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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한 적 없다-92화 (92/118)

제92화

임시 신전은 산등성이에 위치해 있다. 걸어서 가려면 몇 시간이 꼬박 걸리고, 마차로 가도 결코 금방 도착한다고는 하지 못할 거리.

지금 마차를 꺼내면 분명 적잖이 눈길을 끌 것이다.

무엇보다, 여기 좋은 이동 수단이 있는데 굳이 육로를 택할 이유가 있을까?

오필리아는 이제 제법 익숙해진 새들의 시선으로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신을 안아 든 세이렌의날개가 크게 퍼덕였다.

“아셀로, 좀 더 낮게 날아.”

“이미 낮은데. 더?”

“그래, 더. 못 하겠어? 산테는 하던데.”

“나도 할 수 있지, 당연히!”

아셀로가 콧잔등을 찡그려 짓궂은 태로 웃더니, 나무 가까이로 휘익 날아들었다.

덕분에 아래를 지나는 토끼 하나까지도 전부 보일 정도의 거리가 되었다.

오필리아는 아래쪽의 길을 빠르게 살폈다.

‘별다르게 오가는 움직임은 없어 보이고.’

만약 오가는 게 있었더라면 그것부터 저지해야 했을 테니 잘된 일이다.

알레이와 예니트를 구금해 둔 지금, 신전에 사람이 오갈 일은 죄인을 수도로 이송하는 것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상황이 적잖이 골치 아파질 게 뻔하다.

그 전에 사람이 오가지 못하게 막아 둘 필요가 있었다.

오필리아가 고개를 틀어 우현의 벼랑을 가리켰다.

“아셀로, 이쪽으로 돌아. 저 절벽 보이지?”

“보이기는 하는데, 절벽으로 가? 아까는 산 중턱으로 간다며.”

“가기 전에 잠깐 들리는 거야. 저 절벽을 좀 무너뜨려 줄 수 있겠니?”

“당연하지! 얼마나?”

“네가 하고 싶은 만큼.”

“살다 보니 이런 심부름도 다 하네!”

아셀로가 크게 웃더니, 오필리아를 안아 든 채 절벽으로 다가가 공중에서 날개를 한 번 크게 휘저었다.

만약 인어가 물의 정령에 비견될 수 있다면, 세이렌은 창공을 누비는 바람의 정령.

그들의 날개는 칼 같은 바람을 일으킬 수도, 지상의 모든 것을 날려 버리는 돌풍을 만들어 낼 수도 있었다.

아셀로의 날개 끝에서 쐐액 하며 허공을 날카롭게 가르는 소리가 났다.

쿠구궁.

첨예한 바람에 쪼개진 암석이 파도를 맞은 것처럼 맥동하며 지형을 바꾸기 시작했다.

거칠게 잘려 나간 절벽이 둔중한 소리를 내며 아래로 쏟아졌다.

바로, 마차가 오가는 큰 길목을 막으며.

사람 몇으로는 차마 움직일 수조차 없을 크기의 바위를 본 오필리아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대단한데, 아셀로.”

“이 정도는 산테가 아니어도 할 수 있다고.”

“산테처럼 존재감을 지우는 것도 할 수 있니?”

“인간처럼 보이게 하는 거 말이야?”

정확히 말하자면 세이렌 특유의 매혹적이고 이질적인 분위기를 없애는 변장 마법의 일종이었다.

산테가 오필리아의 시종으로 지내며 내내 두르고 있던 마법이기도 했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산테의 근처가 인산인해를 이루었을 테니까.

“그거 좀 까다로워서 싫은데.”

“물어만 본 거야. 할 수 있으면 안까지 데려가려 했는데, 어려우면 굳이 무리하려 들진 말고.”

오필리아가 넌지시 말하며 아셀로의 자존심을 겨냥하자, 아셀로는 예상했던 그대로 걸려들었다.

“무슨 소리야? 무리는 무슨! 그건 우리가 성년이 되기 전에 다 배운 거라고.”

아셀로가 발끈하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오필리아가 데려가 준다는 말이 퍽 내키는 내용이었던지.

마침 임시 신전에도 도착한 덕분에, 그는 오필리아를 사뿐히 내려놓고 몇 마디를 중얼거리는 것으로 제 존재감을 간단히 지워 냈다.

딱 오필리아가 원한 시종의 모습으로.

“이제 뭘 하면 돼?”

“이번에도 쉬운 일이야.”

오필리아가 아셀로에게 눈짓해 팔을 벌리게 한 뒤, 아셀로의 셔츠 위로 시종들이 흔히 입는 조끼를 끼워 주며 말했다.

물론 오필리아가 말하는 ‘쉽다’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알레이나 산테의 능력치에 있었지만, 눈앞의 단순하고 순진한 세이렌이 그것까지 알 턱은 없었다.

조끼의 끝단을 툭툭 건드리듯 절제된 손길 몇 번으로 단추를 여며 준 오필리아가 몸을 틀었다. 희미한 불빛이 일렁이는 신전이 눈앞에 있었다.

다른 때였더라면 분명 이 앞마당까지도 사람이 제법 있었겠으나, 오필리아는 이미 조금 전 아셀로가 절벽을 부순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막힌 도로 쪽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것을 보고 온 참이었다.

‘아마 코르넬리의 짓이라고 생각하겠지.’

그것도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한 일이었다.

신전에서 예니트까지 구금한 이상 코르넬리를 가만둘 리 없으니까. 아마 코르넬리가 동료들의 구출 혹은 보복을 위해 예니트처럼 난동을 피울 거라고 예상했으리라.

‘그런 와중에 그런 소란이 있었으니.’

코르넬리가 행동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사제들이 그걸 두고 보고 있을 리 없었다.

현실은 조금 다르지만.

고작 마법사들을 이단으로 취급하는 그들이 예상이나 했을까? 고작 여기 라딘에 날개 달린 마법 생물들을 넷이나 부리는 여자가 있을 거라고.

‘지금 신전은 거의 비었어.’

아마 크게 연관 없는 사람들이나, 이런 일에 굳이 움직일 필요 없는 사람들만 남았을 것이 자명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오필리아가 노린 것이었다.

“저번에 말했던 마법사 혹시 기억하니?”

“마법사 누구?”

“네가 문어 같다고 했던 마법사.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같이 있었던 사람.”

오필리아의 설명에 아셀로가 알겠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세이렌들은 인어처럼 마력을 탐지하는 일에 능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마력의 형태를 구분하는 것에는 능숙했다.

대개 인외 생물들은 둔갑이 가능하다 보니 얼굴보다는 그런 것으로 사람을 구분한다고.

-오필리아는 어항? 어항 같아. 되게 찰랑여.

-내가?

-응. 그리고 산테는 여름 바람 같아. 좀 큰 거. 인간 말로는 태풍이라고 하던가?

-그럼 알레이는? 방금 나간 마법사 말이야.

-어, 그 마법사는…… 좀 무서워. 문어 같아.

-문어?

-엄청 큰 문어! 꿈틀거리는 게 보여. 그림자로는 다 가려지지 않을 만큼 크고…….

아셀로의 어휘는 알레이가 가진 마력의 형태를 오필리아에게 충분히 전달하기에는 다소 역부족이었으나, 오필리아는 귀담아 들었다.

알레이가 가진 마력의 크기가 거대한 것이 보인다는 부분이 인상 깊었던 탓에.

“아셀로, 지금도 그 마력이 보여?”

“응! 꽁꽁 묶여 있어! 사슬…… 사슬 같은 걸로. 그런데 못 풀 정도는 아냐. 왜 묶여 있는 거지?”

“……묶여 있는 게, 못 풀 정도가 아니야?”

“당연하지. 저렇게 몸집이 크면 조금만 움직여도 사슬이 다 끊어질걸? 사슬도 약해 보이는데.”

역시.

그럴 줄 알았다.

‘임시 신전에 있는 마력 억제구가 그렇게까지 좋은 물건일 리 없지.’

그런 허접한 물건에 알레이가 잡혀갔다는 것도 이해가 안 되고.

설마 했는데, 아셀로의 이야기를 들으니 명확해졌다.

‘그는 일부러 붙잡힌 거야.’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고, 얼마든지 저항할 수 있는 알레이가 그러지 않은 이유는 뻔했다.

그렇게 하면 오필리아에게 해가 갈 테니까.

명확해지는 사실이 기쁘기보다는 무겁다. 그가 지난 생에서 자신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명확하지 않은 시점이라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우선 해야 할 건 명확했다.

“가서 알레이를 찾아, 아셀로. 굳이 잡혀 있지 않아도 된다고 전해 줘.”

“그럼 오필리아는?”

“나는 잠깐 이야기를 해야 할 상대가 있어서.”

오필리아는 그렇게 대화를 맺은 뒤, 아셀로를 보내고 자신도 신전 안쪽으로 들어섰다.

신전 안은 예상대로 텅 비어 있었다. 빠진 사람 대신 루헤일의 상징인 초록 불꽃이 곳곳에서 일렁이며 불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 보였다.

이 불꽃은 신성력의 일종으로, 이걸 피워 낼 수 있어야 주교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녹색 불꽃이 지나간 자리에는 특이한 화인이 남는다.

수분을 빼앗고 표면을 일그러뜨리는 일반적인 불과 달리. 이 불은 생기를 빼앗기 때문에 불에 노출된 부위만 급격히 노화되는 것이다.

‘통증은 똑같지만.’

중요한 건, 이 불꽃에 누군가 다친다면 그 범인은 주교뿐이라는 거다.

그러니 만약 오필리아가 이 불꽃에 다친다면?

‘베일란은 어떤 식으로든 황녀를 해쳤다는 죄목을 벗을 수 없겠지.’

그리고 그것이 당장 알레이와 예니트를 꺼내 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베일란에게 중죄를 씌우는 것.

‘물론 다른 방법도 있겠지만.’

사면을 위해 베일란과 입씨름을 하는 사이 시간이 지체되면 오필리아 쪽만 불리해질 게 뻔했다.

오필리아는 두르고 있던 로브의 소매를 걷어붙이고, 죽음의 색을 띠고 있는 불꽃을 향해 거침없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손은 불꽃에 닿지 못했다.

그 순간 손목을 잡아챈 사람이 있었으므로.

상대의 낯이 일그러지며 음절을 뱉어냈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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