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화
길 잃은 사고는 언제나 같은 등대를 찾았다. 알레이의 뇌리에 박힌 목소리가 그를 붙들었다.
-알레이. 이건 파도를 잠재우는 일이 아니에요.
-이러다 당신이 감정에 휩쓸려 실수로 이안을 죽이기라도 하면, 다음에도 그러지 않을 거란 보장이 있나요? 혹시 그 다음에 당하는 건 내가 되나?
그때 오필리아는 알레이를 걱정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동시에 일종의 경고이기도 했다.
알레이가 선을 넘는다면 오필리아는 돌아보지 않을 거라는 무언의 암시. 알레이는 그것을 뼈아프도록 잘 알고 있었다.
이성이 희미해져 가는 와중에도 떠올리는 게 오필리아라니. 그런 제가 우습기도 하다.
하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그제야 알레이의 뇌리에 자신이 이곳을 전부 폐허로 만든다면 그 피해가 오필리아에게 가리라는 사실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알레이는 끌어올리던 마력에서 조금씩 손을 놓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흔들리던 건물의 진동이 멈추고 주변의 웅성거림 또한 멎어 들기 시작할 즈음.
“……흑마법을 쓴다는 말이 사실이었군.”
그를 둘러싼 이들 중 누군가에게서 툭,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것이 신호탄이라도 된 듯, 다음은 모든 것이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다.
베일란의 신성력이 알레이를 짓누르고, 포박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사제 여럿이 달려와 그의 손발에 마력 억제구를 채워 구속했다.
게다가 그를 둘러쌌던 이들 중에는 카델리아도 있었다.
그녀는 알레이의 마력이 만들어 낸 지진이 자신을 노린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황궁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소리쳤다.
“황궁에서도 조금 전 같은 위험한 힘을 이용해서 나를 해하려고 했어! 종적을 감춘 줄 알았는데 이곳에서 다시 나를 노리고 있었던 거야!”
말도 안 되는 억측이었지만, 알레이가 카델리아와 마찰을 빚은 것 또한 사실이었으니 함부로 반박할 수도 없었다. 오필리아가 있었더라면 좀 달랐을지 몰라도, 알레이는 이런 일에 대해 영 젬병이었다.
하지만 알레이가 무슨 항변을 했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카델리아의 말이 나오자마자 베일란이 짐짓 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던 것이다.
“신전에 멋대로 침입한 것도 모자라 황족에게 위해를 가하려 한 점은 결코 가벼이 볼 수 없으니, 우선 신전의 지하 감옥에 수감하고 판결을 위해 황궁으로 이송한다.”
마치 이 모든 상황을 예상한 듯한 말이었다. 그는 카델리아의 말에 진위를 따지는 의례적인 절차조차 거치지 않고 곧바로 알레이를 투옥했다. 머잖아 예니트도 함께.
그녀는 알레이의 수감 소식을 듣고 날뛰다가 함께 구금되었다고 했다. 그걸 저지할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었던지.
오필리아가 라딘 성을 비웠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예니트가 연신 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콜록, 코르넬리가 걱정이군요. 그 애한테 연락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좋을 텐데.”
“네 상태부터 걱정해라, 예니트. 이러다가 마력이 전부 연소되면 위험할 텐데.”
“콜록, 콜록! 달리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공기 중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오는 마력이 없다면 마법사는 마력 고갈에 시달리게 된다. 아직은 보유량이 있으니 괜찮을지 몰라도 예니트의 마력양으로는 위독해지기까지 그리 많이 남지 않은 상황.
말마따나 길은 없을지 몰라도, 상황을 최악으로 치닫게 만들지 않을 방법은 있었다.
‘내가 억제구를 들키지 않게 풀어낼 수 있다면.’
그러면 자신의 마력을 공기 중으로 흘려보내 예니트의 숨통을 틔워 줄 수 있었다. 물론 임시방편이기는 해도 오필리아가 돌아와 조치를 취하기까지 버틸 수는 있으리라.
문제가 있다면 알레이 또한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는 점이었다.
‘연기를 들이마셨더니 내상이 생각보다 깊군.’
억제구를 풀기 위해 마력을 끌어 올리다 보면 제어가 잘 안 되기 마련이다. 만전의 상태로 임해도 그럴진대, 내상을 입은 상태로 그런 짓을 하다간 몇 시간 전과 같은 상황이 생길 수 있었다.
물론 그때는 이성을 잃은 상태였으니 무조건 그럴 거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불안 요소가 있었다.
‘하지만 더는 망설일 수 없다.’
두 손을 묶은 이 사슬에 약간의 틈이라도 있다면 마력을 흘려보낼 수 있었다.
알레이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까딱여 보았다. 조금만 의지를 가져도 마력은 크게 흔들렸다.
이대로 살짝 움직이는 걸 반복해 사슬을 끊어 낸다면……!
쿠르릉.
“……!”
마력의 흔들림에 돌벽이 무겁게 진동하는 소리가 났다. 알레이의 움직임이 우뚝 멈추었다.
설마 또다시 조절에 실패한 건가?
낭패감이 발밑에서부터 짙게 올라오기 시작한 순간.
감옥의 복도 너머 돌문이 열렸다. 그리고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충 걸친 조끼가 가슴께에서 팔랑거리는 실루엣. 자욱한 연기 속에서 몇 번 기침을 한 인영이 씨근덕대며 화를 냈다.
“뭐야, 여기는 뭐가 이렇게 고약해?”
익숙한 목소리와 익숙한 마력. 알레이의 입술이 반신반의하는 투로 말을 뱉었다.
“……세이렌?”
“어, 역시 거기 있었구나!”
알레이의 목소리를 들은 아셀로가 반색하며 휘휘 손을 내저었다.
“여기 숨 쉬기도 힘든데 왜 이런 데 있어?”
취향 참 이상하네. 아셀로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날개를 끄집어냈다.
세이렌은 새의 모습에 가까울수록 마력 운용량이 늘어나기 때문에, 산테와 다르게 어린 세이렌들은 마력을 쓰기 위해 어느 정도 새의 모습을 갖출 필요가 있었다.
“취향이면 존중해 줄까 했는데, 숨 막혀서 안 되겠어.”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셀로의 날개가 크게 움직이더니, 건물 안에서는 불 리 없는 돌풍이 한 차례 감옥을 휘저었다.
물론 아셀로는 연기를 빼려고 한 행동이었겠지만, 문제는 연기뿐만 아니라 사람도 끌려 나갈 만큼 강한 돌풍이었다는 부분이다.
“이런, 미친……!”
예니트가 욕설을 짓씹었지만, 아셀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린 세이렌은 완전히 내킬 때까지 감옥 안을 뒤흔들어 놓고는, 연기가 전부 빠진 뒤에야 히죽 웃었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그런데 다들 왜 그런 표정이야?”
“……됐다.”
“저 망할 새대가리…….”
“그래도 연기가 빠졌으니 된 거 아니냐.”
“콜록! 그건 그렇긴 한데요. 저 새대가리가 대체 여길 어떻게 알고 찾은 겁니까?”
“오필리아가 보내서 왔는데?”
아셀로가 고개를 갸웃하며 통통 튀는 걸음으로 다가왔다. 오필리아라는 이름이 나오자 예니트의 낯이 화색을 띠었다.
“오필리아가 우리를 구출하라 한 겁니까?”
“아니, 그냥 말만 전하라던데?”
“……예?”
예니트의 낯에서 다시 안도의 빛이 꺼져 갔지만, 알레이는 오히려 안색이 밝아졌다. 그는 처음부터 오필리아가 그들을 구출하라고 세이렌을 하나 달랑 보낼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다만 전언이 희망적인 쪽일지는 확신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오필리아가 어쩌면 붙잡힌 알레이를 버리겠다고 할 수도 있을 테니까. 알레이는 철창 쪽으로 몸을 붙이고 아셀로의 입이 다시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전해진 오필리아의 말은.
“참을 필요 없대.”
알레이의 생각보다 명료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어.”
“……그 말이 전부인가?”
“하나 있기는 한데.”
아셀로가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털며 중얼거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필리아가 가장 먼저 전한 말은 잡혀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지만.
-아셀로. 가기 전에 들어. 밖에서 무슨 일이 있을지 몰라.
-뭐 재밌는 거 하려고?
-아마도. 그러니까 알레이한테는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해.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신경 쓰면 안 되는 거야?
-응. 알레이는 나와 아예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해. 그래야…… 그가 스스로를 돌볼 테니까.
그 말을 아셀로가 전부 이해하기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아셀로는 성실한 심부름꾼이었다.
아셀로는 자신이 빠트린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오필리아가 너를 자기랑 아예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대.”
“……뭐라고?”
알레이의 낯이 심각하게 굳어 들어갔지만, 아셀로는 천진했다. 모든 노력이 결실을 맺는 것은 아니기에.
“정말, 오필리아가 그렇게 말했다고? 내가 여기 갇힌 걸 알고?”
“응!”
“알레한드로 님, 이건 너무한 것 아닙니까? 수감된 걸 알자마자 꼬리를 자르다니요!”
예니트가 옆방에서 쾅, 벽을 치며 화를 냈다.
“세이렌! 이거 풀어 봐! 당장 이 망할 곳을 엎어 버리겠어! 역시 탑 밖의 인간들은-”
그때, 밖에서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