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구한 적 없다-98화 (98/118)

제98화

불은 불로 끄는 법.

태울 것을 모조리 다른 쪽에서 잡아먹는다면 저 불도 머잖아 기세를 잃고 허물어질 것이다.

물론 맞불은 쉽지 않은 일이기는 했다. 바람의 영향을 가장 크게 고려해야 했으며, 다른 불을 집어삼킬 만큼 불을 크게 키워야만 성공할 수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지금처럼 사람이 많은 곳에서 맞불을 놓는다는 것은 자칫하단 다같이 타 죽자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부분들은 알레이에게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만전을 기하지 않더라도 그는 혼자서도 이 신전을 뒤덮을 만한 폭풍을 불러올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지금은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는 하다만…….’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어렵다는 뜻은 아니었다.

알레이는 손가락을 몇 번 튕겨 장소를 이동했다. 불길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으나, 근방을 살피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알레이와 함께 있던 예니트가 근처에서 일렁이는 화마를 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불이 적잖이 번져 있군요.”

“이런 곳에서 불이 났으니 당연하겠지.”

임시 신전이 위치한 산은 청록색 숲과도 이어지는 곳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절벽으로 이어지는 커다란 비탈에 숲이 넓게 분포하고, 해안선이 보이는 쪽으로 길을 내기 위해 깎인 벼랑이 하나 있는 지형이었다.

그리고 임시 신전은 벼랑 위 길 쪽에 위치해 있었다. 다시 말해 조금만 눈을 돌리면 청록색 숲이 보인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탓에, 신전을 뒤덮은 불길은 이미 숲까지 번져 있었다.

알레이와 예니트가 선 곳 역시 그 근방이었다. 청록색 숲 바로 위의 창공.

이질적인 밝은 녹빛으로 일렁이는 불길에 잡아먹힌 청록색 숲은, 멀리서 보자면 야광 해파리가 잔뜩 깔린 바다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 정신이 팔려 있을 틈은 없었다. 어느새 제법 회복한 예니트가 염력으로 불길을 막아 보려는 시도를 몇 번 해 보더니 말을 건넸다.

“역시 마법으로는 막을 수가 없네요. 마력을 전부 먹어 버려요.”

“저 불은 마법사에게 대항할 때 쓰는 무기이기도 하니까. 당연하겠지.”

“정말 상극이라는 건 확실하군요. 확실히 괜찮은 겁니까? 자칫하단 숲을 전부 태우겠는데요, 알레한드로 님.”

“걱정이 과하다, 예니트.”

내가 마법으로 네게 미덥지 못한 모습을 보인 기억은 없는 것 같은데 말이지.

알레이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딱, 그의 손끝에서 가벼운 마찰음이 일었다. 그와 동시에 알레이의 손끝에서 붉은 불꽃이 화르륵 피어올랐다.

알레이가 그대로 손을 사선으로 그어 내리자, 그 궤적을 따라 붉은 불이 길게 타올라 숲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알레이는 그에 그치지 않고 몇 번 더 궤적을 그어 불길을 이었다.

온전한 마력으로 이루어진 염력과 다르게 마법이 일으키는 불은 불씨만 마력이 제공할 뿐, 한 번 장작을 집어삼키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마법사의 통제를 벗어난다.

그러니 저 녹색 화마가 예니트의 염력을 집어삼켰듯, 불을 잡아먹을 일이 없는 셈이다.

하지만 이대로 손을 놓고 있는다면 예니트의 말대로 숲 전체를 태우고서야 불이 끝을 볼 게 분명했다.

그래서 알레이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눈을 뜨지 그래, 세이렌.”

“…….”

“회복한 지 오래된 것 정도는 알고 있으니 수작은 그만 부리고.”

“……콜록, 콜록!”

예니트의 로브에 둘둘 말린 새의 부리에서 다소 작위적인 기침이 터지자, 예니트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더니 로브 끄트머리를 잡고 그대로 공중에 로브를 툭 털어 버렸다. 그 속에 든 물건이 떨어지든 말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태도로 말이다.

로브가 바람에 휘날리고, 푸드덕 하고 공기를 거스르는 소리가 났다.

“미쳤어?!”

어느새 반인반수의 모습이 된 아셀로가 두 사람의 앞으로 날개를 퍼덕이며 버럭 화를 냈다.

“깃털 태울 뻔했잖아!”

“그러게 제때 일어났으면 좋았겠지. 태울 일도 없었을 테고.”

예니트의 일갈에 아셀로가 씨근덕댔다.

“그 안이 포근했다고! 그리고 난 저 불 정말 싫어!”

“그걸 없애려고 하는 거니까 적당히 협조해라.”

투정은 더 들어줄 생각이 없다는 듯, 알레이가 적당히 말을 자르며 검지를 세웠다.

“이 방향으로 바람을 일으켜. 불이 더 번지지 않게.”

다른 때였더라면 본인이 했겠으나 안타깝게도 알레이는 내상을 신경 써야 하는 환자였다.

바람을 일으키는 데 특화된 종족이 바로 옆에 있는데 굳이 그가 내상이 악회되는 것을 무릅써야 할 이유 또한 없었다.

그러나 그런 속을 모르는 아셀로는 이미 단단히 모가 나 있었다.

“싫어! 내가 왜! 난 오필리아가 시킨 것만 하면 된다고!”

“무화과를 좋아한다고 했던가? 이 숲에서 무화과가 철이면 창고 다섯 개를 채울 정도로 나온다던데.”

“……!”

“이러다간 전부 타서 무화과는 씨도 안 보이겠군. 어쩔 수 없겠어.”

“그, 그건 안 돼!”

알레이의 말에 기겁한 아셀로가 허둥지둥하더니, 서둘러 날개를 활짝 폈다.

“흐읍!”

기합을 한 번 넣자 아셀로의 몸이나 겨우 덮겠다 싶었던 날개가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마치 들숨을 크게 들이마셨을 때 가슴팍이 부풀 듯이, 아셀로의 날개도 그가 마력을 팽창시킴에 점차 부피를 키웠다.

그리고 마침내 날개 한 짝이 건물 하나는 족히 되겠다 싶을 정도가 되었을 때, 아셀로는 팽팽하게 당겼던 시위를 놓듯 날개를 크게 휘저었다.

후우웅, 거대한 바람이 창공을 갈랐다. 견디지 못한 불 몇 개는 꺼지기도 했으나, 대개는 잠시 몸집을 줄였다가 다시 타오를 따름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방금 행위로 바람의 흐름이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허.”

예니트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샜다.

절벽을 향해 불고 있던 바람은 이제 신전을 향해 불고 있었고, 알레이의 장담대로 녹색 불길은 더 이상 퍼지지 못하고 주춤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주인은 정말로 이 거대한 불길을 조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역시.’

알레한드로 님의 실력은 녹슬지 않았어. 예니트의 입매에서 남몰래 웃음이 피어올랐다.

사실 그녀가 조금 전부터 계속 알레이에게 반대해 왔던 것은 진심이 아니었다. 맞게 표현하자면 반신반의했다고나 할까.

당연히 예니트는 원래 알레이의 실력이라면 맞불을 놓고 조정하는 것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그녀는 현재 알레이의 실력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다시 만난 후에는 제대로 보지 못했으니까.’

알레이는 마법을 사용한다 해도 크게 꺼내지 않고, 예니트보다 한참 모자란 마법사인 척 행세를 했다. 덕분에 예니트는 알레이가 정말로 마법 실력을 잃었는지 아닌지 남몰래 의심해 왔던 것이다.

‘기우였어.’

그녀가 기억하던 알레한드로는 여전히 건재했다. 그가 아니라면 과연 누가 이런 걸 할 수 있겠는가.

알레이는 녹색 불길 안으로 몇 번 불을 던져 보더니, 소용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쯧 혀를 찼다.

“이제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다 한 모양이군.”

“다시 내려가시는 겁니까?”

“그래야겠지. 세이렌, 너는 여기서 계속 바람을 통제해라. 불이 더 이상 번지지 않게 해. 그래야 무화과나무도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

“맡겨 둬!”

“그리고 예니트, 너는 신전으로 가라. 불길이 세니 인명피해가 없게 사람들을 이동시켜.”

“정말 내키지 않는 일이군요. 알겠습니다.”

예니트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이제 마법을 어느 정도 쓸 수 있으니 연기를 들이마시지 않도록 마법을 사용하면 되니 연기 때문에 오만상을 쓰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신전에 있을 사람이라면 열에 아홉은 사제인 탓이다.

저를 붙잡아 처넣은 사제들을 구해야 한다니. 예니트는 그렇게까지 너그럽지 못한 종자였으나 알레이가 시키는 일에는 고분고분할 수밖에 없었다.

연기를 들이마시지 않도록 마법으로 만든 가면을 쓰던 예니트가 문득 의아함을 표했다.

“알레한드로 님도 함께 신전으로 가시는 겁니까?”

알레이도 나란히 같은 가면을 만들어 쓰고 있었던 탓이다.

“알레한드로 님이 도와주신다면 사람 몽땅 옮기는 건 일도 아니겠는걸요.”

“유감스럽게도 나는 달리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돕진 못하겠다.”

“해야 할 일이 있습니까?”

“그래. 오필리아가 저 불길 속에 있다고 했으니까.”

서둘러 그녀를 찾아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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