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0화
우지끈.
오필리아의 앞으로 거대한 나무가 불에 타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이 일대를 망가뜨린 방화범은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추며 녹빛의 무질서를 고요히 돌아보았다.
한때 장엄한 마력으로 오필리아를 전율하게 했던 청록색 숲이 불타고 있었다.
숲은 인적이 드물었던 만큼 가지고 있던 마력 또한 많았으며, 덕분에 루헤일의 불꽃의 먹이로는 최상이었다.
화륵, 타오르는 불꽃과 함께 열을 품은 기류가 솟구쳐 오필리아의 붉은 머리칼을 흩뜨렸다.
이질적인 녹빛의 불꽃과 상반된 붉은색은 어둠 속에서도 선명했다.
‘이렇게까지 크게 태울 생각은 없었는데.’
긴장감이 오필리아의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이 거대한 화마의 시작은 늘 그렇듯 하나의 불씨로부터 시작했다.
조금 전, 오필리아가 어린 세이렌들과 다시 조우했을 때.
그녀는 가장 먼저 명령했다.
“실로, 바람을 불어.”
“얼마나 세게?”
“오필리아, 잠깐-!”
“저 남자가 내게 다가오지 못할 만큼 세게.”
오필리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쐐액 바람이 매섭게 갈리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듣는다면 석궁을 쏜 것은 아닐지 의아해 할 만큼.
실로의 날개가 일으킨 돌풍이 이안을 덮치고, 신전의 회랑을 장식하던 물건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크윽!”
나무마저 땅에 기댈 만큼 강력한 바람이 임시 신전을 덮쳤지만, 오필리아는 멀쩡했다.
그녀가 서 있는 곳은 말하자면 태풍의 눈으로, 바람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공간이었으니까.
실로가 가열 차게 바람을 불어 대자, 이안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기둥을 붙들고 버텨야 했다.
그 모습이 퍽 즐거워 보였던지, 손가락만 빨던 딜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필리아, 나는 뭐 할 거 없어?”
“심심하니?”
오필리아가 픽 웃으며 대답했다. 할 일이라면 얼마든지 줄 수 있었으니, 딜로의 걱정은 쓸데없는 기우였다.
또각, 또각. 몇 걸음 걸어간 오필리아가 조금 전 이안에게 내던진 로브를 주워 들었다.
종종 따라온 딜로가 다시 고개를 기울였다.
“그거 입으려고? 걸칠 것도 없어 보이는데.”
딜로의 말마따나 로브는 반쯤 타들어 간 탓에 다시 입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오필리아는 태연했다.
“상관없어. 다시 입으려고 하는 게 아니니까.”
“그럼?”
오필리아는 대답 대신 타 버린 로브를 딜로의 손에 쥐여 주고는, 녹색 불꽃이 타오르는 화로를 가리켰다.
“지금부터 불을 낼 거야.”
오필리아의 말에 딜로의 눈이 반짝였다.
“얼마나?”
“아주 크게. 이 신전을 전부 태울 만큼.”
마침 사람도 전부 빠져나갔겠다, 지금이 적기다.
알레이와 예니트가 지하에 갇혀 있지만 그건 아셀로를 보냈으니 어련히 잘 빠져나올 수 있을 테고.
설령 아셀로를 만나지 못하더라도 알레이는 당장이라도 사슬을 끊고 나올 재능이 있었다.
‘지금이라면 빠져나오더라도 탓할 수 없겠지.’
처음에는 손을 태워서 베일란에게 죄를 뒤집어씌울까 싶었는데, 차라리 이 편이 낫겠다.
주교가 관리해야 할 루헤일의 불꽃이 사방으로 번져 임시 신전을 모조리 태워 버렸다고 한다면 베일란은 분명 문책을 피하지 못할 테니 말이다.
제 손이 다치는 것보다 목격자도 많을 테니 베일란과 죄목을 가지고 협상하자면 이쪽이 더 좋을 것 같았다.
‘이렇게 하면 계획하던 것도 한 번 시도해 볼 수 있을 것 같고…….’
머릿속으로 계획을 어림하는 오필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가, 천천히 돌아왔다.
고민은 끝났다.
“마음껏 놀아, 세이렌.”
* * *
그 말을 신호로 실로와 딜로는 기다렸다는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로브에 불을 옮겨 붙이고, 주변 곳곳에 불을 능숙하게 지르는 모습은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증명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름 적임자를 찾은 셈이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이안을 제압하던 실로가 불을 지르는 데 합류하며 이안이 자유로워졌다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그는 눈앞에서 목도한 방화범을 놓아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필리아! 기다려!”
그러나 기다리라고 기다릴 셈이었다면 이런 일을 저지르지도 않았으리라.
이안이 정신을 차리고 오필리아를 잡으러 다가올 즈음, 오필리아는 이미 마구간에서 말을 꺼내와 능숙하게 올라앉은 뒤였다.
밀레세트의 황족에게 기마술은 필수라는 말이 붙지도 않는, 포크 사용법을 익히듯 정말 기본적인 교양이었으니까.
게다가 그녀가 익힌 것은 두 다리를 한쪽으로 모아 앉는 승마도 아니었다.
투레질을 하는 말을 달래 가며 속도를 올린 오필리아가 빠르게 나무 사이를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말을 타본 지가 꽤 되어서 걱정했는데.’
몇 번 삐걱이던 몸은 박자를 찾자 말 위에서 부드럽게 안정을 찾았다.
로브를 잃은 어깨에 더운 바람이 날카롭게 스쳤다. 살짝 인상을 쓴 오필리아가 세이렌들이 있을 창공을 흘끔 바라보았다.
‘마음껏 놀라고 했더니.’
세이렌들이 무슨 파티를 벌이는 건지는 몰라도 여기까지 열기가 미치는 걸 보면 불이 적잖이 번진 모양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제가 직접 상황을 조율하고 싶었지만, 오필리아가 세이렌을 다루며 느낀 것이 하나 있다면 이미 한창 즐기고 있는 세이렌을 통제하는 방법은 무력행사뿐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추격자도 따라붙은 상태였다.
이안은 지치지도 않는지, 어느새 말에 올라 매섭게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아무리 승마를 배웠다 한들 나가 싸우는 게 일인 이안을 오필리아가 기마로 이긴다는 것은 강아지가 늑대를 이긴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말이다.
그녀는 정면으로 속도전을 하는 대신 이리저리 궤도를 꺾었다.
불길이 가까워지면 쓰러지기 직전의 나무 밑으로 달려간다거나, 일부러 연기에 몸을 숨겨 추격을 따돌리는 등.
불에 탄 나무가 쓰러진 방금도 그런 행위 중 하나였다. 그리고 오필리아가 시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다.
‘이제 더 나가면 절벽인데.’
청록색 숲은 크고 넓기는 했으나, 임시 신전에서 향하는 폭이 그렇게 길지는 않았다.
오필리아는 이미 제법 많은 거리를 지나왔고, 불길과 추격은 그녀의 발을 점점 옥죄고 있었다.
방금 나무가 쓰러진 것으로 좀 따돌릴 수 있다면 좋았으련만.
말발굽 다그닥 거리는 소리에 오필리아는 혀를 차며 절벽 쪽으로 말을 몰았다.
결국 길었던 추격 끝에 도달한 곳은 다시 절벽이었다.
발에 채인 돌멩이 떨어지는 소리에 지레 놀란 말이 앞발을 들며 길게 울음을 뽑아 냈다.
오필리아가 말의 고삐를 당겨 진정시키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말도 죽을 자리는 알아보는 모양이군. 도망은 다 쳤나?”
“……더 갈 곳도 없어 보이니까, 그런 셈 치죠.”
“어차피 이렇게 될 일이었는데 왜 도망을 친 건지……. 위험하게 끝에 있지 말고 이리 와.”
“당신이야말로 왜 나를 쫓았는지 묻고 싶네요. 우리 이야기는 아까 끝난 게 아니었나요?”
오필리아의 물음에 이안의 낯이 와락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그들 사이에 이제 더는 관계라고 할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던 오필리아의 목소리를 부정하기라도 하듯.
“당신 할 말만 하면 끝인가?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쉽게 놓을 수가 있는 거지?”
“쉽지 않았어요. 지난 시간을 폄하하려는 거라면 그만 돌아가요.”
오필리아가 탄 말이 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투둑, 말발굽에 채인 돌멩이가 가파른 비탈을 굴러 떨어지며 아슬아슬한 소리를 냈다.
그러나 위태롭기는 그녀 앞에 놓인 남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오필리아가 행여라도 자신을 정말 떠날까 두려워 눈이 돌아 버린 상태였다.
“그런 게 아니야. 오필리아, 제발 내가 바뀔 수 있는 기회를 줘. 당신 말대로 당신을 믿지 못해서 그런 문제가 생겼다면 이제는, 믿으면 되잖아.”
이제는 어떤 오해도 없다.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오인할 일 또한 없다.
그러니 비극은 되풀이되지 않을 거라 이안은 애걸했다.
“나는 이제 당신을 잃고는 살 수 없어.”
이렇게 매달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이번 삶에서 그가 향해야 할 지향점은 오로지 오필리아 그녀였기에.
공허 속에 갇히고 싶지 않아 백사를 움켜쥐는 어리석은 이의 몰골이다.
오필리아는 이안을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당신이나 나나 불우한 생이군요, 이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