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화
예니트는 진심으로 말리고 싶다는 표정이었지만, 기억을 되찾기 위해서는 오필리아가 필요하다는 알레이의 거짓말을 신뢰했던지 말을 얹지는 않았다.
“살다 보니 이런 일도 다 겪는군요.”
하는 푸념 같은 말을 한마디 던지고 신전으로 향할 뿐.
알레이는 내키지 않는 듯한 뒷모습이 사라진 뒤에야 다시 연기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그에게도 제법 고역이었다.
‘연기 때문에 탐지 마법을 쓸 수도 없겠고.’
사방은 아수라장에, 기척이 너무 많아서 기척을 마력으로 판별하는 것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예니트와 사제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마법사가 여길 어떻게……!”
“타 죽나 했는데 천장이 무너져서 그 틈으로 기어 나왔습니다. 다 뒤지게 생겼는데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부, 붙잡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일단 불을 꺼야지!”
“산 장작을 자처할 셈 아니면 이 원으로 들어오기나 하시죠. 불은 알레한드로 님께서 어련히 꺼 주실 테니까.”
“뭐? 그게 무슨…….”
웅성대던 소음이 뚝 끊겼다. 예니트가 반발을 들어주지 않고 곧장 순간이동으로 사람들을 옮긴 모양인 건지.
알레이의 시선 끝에 사람들이 모여 있던 공터가 들어찼다.
예니트가 한 번 오갈 때마다 빽빽하게 사람이 들어 있던 공터에는 구멍이 하나씩 생겼다.
만약 저기에 오필리아가 있었다면 예니트가 가장 먼저 빼냈을 것이다.
그러니 다시 말하자면 오필리아는 저기에 없다는 이야기가 되고.
‘저기에 있길 바랐건만.’
오필리아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황녀이니, 분명 위험한 곳에 있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제 오판이었더라면? 오필리아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잠입을 시도했다가 나오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 버린 거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알레이는 온몸에 마법을 두르고 불길을 헤맸다.
“오필리아, 계십니까?”
불이 하필 마법을 잡아먹는 종류였던 탓에 몸에 두른 보호 마법은 유지력이 형편없었다.
만약 알레이처럼 퍼내도 퍼내도 남아도는 마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진즉 마력 고갈에 허덕이며 의식을 잃었으리라.
그러나 알레이의 상태가 멀쩡한 것도 아니었기에, 위기는 생각보다 이르게 찾아왔다.
“오필리아! 거기, 콜록!”
잠시 멎어 들었던 기침이 다시 터지며 피가 역류했다.
그렇잖아도 내상이 깊었던 몸으로 계속 마법을 써 댔으니 당연한 결과이기는 했다.
만약 예니트가 그의 곁에 있었더라면 기겁하며 알레이를 당장 내보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혼자였다.
그를 막을 사람 또한 없다는 뜻이다.
‘오필리아.’
피를 토해 파리해진 낯에 눈빛만이 형형하다. 알레이는 기침과 함께 터진 피를 손수건에 대강 닦고 다시 헤매기 시작했다.
그것은 백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조금만 정신이 멀쩡했더라면 알레이 역시 자신이 하는 것이 제정신 박힌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겠으나, 알레이는 오필리아와 관련된 일에서라면 늘 평소의 이성을 놓치곤 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오필리아가 불길 속에 갇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만 하면 손에 힘이 툭 빠져 버리니 말이다.
고작 사람 하나에 제 삶을 잃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의 모든 것들이 어느새 자신을 사로잡고 있었다.
타오르는 석양을 닮은 머리칼, 벽해를 닮은 눈동자에서 타오르던 청염.
안온한 새벽 공기를 담은 듯한 목소리와, 오직 자신이 필요하다고 말하던 그 순간까지…….
우스운 말이었으나 알레이는 이안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필리아를 놓칠 수 없다고, 그녀에게 광기 어린 집착을 부르짖던 그 낯이 지금 제 것과 크게 다르지도 않을 것 같았다.
보통의 사람이 본인의 존재감으로 제 주변을 메운다면, 오필리아는 그 존재감이 제 안을 메우곤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알레이도, 이안도 텅 빈 인간들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존재가 가까워질수록 자신은 사라지고 그녀만이 선명해져 갔다.
그러나 정작 가까울 때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오필리아를 잃을 즈음에서야 깨닫는 것이다.
그녀가 채우고 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를 잃고는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덕분에 그리 크지도 않은 임시 신전 안을 돌아다니는 알레이의 낯은 걸음걸음마다 절박함이 짙어지고 있었다.
자꾸만 허물어지는 보호 마법 때문에 옷자락이며 머리칼은 끝이 잔뜩 그을려 있었다.
사실 손과 얼굴같이 천에 보호받을 수 없는 곳에도 열이 올라 있었지만, 알레이는 오필리아를 찾는 데 정신이 팔려 미처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신전 어느 곳에서도 오필리아를 찾지 못하고 뒤뜰로 나와야 했을 때.
알레이는 비로소 자신이 어떤 꼴인지 깨달았다.
“……아.”
잔뜩 달궈진 돌 벽을 몇 번이고 짚었던 탓에 손바닥이 넝마짝이었다. 그을릴 대로 그을린 낯 역시 제대로 손대기도 힘들었다.
마법을 써서는 안 되는 몸으로 무리하게 마법을 써댄 탓에 휘청이는 몸 상태는 덤이다.
‘상태가 이렇게까지 나빴나?’
뒤늦게 찾아드는 낭패감에 알레이는 서둘러 제 상태를 수습했다.
그러나 차마 수습할 수 없는 감정도 있었다.
‘오필리아가 여기에도 없다면…….’
설마 이미 잔해에 깔려 돌이킬 수 없어진 건 아닐까. 알레이의 낯에 깊게 물든 비탄이 날을 세울 즈음.
어디선가 소곤대는 소리가 들렸다.
“이만하면 됐겠지?”
“저쪽을 좀 더 태워야 하는 거 아냐?”
“하지만 오필리아가 이 건물만 좀 태우면 된다고 했어. 저기 불 때문에 더 나가지도 않는걸.”
오필리아. 그 이름에 눈이 번쩍 뜨였다. 알레이는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나무 위에서 소곤대는 앳된 청년들이 보였다.
딜로와 실로, 어린 세이렌들. 알레이는 저도 모르게 와락 소리쳐 그들을 불렀다.
“세이렌!”
“뭐야? 우릴 아는 놈이 있어?”
“그 마법사네! 오필리아가 데리고 다니던 놈!”
“그러네! 여기서 뭐하고 있어?”
“그건, 콜록, 내 쪽에서 물을 말이다.”
알레이가 잔기침을 하며 물었다.
“너희 여기서 오필리아를 본 적 있나?”
“물론이지?”
“우린 오필리아가 시킨 일을 하고 있었어!”
“맞아! 재밌어! 이것 봐, 우리가 다 태운 거야!”
세이렌들의 말에 알레이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불을 낸 게 너희라고?”
“아니, 오필리아가 냈어!”
“우리는 바람만 불었어!”
알레이는 그제야 이상할 정도로 넓게 퍼져 있던 불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단순히 해안가라 바람이 많이 불어 불이 번지는 속도도 빠른 거라 생각했는데, 세이렌이 배후에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불을 낸 게 오필리아라고?’
결코 긍정적인 말은 아니었으나, 알레이에게는 더없는 희소식이었다.
불을 낸 게 오필리아라면 그녀가 불에 당했을 확률이 크게 줄어드니까.
“그, 그럼 오필리아가 어디로 갔는지 아나?”
“알지!”
“숲으로 갔어! 저쪽!”
저쪽, 하고 딜로가 청록색 숲을 가리켰다. 이미 반쯤 화마에 잡아먹힌 곳이기도 했다.
오필리아를 신전에서 찾는 것은 그야말로 헛짓거리였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그러나 알레이에게 다가온 것은 허무보다는 안도감이었다. 그는 제 가슴을 한 번 쓸어내리곤 재차 물었다.
“오필리아가 왜 숲으로 간 거지?”
“그거야 우리도 모르지? 우리는 웬 남자가 오필리아를 쫓는 것만 봤어.”
“맞아, 맞아! 아마 불을 질러서가 아닐까? 산테도 우리가 장난을 치면 그렇게 쫓아오는걸!”
“……남자가, 쫓고 있었다고.”
문득 불길함이 엄습했다.
오필리아가 어째서 불을 질렀는지조차 불분명한 상황이기에 더더욱.
“어떻게 생겼는지 혹시 봤나?”
“으음, 잘 모르겠어. 밤인걸.”
“이만큼 본 것도 대단한 거야.”
새들은 밤눈이 어둡다. 알레이는 야맹증 환자들에게 밤길을 물은 제 아둔함을 탓하곤 훌쩍 발길을 돌렸다.
다행히 아직은 당장 쓰러질 만큼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오필리아가 쫓기고 있었다면 확인이 먼저다.
머잖아 숲에서 독수리를 닮은 새 두 마리가 날아오르고, 인적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