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구한 적 없다-94화 (94/118)
  • 제94화

    이안의 낯이 일그러졌다. 그의 속이 성할 길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오필리아의 도피에 대체 왜 그렇게 제 속이 상했는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실망스러웠나? 그녀가 이런 사람인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오필리아가 과거에도 자신을 이용했다는 걸 모르지 않는데.

    기실 실망보다는 노기에 가까웠다. 제게서 벗어나겠다고 잡은 것이 또 다른 도피처라니.

    이안은 알레한드로의 낯을 떠올렸다. 오필리아에게 푹 빠진 것이 잘 모르는 제3자에게까지 확연히 보이던 그 멍청한 낯짝을.

    그 역시 오필리아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고 있을 터다. 자신이 그녀에게 있어 특별하다고. 그러니 그런 말도 안 되는 헌신과 애정을 내보일 수 있는 것이겠지.

    이렇게 한 발짝 떨어져 보자면 오필리아는 그저 고요할 따름인데 말이다.

    이안이 볼 때, 알레이의 사랑은 그저 홀로 빠져 들어 홀로 헤매고, 상대에게 이용당하기만 하는 사랑이었다.

    ‘내가 그러했듯…….’

    생각이 그에 이르자 이안은 자신이 왜 그토록 오필리아의 계획에 부아가 치밀었는지 깨달았다.

    지금 이 모든 것이, 오필리아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방증이었던 까닭이다.

    그 사실이 상처에 바닷물을 부은 듯 쓰라린데도, 오필리아를 도저히 놓을 수 없다는 것까지.

    오필리아를 붙든 이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당신에게는 나도 이런…… 이용하기 좋은 멍청한 놈이었겠지. 내가 싫으니 이젠 다른 사내를 끌어들이나?”

    이안이 쏘아붙이자, 오필리아의 낯 위로 경멸이 어렸다.

    “못 본 사이 비방에 도가 텄군요. 더 설명할 생각 없으니 놔요. 이제 나와 관련된 그 어느 것도, 당신이 말을 얹을 자격은 없어요.”

    당신은 이제 나와 타인일 뿐이다.

    차가운 오필리아의 일갈에 이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아니, 오필리아. 내가 말했지. 당신은 날 선택하게 될 거라고.”

    월광이 서린 이안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저 감옥에 갇혀 있는 놈이 당신의 도피처가 되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아니면 인간 머리통을 터트리는 걸 취미 삼는 세이렌이?”

    이안의 말이 날카롭게 오필리아를 후볐다.

    “당신은 남의 손을 빌리는 데에만 재능이 있지. 가진 능력은 아무것도 없고. 내 손 하나 뿌리치지 못하면서 대체 무얼 할 수 있다는 거지? 그냥 내게 와. 마탑이니 세이렌이니, 평범한 인간들과는 너무 동떨어진 단어 아닌가?”

    결국 듣다 못한 오필리아가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뭘 모르는 것 같은데, 내겐 당신과의 결혼도 그만큼의 거리를 가진 말이었어요.”

    어딜 가든 제게는 그저 멀고 먼 곳이었다. 그것이 로넨에서 마탑으로 바뀌었을 뿐인데, 제가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이유가 있나?

    그러나 이안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그래, 도피처로 삼으려면 그 정도는 해야겠지. 당신은 도망치지 않고는 살아가는 법을 모르니까.”

    이안은 오필리아를 사랑한 만큼 그녀를 상처 입히는 법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를 흔드는 방법에 대해서도.

    이안의 말들을 부정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의 말들은 오필리아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르고 있었다.

    아무 능력도 없다는 부분과, 언제든 도망치려 한다는 것이 특히 그랬다.

    ‘여기서 부정하기만 하면 끝없이 말려들 뿐이야.’

    이안은 오필리아에 대한 생각을 바꿀 기미가 없어 보였다. 그의 집착만큼이나 그 애증 또한 견고했다.

    그러니 여기서 실랑이를 벌여 봐야 시간 낭비일 뿐.

    결국 오필리아는 몸을 빼려던 것을 멈추고 물었다.

    “이안, 자꾸 내가 도망치려 한다고 하는데. 왜 내가 당신을 도피처로 선택했다고 생각하는 거죠?”

    생각의 근간을 묻자, 이안은 치부라도 드러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고작 그 질문이 떠오르게 하는 기억이 적잖이 쓰라렸던지.

    그는 일렁이는 시선을 오필리아에게 잠시 머물러 두었다가, 울음을 토하는 듯한 몰골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걸 들었으니까.”

    “이야기?”

    “당신이 우리 결혼을 말리는 어느 남자와 이야기하고 있더군. 우리가 결혼하면 후회할 거라고. 당신은 그런 말을 듣고도…… 아주 태연하던데.”

    오필리아는 그제야 이안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깨달았다. 그녀에게 이안과 결혼하면 후회할 거라고 말한 것은 단 한 사람이었으니까.

    ‘알레이.’

    그는 정말 기묘할 정도로 견고한 확신을 가지고 오필리아의 결혼을 반대했다. 그날도 그랬다.

    -오필리아, 역시 그는 아닌 것 같습니다. 당신도…….

    -알레이 당신도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나요?

    -나는…… 당신이 결혼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겠다는 말을 하려는 겁니다. 그렇게 결혼하면 당신은 분명 후회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결혼하는 데 내 사랑이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이안이 날 사랑하는데.

    오필리아는 알레이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려 보고는, 이안이 왜 이 기억에서 그토록 상처 입은 낯을 했는지 깨달았다.

    그런 말을 들었더라면 누구라도 그녀를 오해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그녀는 착잡한 시선을 떨어트리며 입을 열었다.

    “이안. 그날은 당신이 날 닮은 다른 누군가와 단둘이 거닐고 있다는 말을 들은 날이었어요.”

    붉은 머리를 가진 어떤 아름다운 여자와 이안이 인가로 향했다고.

    “그 말을 전한 사람은 내가 당장 당신 머리채라도 뜯으러 가길 바란 건지, 내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자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게 틀림없다고 하고 가더군요.”

    그날의 비방을 오필리아는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말을 전한 것은 하이다르 라딘이었으므로.

    -황녀 전하 같은 목석을 데리고 살 대공 각하도 가엽군요. 아까 본 그 여자는 아주 살갑게 웃던데, 벌써 갈아탄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말을 들어도 전하께서는 별다른 생각이 없으시겠지만.

    별다른 생각이 정말 없는 건 아니다. 단지 그런 이야기를 들어도 괜찮을 만큼 믿음이 견고했을 뿐.

    “나는 이야기를 듣고도 그게 우리 사랑에 어떠한 방해물도 되지 않을 거라고 믿었어요. 당신은 날 사랑하니까. 당신의 사랑을 믿었으니까.”

    자신의 애정이 그렇게 파도치지 않는다는 것을 오필리아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제게 어떤 말을 해도 자신은 괜찮았다. 이안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았으니까.

    다른 사람들의 눈에 자신이 사랑에 빠지지 않은 것 같아도, 어쩌면 정말로 자신이 사랑하는 법을 몰라도.

    이안은 나를 사랑하니까. 그 믿음이 오필리아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그녀의 앞날에 예정된 행복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그게 허상이었다는 것은 나중에 깨달았지만…….

    “이안, 우리가 망가진 이유는 사랑이 모자라서가 아니에요. 믿음이 모자라서지.”

    당신은 단 한 번도 나를 믿지 않았고, 믿음을 잃은 뒤 단 한 번도 나를 존중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돌아오라고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이안을 두고 알레이를 선택한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자신을 믿었으니까.

    로넨에 알레이가 왔을 때 이미 성에 오필리아를 곱게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알레이는 자신이 아리엘의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는 것을 함구할지언정 오필리아를 비방하지 않았다.

    그 차이가 얼마나 큰지 이안은 알고 있을까.

    내가 나를 믿지 못해도 나를 믿어 줄 사람이 있다. 그것으로 나는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한 가지 오해하는 것 같은데, 내가 정말 아무런 능력이 없었더라면 여기에 서 있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진즉 세이렌의 손에 머리가 터져 죽었겠지.

    청운의 꿈을 꾸고, 그걸 현실에 그려 낼 수 있다는 것부터가 나의 능력인 것을.

    “이안, 당신은 정말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

    이안의 일그러진 낯이 무언가 항변의 목소리를 토하려 했다.

    그 순간, 오필리아는 몸을 틀어 헐거워진 손아귀에서 팔 하나를 뺐다.

    휘익-

    오필리아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로브가 그녀의 손에 한 바퀴 크게 돌아 바람을 타며 곡선을 그렸다.

    그리고 그 끝은 그들의 바로 옆에 있던 불길을 지나, 그대로 이안에게 던져졌다.

    “아악!”

    불길이 이안에게 치닿지는 않았으나, 뜨거운 열기로 점철된 로브가 이안의 낯으로 덮쳐들자 이안은 비명을 지르며 몇 발짝 물러서게 되었다.

    낯을 감싸쥔 이안이 고함을 쳤다.

    “오필리아!”

    “이렇게 되어 유감이에요.”

    후두둑, 오필리아의 손에서 부러진 깃털들이 떨어지고, 그녀의 등 뒤로 인영들이 나타났다.

    조금 전 지령을 맡겼던 세이렌들.

    “또 불렀네, 오필리아!”

    “그래, 계획이 바뀌었어.”

    이번에도 그리 어렵진 않겠지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