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화
지금 제가 무엇을 들은 거지?
인지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감각이 앞서 들었으나, 알레이는 능숙하게 제 귀를 의심했다.
절벽 위의 유난히 세찬 바람이, 그리고 길어진 화마가 만들어 낸 소음들이 목소리를 교란시킬 법도 했으니 그의 의심은 정당했다.
하지만 꼭 외부의 소음이 아니더라도 알레이에게는 이안의 말을 신뢰할 이유가 없었다.
하여 그는 이안의 말에 상대와 같은 표정을 짓는 대신, 인상을 찌푸리며 절벽으로 다가섰다.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군. 거기 그렇게 서 있을 거면 비키지 그럽니까. 오필리아가 간 곳을 알려 주면 더 좋고.”
“……내가 이 끔찍한 말을 반복해야 하나?”
이안의 대답은 갈수록 가관이었다. 알레이는 거의 짜증을 내다시피 인상을 쓴 채 되받아쳤다.
“그럼 내가 그 끔찍한 말을 믿어야 한다는 겁니까?”
절벽 쪽으로 다가섰던 알레이가 걸음을 돌려 이안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늘 반듯하던 낯은 선명한 노기로 잔뜩 일그러진 채였다.
“날 속이려고 한다 쳐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습니까? 당신 오필리아를 사랑한다면서?”
“…….”
“당신이 오필리아가 간 곳을 숨긴다고, 콜록, 내가 찾지 못할 것 같습니까? 됐습니다. 당신에게 물은 내가 머저리지.”
경멀 어린 눈빛을 이안에게 던진 알레이가 그를 휙 스쳐 지나갔다.
기껏 쫓아와서 찾고자 했던 오필리아는 찾지도 못하고 저딴 말이나 들었더니 기분이 더러웠다.
‘오필리아가 어떤 사람인데 그따위 말을 해?’
정말, 기분이 더러웠다.
오필리아가 정말로 죽음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랬다.
황궁의 발코니에서 떨어졌던 그녀를 제가 받아 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걸핏하면 죽음을 타성으로 읊던 모습이 떠올라 미치겠는데, 저 저열한 인간은 이런 상황에서까지 저런 말을 하고 싶을까.
‘……됐다.’
말마따나, 물은 제가 멍청한 놈이다. 오필리아가 쉽게 죽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그 누구보다 제가 가장 잘 알았다.
그녀는 마탑의 마법사들조차 어려워하는 세이렌을 제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아셀로를 감옥으로 보내고, 임시 신전에 오면서 그녀가 정말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이 일대에 불을 낸 것도 오필리아의 소행이라는데.
이 불 속에서 가장 죽음으로부터 거리가 먼 것은 단연 오필리아였다.
‘하지만 죽음과 가장 가까운 것도 오필리아지…….’
알레이는 무심코 그런 생각을 했다가, 거세게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 버렸다.
괜히 저런 말을 들었더니 생각이 나쁜 쪽으로 튀는 모양이었다. 불안에 심장이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빨리 오필리아를 찾아 이 불안을 해소하고 싶었다.
‘이 방법은 내상이 심해질 것 같아 쓰지 않으려 했는데.’
알레이는 사실 이 자리에서도 오필리아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다.
간단하다. 이 숲 일대 전부에 탐지 마법을 걸어 오필리아를 찾아내면 되니까.
오필리아가 반지를 끼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녀 특유의 이질적인 마력을 통해 찾아내는 것이 조금 더 쉬웠겠지만, 알레이의 마력이라면 얼마든지 일일이 뒤져 찾아내는 소모적인 방법도 가능했다.
단지 어디까지나 그것은 알레이의 상태가 멀쩡했을 때의 이야기였고, 지금처럼 한 군데 망가진 상황에서 이 넓은 일대를 다 뒤지겠다는 방식은 미친 짓이었다.
그러나 알레이의 이성은 이미 흐려질대로 흐려져 있었다.
아니, 그보다는 알레이가 이 끔찍한 불안을 더는 견딜 자신이 없었다고 하는 쪽이 옳을 것이다.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불길함이 손 안에 땀을 쥐게 하는 통에 호흡이 자꾸만 거칠어졌다.
거기다 저런 정신 나간 헛소리까지 들은 탓에 불안이 가중되어, 무엇이라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알레이는 몸 상태를 무시하고 곧장 숲 쪽으로 탐지 마법을 펼쳤다.
마력으로 짜인 그물이 알레이를 중심으로 조금씩 뻗어 나가, 아직도 열기가 남은 숲을 스멀스멀 덮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화마가 닿지 않은 곳을 아무리 뒤져도 오필리아는 보이지 않았다.
하물며 실로와 딜로, 아셀로가 옥신각신하며 서로 이쪽으로 바람을 부네 저쪽으로 바람을 부네 하는 모습까지 보았는데도, 오필리아는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마력으로 만들어진 그물이 넓게 퍼져 갈수록 알레이의 불안이 혀뿌리를 좀먹기 시작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대체 어딨는 거지?’
불이 닿지 않은 곳, 불이 스쳐간 곳, 그리고 아직 타오르는 곳을 넘어 이제는 인적이 사라진 임시 신전까지.
인근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모든 곳을 뒤졌는데도 오필리아는 없었다.
알레이의 불안을 타고 마력 그물은 줄어들 기미 없이 팽창했다.
마침내 알레이가 피를 토할 때까지.
“쿨럭!”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망가진 몸이 피를 왈칵 토해 냈다.
배를 걷어차인 꼴로 상체를 숙인 알레이가 발작적인 기침을 하며 몇 걸음 물러섰다.
“이게, 왜, 쿨럭, 쿨럭!”
물러서는 걸음 역시 온전하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비틀거리던 몸은 결국 균형을 잃고 허물어졌다.
잠깐 이성을 놓은 대가는 컸다. 거대한 마력을 견디지 못한 몸의 내상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알레이에게는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피까지 토해가며 마법을 썼는데, 결국 오필리아를 찾지 못했으므로.
애써 외면하던 불온한 직감이 알레이의 뒷덜미를 붙들었다. 형용할 수 없는 무력감과 절망이 발끝을 좀먹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도 알레이는 굳건히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아닐 터다. 아닐 것이다. 오필리아가.
“오필리아가 그럴 리 없다고?”
그리고 그 끝에는 같은 처지의 허물이 돌아와 말을 받았다.
알레이는 낚싯줄에 채인 생선처럼 머리를 쳐들었다.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지고 있던 눈물이 뺨을 적셨다. 그제야 알레이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 마주한 낯이 제 낯과 꼭 같은 모양새일 거라는 사실도.
보기 좋은 음영을 베일처럼 두르고 있던 반듯한 눈매는 퀭하니 검게 변해 있었고, 빛을 잃은 낯은 당장이라도 부스러질 것처럼 건조한 모양새.
절망이라는 글자에 곧이곧대로 매몰된 모습으로, 닮은 몰골을 내려다보던 이안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그로부터 흘러나온 목소리 역시 건조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모르는 척하는 건지, 아니면 모르고 싶은 건지 모르겠군.”
“쓸데없는 소리를 할 거라면,”
“네 육신을 쪼갠 뒤에야 알고 싶은 거라면 나도 더 말하지 않겠다.”
그제야 알레이는 이안의 낯에 물든 비탄이 결코 꾸며 낼 수 없는 종류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을 속이려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오필리아는 죽었다. 내 눈앞에서, ……절벽으로 투신했어.”
이안이 재차 못을 박았다.
오필리아의 죽음을 읊는 목소리는 사신의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또한 제 심장을 짓찧는 것처럼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렇게 제 살을 저며 하는 말이 거짓일 리 없다. 알레이의 절망이 느리게 찾아들었다.
밀물을 맞은 해변이 느리게 수면을 올리듯, 서산에 걸린 해가 밤을 끌어당기듯.
시야가 흐려졌다.
어두운 밤에 더 흐릴 눈이 있었나 싶다가도, 뺨을 적시는 뜨끈한 액체에 제가 속절없이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알레이는 스스로를 잘 알았다.
만약 이안이 말한 오필리아의 죽음이 다른 방식이었더라면 자신은 이토록 허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투신이었기에 그는 반항할 길 없이 비탄에 잡아먹혀야 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오필리아가 선택한 길이었으니까.
차라리 타살이었더라면 분노했을 텐데, 사고사였더라면 우연을 탓했을 텐데.
알레이는 오필리아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을 기억했다.
계획이 실패하면 제게 남는 것은 죽음뿐이라는 말.
이 절벽 위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가늠할 수는 없으나, 오필리아는 결국 삶의 끝까지 떠밀려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그제야 아셀로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어.
-오필리아가 너를 자기랑 아예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대.
오필리아는 처음부터 이걸 염두에 두고 알레이를 놓아준 것이다.
혹여 그녀가 죽더라도 알레이가 그녀의 죽음에 너무 매이지 않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