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화
음성에 당혹과 노기가 깃들어 있었다. 오필리아의 행동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 지나가던 사람에게도 선명하게 느껴질 테니 놀람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후자는 달랐다.
“이젠 다른 방법으로 죽고 싶어서 그러는 건가?”
“……이안.”
상대를 알아본 오필리아의 낯이 잠깐 놀람을 표했다가, 이내 격랑이 가라앉듯 잠잠해졌다.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 건지 모르겠군요.”
“거취를 옮기려 했으니까.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하지.”
“이유 없어요. 놔요.”
오필리아가 이안의 손을 뿌리치려 세게 흔들었지만, 이안의 손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안이 원한다면 그는 오필리아를 맨손으로 구속해 안전한 곳에 둘 수 있었으니, 그로서는 나름 아량을 베푸는 셈이었다.
밖이 소란하다기에 나와 보았더니 사랑하는 여자가 불에 스스로를 던지려 하고 있으니 놀라지 않을 길이 있을까.
거세게 맥동하는 심장이 애정 때문인지, 놀람 때문인지조차 불분명하게 느껴졌다.
어깨에 두른 로브 위로 흔들리는 붉은 머리칼과, 살짝 찡그린 낯이 여전히 제 꿈에 그리던 그대로였다.
이안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겨 손에 힘을 풀었다가, 오필리아가 손을 뿌리치려고 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이거 놔요!”
“……놓으면 또 미친 짓을 하려고 그러는 건가?”
“손 하나쯤 늙은 채로 지내도 문제 될 거 없잖아요. 당신과는 관련 없는 일이니까 놔요.”
“그놈 때문이지?”
알레한드로.
이안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온 순간, 오필리아의 낯이 굳었다.
“당신도 알고 있었군요. 그가 잡혀 온 것.”
“모를 수가 없지. 그렇게 소란이 컸는데.”
이안은 그렇게 대답하더니, 허탈한 웃음을 읊조렸다.
“고작 그따위 놈을 위해 당신은 손도 버리겠다는 거지, 지금.”
“그를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그를 가두어 두는 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지 당신도 알잖아요.”
알레이가 지금은 오필리아의 처지가 난감해질 것을 고려해서 가만히 갇혀 있다고 하지만, 알레이를 가둔다는 것은 곧 자연재해를 묶어 두는 것과 같았다.
세이렌조차 차마 가늠할 수 없는 크기의 마력을 지닌 그였다. 오필리아 역시 알레이가 나선다면 얼마나 피해가 클지 잴 수 없었다.
만약 자신이 베일란에게 중죄를 씌워 알레이를 사면하는 방법을 쓸 수 없게 된다면 그때는 무력을 강행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오필리아는 되도록 그 방법은 쓰고 싶지 않았다.
‘물론 아셀로에게 참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전하라고 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알레이가 그런 말을 듣는다고 해서 곧장 마력을 개방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던 탓이다.
신중한 알레이의 성격이라면 오필리아의 말을 듣고 상황을 최대한 파악하려 할 테니까.
상황이 불가피하다는 걸 한 번 더 전달하면 그때는 어쩔 수 없이 강행 돌파를 선택하리라.
오필리아가 이렇게 확신할 수 있는 데에는 물론 이유가 있었다.
일전 알레이가 이성을 잃기 직전까지 화가 나 이안을 뭉개 버렸던 이후, 오필리아는 알레이에게 한 번 이런 질문을 던졌던 적이 있었다.
-알레이, 당신이 한 번에 낼 수 있는 최대 출력이 어느 정도 되나요?
문득 오필리아도 궁금해진 것이다.
바다를 한 번에 잠재우고, 온 해역을 빛내도 지친 기색 없는 이 마법사가 할 수 있는 최대가 어느 정도인지.
알레이는 그때 한참이나 고민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저도 잘은 모릅니다.
-가늠이 되는 정도가 없나요?
예니트는 본인의 힘을 한 번에 들어 올릴 수 있는 무게로 측정하고, 코르넬리는 단번에 벨 수 있는 나무의 개수로 측정했다.
아무래도 출력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가시적인 부분이 필요할 테니 나름의 기준이 있다고 하는 모양이었다.
-듣기로는 마탑에 마력을 수치화해서 보여 주는 장치도 있다고 하던데요.
-그런 걸로 측정이 된다면 또 모르겠지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언제나 힘을 오분의 일만 사용합니다.
그마저도 바다를 잠재우는 것처럼 큰 힘이 필요할 때의 이야기이고, 평소에는 열 손가락 중 하나만 움직인다고 했다.
-그 이상 사용하려 하면 힘에 취합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분명 제게도 한계가 있을 텐데, 저조차도 그 끝이 제대로 가늠되지 않으니 전능하다는 착각에 빠지는 겁니다.
-한 번 겪어 본 적 있는 것 같은 말투네요.
-겪어 본 적이 있으니까요.
마법사들이 가장 흔하게 쓰는 측정법은 코르넬리가 사용한 방법이었다. 단번에 벨 수 있는 나무가 몇 개나 되는가.
-그걸 시도하려 숲에 갔습니다. 조금씩 출력을 올려서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숲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더군요.
하지만 가장 끔찍한 건 그 부분이 아니었다.
숲을 초토화할 정도라면 분명 어느 정도 기억이 남아 있어야 할 텐데, 그렇게 했던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
-어렴풋이 출력을 내며 즐거워했던 기억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이렇게까지 파괴적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 뒤로는 힘을 내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필요한 때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군요. 만약 강한 속박에 걸린다면 그때는…… 그렇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때가 오지 않았으면 한다고, 알레이는 말했다.
힘을 방출해서 속박을 풀어내는 방법을 쓰려면 그만큼 출력을 제어하기가 힘들어지기 마련이라.
-분명 인근이 폐허가 될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알레이의 낯은 무척 괴로워 보였다. 아니, 괴로워했다고 하는 쪽이 옳을 것이다.
그 직후 알레이는 고개를 들어 오필리아에게 이렇게 말했으므로.
-당신이 머무르는 곳이라면 나는 얼마든 묶여도 괜찮습니다. 당신에게 내가 해를 끼친다면…….
세상에서 대적할 자를 찾는 게 서산의 해가 다시 떠오르기를 바라는 것보다 어려워 보이는 사내는 오필리아 하나 때문에 그토록 자신 없는 낯을 했다. 오필리아는 당시 알레이의 낯을 잠시 떠올렸다가, 곧 지워 냈다.
그 기억이 곱씹을수록 기묘한 고양감을 주는 기억이었던 탓이다.
만약 상황이 정말 불가피해져서, 알레이가 마력을 개방하는 것으로 상황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그는 한층 더 괴로운 낯을 할 게 분명했다.
‘물론 나는 그가 잘 조절할 수 있을 거라 믿지만…….’
혹여라도 그러지 못할 가능성도 고려해야 했다. 그리고 오필리아는 알레이가 그런 자괴에 빠지게 둘 생각이 없었다.
자신이 모든 걸 망쳤다는 생각이 얼마나 첨예하게 속을 찌를 수 있는지, 오필리아는 이미 충분히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녀는 경고했다.
“알레이를 묶어 두면 분명 후회할 만한 일이 일어날 거예요.”
“……글쎄. 난 잘 모르겠군. 문제가 될 거였다면 그놈을 붙잡을 때 문제가 있었겠지.”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차가웠다.
이안은 비탄이 깃든 낯으로 오필리아를 깊게 응시하더니,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오필리아. 잘 생각해 봐. 그놈을 풀어 주어야 하는 이유가 정말 그가 위험하기 때문인가? 그가 있어야 당신이 마탑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 아니고?”
마탑.
그 단어가 이안이 입에서 나온 순간, 오필리아의 안에서 무언가 쿵 하고 떨어졌다.
“……지금, 뭐라고요?”
오필리아는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떨어졌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내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거라 생각했나?”
벌어진 거리가 그 배로 좁혀 들었다. 오필리아는 자신을 덮치는 그림자를 목도했다.
“밀레세트는 종교가 워낙 파다해서 꽉 막힐대로 막힌 동네지만, 로넨은 아니지. 당신도 알겠지만 로넨은 마탑하고 교류하기도 하거든. 마탑의 금기에 대해서도 알고 있지.”
마탑의 위치를 절대로 발설할 수 없다는 부분. 그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오직 마탑의 주인뿐이라는 것도.
이안은 오필리아가 금빛 날개를 가진 사내의 품에 안겨 창공으로 사라지는 것을 본 날, 오필리아가 원하는 것이 이 대륙에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알레한드로 그놈과 매일같이 붙어 다니는 것도 모자라, 인간이 아닌 놈들까지 끌어들였는데 모르기가 더 어렵지 않나?”
세이렌을 알뿐더러 마탑의 생리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이안에게는, 오필리아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도 선명히 보였다.
마탑의 주인을 이용해 마탑으로 가는 것.
이안의 낯에 애증과 회한이 뒤섞여 올라왔다.
“당신은 과거에도, 지금도 다른 사람을 이용해 도피하려 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