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화
새로 얻은 생에서도 사람이 없다면 살 수 없다니 불우하기 짝이 없다.
아마 오필리아가, 그리고 이안이 살아 있다면 어떤 말을 해도 그들의 추격은 반복될 터였다.
오필리아는 그게 지겨웠다. 이안이 자신을 쫓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해하면서도, 그를 받아들일 생각은 조금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미 그녀는 독 안에 든 쥐였다. 뒤는 절벽, 앞은 이안. 제대로 도망치지 못한 데다 퇴로도 막혔다.
살기 위해 이대로 이안의 손을 잡는다면 결코 놓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오필리아는 직감했다.
이안은 오필리아를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를 써서든 알레이가 그녀를 찾아오지 못하게 할 테니까.
결국 이 방법뿐이다.
오필리아는 고삐를 손에서 놓았다. 말에서 내리기 위해 발을 건 등자에서도 발을 빼냈다.
그 행동을 제게 돌아오려는 것으로 생각한 이안의 낯이 희미하게나마 밝아진 순간.
“우리 여기서 그만 끝을 내죠.”
그렇게 선언한 오필리아가 뒤로 몸을 기울였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절벽 너머 어둠 속으로.
붉은 머리칼이 바람을 맞은 단풍처럼 길게 나부끼고, 이안이 이성을 잃고 고함을 치는 것이 들렸다.
문득 이번 생의 시작이 떠올랐다. 시간을 돌아왔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꿈이라 착각해 연회장에서 투신했던 때가.
당신과의 작별은 늘 이런 식이구나. 이런 식으로만 끝을 볼 수 있는 관계는 필히 악연이리라.
악연을 사랑했으니 비극도 필연이겠지.
오필리아는 눈을 감았다. 끝을 예견하기라도 하듯 추락은 늘 평온했다.
* * *
알레이는 빠르게 숲을 지났다.
세이렌이 알려 준 방향을 따라가며, 간간이 말이 지나간 흔적을 짚어 길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버티기 힘들 만큼 망가져 가는 몸만 아니었더라면 말이다.
“콜록, 콜록!”
이제는 익숙해진 기침과 함께 마찬가지로 익숙해진 마력이 역류하는 감각이 알레이를 덮쳤다.
이성이 끊어질 만큼 고통스러웠으나, 정말로 여기서 이성을 놓는다면 마력이 거세게 역류해 속을 죄 망가뜨려 놓을 것을 알기에 이를 악물고 버틸 수밖에 없었다.
마법을 사용할 때 마법식을 구성하는 것은 마법사의 신체다.
혈관은 마력이 흐르는 통로가 되고, 사지는 각각의 수식을 지탱하며 마법식을 구현한다.
신체 자체가 회로인 셈이다.
그런데 내상을 입으면 이 회로 중 한 군데가 망가지니, 자연스럽게 마력이 역류하거나 회로를 망가뜨리는 등 문제가 생길 수밖에.
이런 방법을 쓰지 않는 경우는 오직 하나, 좌표를 기입해야 하는 이동 마법진을 사용하는 경우뿐이었다.
그러니 바꾸어 말하자면 신체를 마법식을 구성하는 요소로 쓰지 않으려면 그에 준하는 크기의 식을 매번 그려 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럴 시간은 없다.’
애석하게도 알레이에게 주어진 시간은 넉넉하지 않았다.
때문에 알레이는 내상이 매번 문제를 일으키려는 것을 애써 붙잡아 가며 마법을 쓰는 중이었지만, 한계가 임박해 오고 있었다.
마력의 발작이 잦아들고 숲 일대에 탐지 마법을 걸자, 일순 머리가 핑 돌며 코 밑이 뜨끈해졌다.
‘이젠 코피까지.’
너무 무리했나. 알레이는 손수건으로 피를 닦아 내며 인상을 썼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점은 불길이 많이 잦아들어 연기를 차단하는 데에 마력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부분이었다.
여러 개의 마법을 동시에 구현할수록 몸에 무리가 가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니까.
그리고 다른 한 개의 희소식은 탐지 마법이 없이도 말이 지나간 흔적을 따라갈 수 있을 만큼 추적이 손 쉬워졌다는 부분이었다.
‘흔적이 선명하다는 건 지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증거이니까.’
오필리아를 찾는다는 목적에도 거의 가까워졌다는 뜻으로 볼 수 있었다.
알레이는 쓰러진 나무에서 손을 뗐다.
그나마 타지 않은 밑동은 멀쩡했으나 나무 기둥의 중간부터 타 버렸던 탓에 균형을 잃고 쓰러진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나무가 쓰러진 반대 방향으로 말이 지나간 길이 나 있었다.
알레이는 지체 없이 걸음을 옮겼다. 걸음에는 주저가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가 향해야 할 길이 분명했으므로.
숲을 헤매는데도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이는 듯한 기분이 드니 이상한 일이다.
문득 처음 기억을 잃고 숲에 떨어졌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밤이었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높다란 나무들 사이,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은 채로 미성숙한 새들이 날개 연습을 하듯 마구잡이로 날아올랐던 그때.
중급 이상 마법에서는 그나마 손 쉽다고 여겨지는 비행조차 그때는 다루는 게 서툴렀다.
아마 모든 것을 깡그리 잊어버린 머리가 손에 익은 마법조차 낯설게 받아들인 까닭이 아닐까.
아무리 우리가 사지를 쓰는 게 자연스럽다고는 해도 모든 걸 잊어버리면 같은 쪽 팔다리가 같이 나갈 수밖에 없듯 말이다.
덕분에 알레이는 휘청거리며 나무를 제쳐야 했다.
몇 번이나 땅에 제대로 내려앉지 못해 굴러 떨어지는 것은 덤이었다.
몇 차례를 그렇게 겪고 나자 알레이의 몸은 마법이 익숙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다음부터는 쉬웠던 것 같다.
지독한 미지에 대한 공포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알레이의 걸음을 재촉했다는 것만 빼놓는다면 말이다.
알레이는 여전히 그때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당시 느꼈던 공포만큼은 생생하게 그의 안에 남아 있었다.
대체 무엇이 그렇게 두려웠던 걸까.
이 빽빽한 나무들이 가리고 있는 진실이 두려웠을까, 아니면 백치나 다름없는 제 상태가 막연히 두려웠을까.
알레이는 여태껏 후자일 거라고 판단해 왔으나, 더 이상 나무가 시야를 방해하지 않는 곳에 도착하자 그는 자신의 판단을 더는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
탁 트인 지형의 끝, 안장이 비어 있는 두 마리 말이 보였다. 그리고 말의 수와 맞지 않는 사람의 모습도.
한 번 꿇어앉는 것만으로도 무릎을 갈아 낼 수 있을 것처럼 날카로운 절벽 위에 제법 익숙한 실루엣의 남자가 엎드려 있었다.
“……안 돼, 제발, 오필리아…….”
그것도 아주 익숙한 이름을 부르면서.
때로는 망각이 안온함을 주기도 하는 바, 알레이는 자신이 몹시 두려운 진실에 직면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수가 맞지 않는 짐승과 지평선 앞에서 뚝 끊어진 땅덩이가 단절을 연상 짓게 했다.
불길함이 엄습했다. 알레이는 누군가에게 떠밀리다시피 한 걸음으로 튕겨 앞으로 나갔다.
엎드려 있던 이가 제 기억 속 이가 맞는지 확인했다.
흑발과 은안. 기억과 다른 것은 늘 광기에 절어 있던 그가 비탄에 물들어 있다는 것뿐.
그는 오열하고 있었다. 알레이가 익히 아는 누군가에게 안 된다고, 제발 돌아오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그러나 이안이 평소 오필리아에게 하는 말 또한 그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기에, 알레이는 애써 불길함을 억누르고 입을 열었다.
“로넨 대공.”
호명한 순간 작자의 눈에 광기가 다시 서리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평소와는 여전히 달랐다.
평상시 그가 품고 있는 광기가 누구 한 명이라도 당장 찌르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것 같은 모양새였다면, 그것은 이제 제 목을 조르는 어리석은 이의 광기였다.
금속을 손톱으로 긁어내리는 듯한 쉰 목소리가 호명에 답했다.
“……알레한드로 디아뮈드.”
“알아볼 정도의 정신은 있는 모양이군요.”
“네가…… 네가 여길 어떻게 왔지?”
“내가 오면 안 될 곳이라도 됩니까? 오필리아를 찾아 왔습니다. 이쪽으로 갔다기에요.”
쫓는 자가 있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이안이었던 모양인지. 괜히 신전 쪽 사람에게 추격당하는 것보다는 나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상황이 그렇게까지 나쁠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까지 불길한 기분이 드는 걸까.
알레이는 목 안쪽과 혀뿌리를 자꾸만 경직되게 만드는 긴장을 털어 내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당신은 여기서 뭘 하는 겁니까? 오필리아는 어디 있습니까? 당신이 쫓고 있던 것 맞죠?”
“그래. 내가…….”
이안의 말문이 다시 막혔다. 그의 광기가 다시 스스로의 목을 조르며 울음을 토해 내게 만든 까닭이었다.
그제야 알레이는 자신이 느끼는 이 부자연스러운 불길함의 원인을 깨달았다.
이안 때문이었다. 이안이 자꾸 저렇게 죽어가는 소리를 내 대니 불길하지 않을 수가 있나.
알레이는 볼썽사납게 울고 있는 사내에게서 한 발짝 떨어지며 인상을 썼다.
“그만 울고 오필리아가 어디 있는지나 말씀하시죠. 당신과 지체할 시간 없으니 말입니다.”
핀잔에 눈물 흘리던 사내가 다시 낯을 들었다. 그 잠깐 사이 퀭하니 죽어 버린 낯이 어둠을 먹어 망자의 것처럼 보였다.
그가 꼭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필리아는,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