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화
웅성거리는 소음에 간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가 섞여 들었다.
“베일란 님은 어디 계신 거지?”
“불이 번지지 않게 공기를 막아!”
아셀로가 뜯어 버리다시피 해 열어 둔 문에서 매캐한 연기가 스며들어 오기 시작한 것은 덤이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 보였던 예니트가 다시 콜록거리기 시작했다. 아셀로 역시 연기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으, 이게 뭐야! 아무래도 이 연기 맡을수록 힘이 빠지는 거 같은데…….”
“콜록! 세이렌, 힘이 다 빠지기 전에 빨리 날갯짓 좀 해 봐!”
아셀로가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끼고 크게 날갯짓을 했지만, 연기가 사라지는 것은 잠시뿐이었다.
문 쪽에 서 있던 아셀로가 가장 먼저 연기에 마력을 빼앗겨 갔다.
“이제, 콜록, 못 하겠어……. 너무 지쳐.”
“젠장, 정말 다 말려 죽일 셈인가? 알레한드로 님, 콜록, 괜찮으세요?”
“난 괜찮다. 연기도 그렇고, 아무래도 밖에 불이 난 것 같은데.”
“요즘 불은 뭐가 이렇게 고약하게 난답니까? 콜록, 대체 뭘 태워야 이딴 게 되는 건지…….”
마탑 위주로 교류하고 배워 온 예니트나 아셀로는 신전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물론 예니트는 메이너드 대륙에서 지낸 지가 조금 더 되었지만, 하필 그녀가 지낸 곳이 신전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로넨이었던 탓에.
그녀는 처음부터 이 연기가 그저 마법사인 그들을 묶어 두기 위한 일종의 연막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밀레세트에서 지낸 경력이 있는 알레이는 이 연기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러니 밖에서 난 소란이 루헤일의 불꽃으로 인한 것이라는 사실도.
‘대체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기에.’
알레이는 아셀로의 말을 되짚어 보며 인상을 썼다. 오필리아가 자신을 버리고 갔다는 이야기부터, 참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말까지.
‘믿고 싶지 않지만.’
세이렌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셀로가 전한 말들은 충분히 오필리아에게서 나왔을 법한 말들이었다.
‘오필리아가 아리엘을 만나러 간다 했던가.’
아리엘은 마탑의 위치를 찾을 마지막 열쇠였다. 그래서 알레이와의 만남까지 미뤄 가면서 오필리아가 노을곶으로 향했을 텐데, 그 끝에 돌아온 결과가 이것이라면.
‘마탑의 위치를 알아냈다고 봐야겠군.’
그러니 그녀에게 알레이는 더 필요치 않았다. 그런 와중에 사고를 쳤으니 버려지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막연한 깨달음이 소슬해, 알레이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부러진 가지처럼 떨어진 팔의 끝에서 사슬 움직이는 소리가 감각을 일깨웠다.
‘우습군.’
분명 오필리아가 처음 마탑의 위치를 알아내겠다고 선언했을 때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결국 해냈다.
‘나는 해내지 못했고.’
결국 오필리아가 옳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알레이가 기억을 되찾지 못할 가능성을 신뢰했으니까. 어쩌면 마탑의 위치를 찾은 이후 알레이를 버리는 것 또한 그녀의 머릿속에 이미 계획되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분명 이성적으로 판단하자면 그게 옳을 텐데.
왜 한편으로는 그럴 리 없다는 확신이 고개를 디미는지.
지평선을 바라보던 오필리아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여명의 희붐한 빛을 머금은 낯은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을 애상을 담고 있는 것 같기도, 어떤 아침도 걷어 낼 수 없는 검은 허무에 물들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알레이는 지평선을 바라보는 오필리아가 허공에 무엇을 덧그리는지 알고 있었다. 바다는 그녀가 향해야 할 목적지였으므로.
짙은 비탄의 끝에서 그녀는 해가 떠오르는 바다를 보며 희망을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알레이, 나는 자유롭고 싶어요. 그걸 두려워하지 않고 싶어요. 그럴 수 있을까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당신과 있는 동안 그걸 두려워해 본 적이 없더라고요.
오필리아의 목소리가 뇌리를 맴돌았다.
세상에 두려울 것 없었던 그를 유일하게 두렵게 만드는 그녀였다. 그래놓고 본인은 알레이와 있을 때 두렵지 않다고 하니 모순이다.
그 호의 어린 시선을 잊지 못한다. 물결 위 난자한 햇살을 닮은 미소도.
-당신은 날 이름으로 불러 줬으면 좋겠어요.
이름을 허락받았던 순간. 알레이는 자신이 맞잡은 그 손을 놓지 못하리라는 것을 직감했었다.
그러니 끝을 내는 것 역시 그의 몫이다. 오필리아가 자신을 버렸다 한들 소맷자락 한 번 붙잡을 정도 자격은 되겠지.
“……세이렌. 네가 오필리아의 전언을 들고 왔다고 했지.”
“방금 얘기해 줬잖아.”
“그럼 오필리아는 어디에 있지?”
“내가 여기에 내려 주고 헤어졌으니까 여기에 있겠지?”
“……여기에 있다고? 불이 났는데?”
“응! 오필리아도 불이 날 줄은 몰랐을 테니까.”
“저 새대가리를 어쩜 좋아…….”
옆에서 예니트가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알레이는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오필리아는 여기까지 올 이유가 없다.’
여기로 온 것부터가 자신들을 완전히 버렸다는 건 아닐 게 분명했다. 생각이 그에 이르자 내상으로 인해 요동치던 마력이 차차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알레이는 파도가 완전히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한번 마력을 끌어올렸다.
챙!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그의 손목에 묶여 있던 억제구가 떨어져 나갔다. 가장 답답했던 손목을 풀고 나자 그다음부터는 수월했다.
발목의 억제구가 알레이의 마력을 버티지 못하고 깨져 나가고, 우드득 소리와 함께 철창 또한 뜯겨 나갔다.
하지만 여전히 자욱한 연기 때문에 정상적인 몸 상태는 못 되었다.
“콜록, 콜록!”
날카로운 기침에 피가 섞여 나왔다. 내상이 생각보다 심각한 모양이었다. 연기가 태워 버린 마력 회로가 자꾸 오작동을 일으키려 하는 게 느껴지고 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래도 아직은 버틸만 한데.’
그러니 마력을 쓰지 않는다면 내상이 더 심해질 일은 없겠지만. 예니트와 아셀로의 상태가 점점 나빠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어느새 새로 변한 아셀로는 두 날개로 몸을 감싼 채 널브러져 있었고, 예니트는 마력 고갈이 다가오는지 안색이 희게 질려갔다. 더 고민할 겨를도 그에겐 주어지지 않았다.
알레이는 아셀로를 주워 들고, 손을 들어 허공에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그르릉.
짐승 우는 것과 비슷한 소리가 지하 감옥을 울리더니, 예니트가 갇혀 있는 감옥의 철창이 그 모양대로 썰려 나갔다.
“콜록, 알레한드로 님…….”
“말하지 마라. 우선은 여기서 나간다.”
“바깥에, 콜록, 불이…….”
“불이 났으니 죽기 싫어서 빠져나왔다고 둘러대면 되겠지. 우선은 불길부터 잡아야 할 것 같은데.”
뜨거운 열기가 지하까지 스며들기 시작했다. 불이 이만큼 번졌다면 호수 하나쯤 쏟아 붓지 않는 이상은 불을 끄기 힘들었다. 밖이 저렇게 소란한 이유 또한 그런 원인이리라.
“신성력 남은 사람은 전부 이리로!”
“가서 물을 더 퍼와!”
웅성대는 소음 속 구령이 몇 마디 섞였다. 다른 때였더라면 사제들의 대응이 조금 더 나았을 수도 있겠지만, 사제들은 무너진 절벽까지 다녀오느라 신성력이 남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물론 그런 것을 알레이가 알 턱은 없었다. 그는 갈증에 허덕이는 사람에게 물을 주듯 자신의 마력을 예니트에게 넘겨주며 그 소리를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리고 예니트가 적당히 회복하자, 그들 주위로 넓은 범위의 냉기를 둘렀다.
연기가 섞여 들어오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어도, 열기로부터는 안전할 수 있도록.
겨우 안색을 되찾은 예니트가 제 로브를 벗어 포대기 싸듯 아셀로를 둘둘 말아 들었다.
“알레한드로 님, 일단 여기를 벗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다 정말로 도망쳤다는 취급을 받게 되면 곤란해진다.”
“저는 그렇게 해도 문제가 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이제는 여기에 남아 있을 이유도 없는데요! 이대로 몸을 피해 계시다가 마탑으로 돌아가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 여자는 저희를 버렸다고요!
예니트가 울분을 토했다. 절망적인 순간에 손을 놓아 버렸다는 오해를 했으니 저렇게 격분하는 것도 이해할 만했다.
하지만 그대로 떠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알레이는 태연히 거짓말을 했다.
“기억을 전부 되찾기 전에는 마탑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너도 알겠지. 오필리아는 기억을 찾을 마지막 실마리다. 그러니 여기서 떠날 수 없어.”
“젠장! 그럼 어떻게 하실 겁니까? 사람이 몇이나 달라붙어도 못 끄는 불이 났는데요!”
예니트가 머리를 부여잡았지만, 다행스럽게도 진화 방법이라면 알레이가 잘 아는 게 하나 있었다.
“맞불을 놓는다.”
그러고 나면 임시 신전이 완전히 잿더미가 될지도 모를 일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