진 겁니다.”

    “그렇다면 네가 풀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어떤 마법사가 와도 풀 수 없는 마법이 있습니다.”

    특정 조건을 달성하지 못하면 풀리지 않는 조건식 마법.

    ‘오필리아는 인어의 비늘을 가지고 있었지.’

    인어의 마지막 사념이 담겨 있는 비늘과 오필리아를 감싸고 있는 인간이 아닌 존재의 마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뻔했다.

    ‘일부러 위험하게 느껴지게끔 설명했는데.’

    그게 독이 되었다. 결국 오필리아는 알레한드로가 떠난 뒤 인어의 비늘을 삼킨 것이다.

    설명이 날카로웠으니, 그녀가 무엇을 원했을지는 뻔했다.

    죽음.

    비늘을 삼킨 당사자가 죽음을 원했고, 비늘의 주인인 아리엘 또한 그러했으리라.

    “그러니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공비님께서는 다시 일어나지 않으실 겁니다.”

    차가운 목소리가 덤덤하게 그녀의 부고를 전했다. 고저 없는 목소리와 달리 속은 난장이었다.

    사고의 연쇄가 오필리아의 죽음을 뚜렷하게 만들수록 알레한드로는 고통스러워졌다.

    그는 죽음을 부정하는 이안을 두고 마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결국 속을 게워 내고 말았다.

    오필리아를 홀로 죽게 내버려 뒀다는 생각에 구역질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붕괴는 이안의 것처럼 요란하지 않았으나, 균열을 숨길 수도 없었다.

    눈을 뜨고 있되 뜨고 있는 것이 아니었고, 공허와 어둠이 침잠하는 시각에는 하염없이 눈물을 쏟기도 했다.

    죽을 수 없어 흘러가기만 하는 시간. 돌이킬 수 없이 망가졌음을 깨달아도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조건식 마법을 풀 수 있는 것은 당사자뿐이니까.

    오필리아의 머릿속이라도 뒤져 보지 않는다면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잠깐.’

    그리고 생각이 그에 이르렀을 때, 알레한드로는 불현듯 특이점을 찾아냈다.

    아리엘의 비늘에 대해서.

    오필리아가 아리엘의 비늘을 삼키고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상태가 되었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그렇다면 왜 아리엘의 비늘은 오필리아를 그렇게 만들었는가?

    ‘아리엘은 오필리아를 원망하며 죽은 게 아니었던가?’

    그랬더라면 오필리아를 저렇게 만들 것 없이 바로 죽게 할 수도 있지 않았나? 왜 단지 깊은 잠이었던 걸까. 왜 하필…….

    ‘……만약 아리엘이 바랐던 게 오필리아의 죽음이 아니었더라면?’

    알레한드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성큼성큼 책장으로 걸어가 책을 몇 권 꺼내자, 그 사이에 숨겨 둔 편지가 나왔다.

    보존 마법이 아니었더라면 진즉 손대기도 힘들 만큼 부식되었을 게 분명한, 아리엘의 편지.

    사실 알레한드로는 이 편지를 그리 주의 깊게 읽지 않았다.

    그가 아리엘과 딱히 깊은 관계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다리를 만들어 주는 거래를 했을 뿐이었으니.

    편지에서 중요한 건 로넨에 마탑 출신 마법사가 있다는 사실이었지, 그녀가 전한 말들이 아니었던 탓이다.

    그러나 이는 그녀의 유언장과도 같은 물건이었기에, 아리엘의 유언을 받은 이로서 예의상 보존 마법까지 걸어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편지에는 아리엘이 거칠게 지운 문장이 있었다.

    「내가 어떻게 이안을 찌를 수 있겠어요? 내가 누군가를 찔러야 한다면 그건…….」

    문장의 뒷부분이 잉크로 거칠게 뒤덮여 있었다. 마찬가지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부분이다.

    알레한드로는 마법으로 아리엘이 문장을 지우기 위해 뒤덮은 잉크를 걷어 냈다.

    그러자 문장이 완성되었다.

    「내가 누군가를 찔러야 한다면 그건 오직 내가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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