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화
그것은 마탑에서의 기억이었다. 마탑의 주인으로서 익숙한 옷을 입고, 익숙한 낯의 부하에게 소식을 전해 듣던.
알레이의 세상이 무너졌던 날의 기억.
* * *
알레한드로 디아뮈드, 지고한 마탑의 주인은 제 귀를 의심했다.
잠시 세이렌들에게 다녀온다던 메르시아가 가져온 소식이 하도 얼토당토않았던 탓이다.
로넨의 공비가 식물인간 상태라니?
“메르시아, 자네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닌가? 로넨의 공비라면,”
“오필리아 밀레세트 로넨. 맞습니다. 쓰러진 이유조차 불명이라 도움을 요청하는 연락이 왔군요. 사람을 보내 달라고 합니다.”
“……그게 로넨에서 온 연락이 맞다고?”
“세이렌이 멍청하긴 해도 지명을 까먹을 정도는 아니니까요. 아마 맞을 겁니다.”
메르시아는 그렇게 말하며 편지를 내밀었다.
로넨의 인장이 찍혀 있는 편지에는 로넨의 공비가 수일 째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와 함께 실력 좋은 이들을 충원해 주었으면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예니트가 아는 체를 했다.
“로넨 공비라면 그 붉은 머리 공주님 아닙니까?”
“아, 그러고 보니 예니트 당신은 만나 본 적이 있겠군요.”
“만나다 뿐이겠습니까. 알레한드로 님과 제법 막역히 지내시던데요.”
그녀는 알레한드로가 귀환하며 그의 보좌로 함께 복직한 참이었다.
더불어 알레한드로가 로넨에서 지낼 때의 일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 공비님이 그렇게 쓰러질 분으로는 안 보였는데, 사고라도 당했답니까?”
“글쎄요. 쓰러진 영문을 모르니 마법사까지 찾는 거 아니겠어요? 기왕 로넨으로 사람을 보내야 하는 거면 예니트가 다녀와도 괜찮겠군요.”
메르시아는 그렇게 말하며 적당히 상급 마법사 몇을 뽑아 함께 보내자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잠자코 듣고 있던 알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다녀오지.”
“알레한드로 님께서 직접 말씀이십니까?”
“아는 사람의 일이니까. 소식이 사실인지도 확인해야겠고.”
어차피 로넨까지는 마법진이 있어 오가는 게 얼마 걸리지도 않으니 다녀오겠다며, 알레한드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필리아의 소식을 듣고 불안함에 도저히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었던 탓이다.
당시 알레한드로는 메르시아의 이야기를 부정하고 있었다.
오필리아가 쓰러졌다는 이야기가 거짓일 거라고. 뭔가 착오가 있었을 거라.
그렇잖아도 알레한드로는 내심 로넨에 두고 온 오필리아를 걱정하고 있었다.
마지막에 헤어지는 순간까지도 오필리아는 떠나는 자신을 붙잡고 싶은 낯으로 보고 있었으니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도 됩니다, 오필리아.
-마탑의 주인을 그렇게 불러도 되겠어요? 마음만 받을게요. 별일도 없을 텐데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상대가 건넨 세이렌의 깃털을 쉽게 놓지 못하고 있었다.
공연한 부름이 메아리처럼 몇 번 그들 사이를 오고 갔다. 마치 하고 싶은 말이 있되 꺼내지 못하는 것처럼.
그것이 살려 달라는 부름이었을까. 알레이는 확신할 수 없었다. 오필리아 쪽에서 먼저 알레한드로에게 선을 그었기에 더욱.
오필리아는 알레한드로가 기억을 찾은 이후로 내내 그렇게 그를 대했다.
그의 곁에 있으면 겨우 볕을 맞은 표정이 되면서, 그 쨍한 날씨가 버거워서 견딜 수가 없다는 투로.
이유는 알레한드로에게도 빤히 보였다.
‘아리엘의 편지를 읽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이, 알레한드로가 차마 오필리아를 붙잡을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알레한드로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오필리아는 그가 내내 가지고 있던 아리엘의 편지를 발견했다.
알레한드로가 제 기억을 찾기 위해 인어와 거래한 마지막 흔적을.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했다. 잠시 예니트의 방에 들렀다가 돌아갔을 때, 닫았을 게 분명한 문틈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문을 열었을 때는 빛이 바랜 편지를 들고서 울고 있는 오필리아가 있었다.
-……오필리아.
호명에 자신을 보는 벽안이 시리도록 푸르렀다. 눈물로 젖은 눈동자가 보석처럼 반짝이는 것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언제나 호의로 가득했던 눈동자는 빛이 꺼져 있었다.
그 시선과 눈이 마주친 순간 알레한드로는 제 안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철렁하는 심정이 들었다. 정확히 무엇이 그토록 두려웠을까.
오필리아가 겪은 비극의 저편에 무슨 이야기가 있는지 다 알면서도 함구했다는 사실이? 그녀가 비극을 맞게 된 배경에 제가 한 몫 기여했다는 것이?
어쩌면 전부 다였으리라. 알레한드로는 그 순간 기만의 그림자를 벗을 수 없었다.
그리고 오필리아는 그녀를 기만한 사람을 결코 곁에 두지 않으리라.
생각이 그에 닿자 철렁하는 심정에 저도 모르게 한 발짝을 다가갔다.
오필리아는 미동도 없이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가시지 않은 약간의 원망이 남아 있을 뿐.
허무가 뒤섞인 오필리아의 시선이 말해 주었다. 그가 이미 그녀에게서 타인이 되었노라고.
어떻게든 만회하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뇌리가 멋대로 엎지른 물을 주워 담을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는 시간을 돌리는 법을 생각했다.
그러나 차마 그러지 못한 것은, 오필리아의 실망을 더 사게 될 것이 두려워진 탓이다.
완벽히 무정했더라면 차라리 편했을 텐데.
-오늘은 내가 잘못 찾아온 것 같네요. 다음에 보죠.
알레한드로가 머뭇대는 사이 오필리아는 그를 두고 가 버렸다.
만약 로넨 성이 그렇게 차가운 곳이 아니었더라면 알레한드로는 다시 오필리아의 낯을 볼 수도 없었으리라.
그러니 로넨 성이 오필리아에게 비정한 장소라는 사실은, 그녀의 비극에 빌붙은 한 가지 행운이었다.
그날을 기점으로 알레한드로가 제 기억을 되찾았다는 사실도.
그러나 어그러진 관계는, 그리고 감정은 돌이킬 수가 없다.
‘마탑으로 돌아가면 이 마음도 정리가 될까 싶었건만.’
결과는 이 모양이다. 게다가 두고 온 오필리아의 비보까지. 불길함이 알레이의 등골을 타고 올랐다.
정리하지 못한 불온한 감정들이 요란하게 속을 굴러다녔다.
다른 사람의 사랑은 낭만으로 포장할 수 있어도, 단 하나 알레이의 사랑만큼은 그럴 수 없었던 탓이다.
어떻게 사랑하게 되어도 이미 연인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건지.
만약 오필리아가 먼저 도와달라, 혹은 마탑으로 데려가 달라는 말을 꺼냈더라면 알레이는 지체 없이 그녀를 이 바다 한가운데의 탑에 숨겼을 것이다.
밀레세트의 황녀이자 로넨의 공비를 납치하는 셈이니 메이너드 대륙에서 가만있지 않을 게 뻔하지만, 어차피 마탑 밖의 일이다.
아둔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알레이는 오필리아를 위해 눈을 감고 귀를 닫을 수 있었다.
전쟁을 해야 한다면 그는 불사할 수 있었다.
만약 오필리아가 그의 손을 잡았더라면.
‘그럴 일은 없겠지.’
로넨으로 향하는 그 길지 않은 시간 내내 알레한드로는 불안에 시달렸다.
제 손을 잡지 않아도 괜찮으니 행복하게 지낼 수 있기를 바랐다.
마탑에 갇혀 지내는 것보다는 밀레세트의 황녀와 로넨의 공비라는 그럴싸한 직함으로 사는 것이 그녀에게도 나을 테니까.
감히 제가 쳐다볼 수 있는 나무가 아니었기에 감히 욕심내지도 않았다.
라딘에서, 그리고 로넨에서 막역하게 웃고 떠든 날들이 있다고 해도 오필리아는 황녀였고, 공비였다.
애초에 오필리아가 신분 격차를 눈 감아 주지 않았더라면 시작하지도 못했을 관계.
오필리아의 이름을 허락 하에 부르며 홀로 위안을 삼는.
알레한드로 멋대로 애틋하게 굴었던 관계다.
‘그러니 제발 무사하기를.’
제가 더는 선 안의 사람이 아니어도 좋으니. 제 손을 잡지 않아도, 다시 얼굴 보고 싶지 않다고 해도 좋으니 부디 무사하길 빌었다.
그러나 현실은 기대보다 잔인한 법이다.
알레한드로는 로넨 성에 도착했을 때, 글자 그대로 침대에 누워 미동 한 번 없는 오필리아를 마주해야 했다.
그의 안에서 부서지는 것들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침상 앞에 무릎을 꿇은 채였다.
“……오필리아.”
호명에 뒤늦은 회한이 몰려들었다.
그녀를 두고 간 자신의 오판에 대해서. 그리고 오필리아의 비극에 빌붙어 눈 감았던 지난 시간들에 대해.
방종했던 모든 과거가 칼날로 변해 알레한드로의 목을 겨누었다. 그렇게 그의 세계는 붕괴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