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화 [S공금]
오필리아는 산테가 날아간 검은 하늘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살짝 찌푸려진 낯이 하늘을 보며 소나기를 가늠하는 목동의 낯을 닮아 있기도 했다.
처음 떠날 때 느꼈던 그 순풍이 거짓이라도 되는 것처럼 불안이 온몸을 감싼 탓이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마탑의 위치도 얼추 알아냈고, 알레이가 마탑에서 추방당한 일에 대한 진상 또한 윤곽이 거의 잡혔다.
‘그런데 왜…….’
왜 이렇게 불안하지?
라딘 성내로 향하는 걸음이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 손등을 스치는 기류가 날카로웠다. 이것이 정말, 그저 착각에 불과할까.
오필리아는 최대한 불길한 생각을 털어 내려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자.’
단지 일이 거의 손끝에 잡힌 탓에 생긴 불안일 것이다.
이제 오필리아에게 남은 것은 오직 두 가지뿐이었다.
알레이를 만나 그가 시간을 돌렸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나누고, 아리엘이 고쳐 준 지도를 들고 해역을 탐색하는 것.
그 두 가지만 하면 더는 이곳에 얽매여 있을 필요가 없었다. 알레이도, 오필리아도.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었다.
오필리아는 이제 알레이에게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었고, 알레이를 만나는 일 역시 그리 어렵지 않을 게 분명했으므로.
알레이가 최근 오필리아를 피하고 있다고 한들, 오늘 그들에게는 해 진 뒤의 약속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쌓인 신뢰가 있었다.
‘어긋날 것은 없어.’
하여 오필리아는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성 안으로 들어갔다.
아마 방에 알레이가 있겠지. 임시 신전에 있다 한들 걱정할 것은 없다. 산테가 소식을 전하러 갔으니까.
그래. 그럴 텐데…….
“……성내가 왜 이리 소란하지?”
오필리아의 입술에서 툭, 갈무리하지 못한 의문이 튀어 나갔다.
성 안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몇 시간 전과 달라진 기류가 그녀의 불안에 부채질을 하고 있었던 탓이다.
평소 이 시각에는 다들 소등 준비를 하느라 떠들 시간도 없이 바삐 돌아다녀야 할 텐데, 저마다 홀 이곳저곳에 모여 떠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한껏 숨을 죽인 목소리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천장 위에서 쥐 떼 오가는 소리처럼 느껴진다.
몸집을 키운 긴장이 오필리아를 덮쳤다. 그녀는 등을 떠밀리기라도 한 모양새로 몇 걸음을 던졌다.
그리고 손을 뻗어 잡히는 아무나 잡아 물었다.
“성에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아, 전하!”
오필리아를 알아본 사용인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렇잖아도 전하를 찾고 있었습니다. 황궁에서 오신 마법사 분께서 흑마법을 사용하셨다는 게 밝혀졌다고 해서요.”
“……뭐라고?”
황궁에서 온 마법사는 오직 알레이 뿐이다. 사용인이 말하는 상대가 그라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오필리아는 무언가 쿵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불안이 발목에서 찰랑였다. 피가 차게 식어 손끝이 떨리는 듯 했다.
이 상황을 알아봐야 한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어야 하는데, 그보다는 알레이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아니, 화가 났다.
“그럴 리 없어. 뭔가 잘못 안 게 틀림없다. 그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
“무, 물론 저도 믿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희야 마법사를 잘 모르니까요. 사제님들께서 그렇다고 하시니 그렇다고만 알 뿐입죠.”
“사제가?”
“예. 임시 신전에서 사람들이 오셔서 그러시던걸요. 죄인의 물건들을 확인하겠다고요. 그랬더니 로넨에서 온 마법사가 그걸 듣고 난리를 쳐서 또 소란이었습지요.”
로넨에서 온 마법사. 예니트다.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발밑이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네깟 것들이 감히 누굴 죄인 취급하느냐고 그렇게 난리를 치지 뭡니까? 무슨 광신도라도 되는 것처럼…… 으으.”
상황이 어땠을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알레이에 대한 예니트의 충성심은 이미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니까.
알레이를 죄인 취급하는 것에 펄펄 뛰며 난리를 쳤으리라.
문제는 이 마법사들 한 명 한 명이 해일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럼, 그 마법사들은 어떻게 되었지? 성이 무너진 곳은 없나?”
“왜 없겠습니까? 저기 서편은 완전히 무너졌어요. 사상자가 안 나온 게 망정이죠. 어떻게 인간이 그런 힘을 내는 건지, 눈으로 본 사람들도 믿기지 않다고 하덥니다.”
아마도 예니트가 그렇게까지 소란을 벌이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일이 커지지 않았겠으나, 안타깝게도 예니트는 쉬운 성격이 결코 아니었다.
“사제님들 여럿이 나서서 겨우 붙들었습니다. 정말 큰일이 날 뻔했죠.”
“그래서 그 마법사들은?”
“우선 임시 신전에 구금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저도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요.”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며 사용인이 혼란스러운 낯을 했다.
“흑마법은 주변에까지 영향을 끼친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대로면 어디에 무슨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고…… 같이 지내던 다른 분들도 믿을 수가 없으니…….”
최근 크게 충원된 마법사 인력의 수혜를 톡톡히 보고 있던 라딘 성이었으니 불안이 적잖은 모양이었다.
“우선은 베일란 주교님께서 살펴 주신다고 하셨으니 안심입니다.”
베일란. 그 이름을 듣고서야 오필리아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 이름이 뭐라고, 듣자마자 머릿속에 찬물이 끼얹어진 기분이 들었던 탓이다.
‘정신 차려야 해.’
여기서 자신이 흔들리면 안 된다. 그 생각이 오필리아의 굳어 있던 신경들을 죄 깨웠다.
‘베일란이 알레이의 정체를 알 리 없어.’
아니, 설령 안다고 해도 고작 자신이 몇 시간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단이니 뭐니 하며 잡아갈 수는 없었다.
신전은 그렇게 섣부르게 행동하지 않는다.
그들은 신의 사자라는 명칭을 내걸고 저들이 절대적인 선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니까.
‘적어도 명확한 죄가 있을 때까지는 나서지 않아.’
그런데 이렇게 썰물 쓸려 나가듯 알레이를 잡아가?
아니, 애초에 알레이가 잡힐 만한 사람인가?
원한다면 언제든 이곳을 떠날 수 있고, 언제든 이곳을 폐허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인데.
그런데도 제 곁에 남아 준 사람인데,
‘아직 코르넬리는 성에 돌아오지 않았어.’
코르넬리는 치료소를 운영하는 통에 늘 소등이 완전히 될 즈음에나 귀가하곤 했다. 어차피 순간이동이 가능한 마법사였으니 제자리에서 최대한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셈이다.
다소 고지식하다고 느껴질 만큼 올곧은 성실함이 간혹 의아할 때도 있었는데, 지금처럼 다행으로 느껴진 적이 없다.
‘코르넬리도 예니트 못지않게 충성심이 대단하니까.’
코르넬리의 실력을 제대로 본 적은 없지만, 두 사람이 함께였더라면 분명 이 근방이 전부 무너졌으리라.
오필리아는 사용인을 놓고 서둘러 제 방으로 올라갔다.
출입의 흔적이 없는 그녀의 방은 여전히 고요했다. 혹시 제 방으로 먼저 올까 싶어 책상 위에 올려 둔 작은 쪽지까지.
「알레이, 일이 있어서 잠시 해변에 다녀올게요. 소등 전에 올 테니 어디 가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 줘요.」
오필리아는 유난히 신경 쓴 달필이 담긴 종이를 집어 들어 한동안 바라보다가, 툭 떨어트렸다.
대신 꺼내 든 것은 세 개의 깃펜.
우둑, 둔탁한 소리와 함께 부러진 깃털들이 책상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그리고 머잖아 열린 창에서 세 명, 아니, 세 마리의 그림자가 와락 방 안으로 쏟아졌다.
“오필리아!”
“간만에 불렀네?”
“이번에도 맛있는 거 있어?”
어린 세이렌들이 삐약거리며 새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탈피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을 따라 깃털이 날렸다.
오필리아는 아직 앳된 느낌이 가시지 않은 세 청년에게로 몸을 틀었다.
“어서 와, 세이렌.”
그리고 오늘은 안타깝지만 그렇게 즐거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딜로, 너는 코르넬리에게로 가. 네가 셋 중에서는 제일 빠르잖니? 네가 일찍 도착해 줘야 하는 일이야. 코르넬리는 성문 쪽 치료소에 있을 테니 찾기 어렵지 않을 거고. 오늘은 성에 들어오지 말라고 전해 줘.”
“맡겨 줘!”
“그리고 둘째, 실로. 너는 산테를 찾아. 네가 눈썰미가 좋으니 네가 가장 잘 찾을 거라고 믿어. 산테를 찾거든 이 말을 전해 주렴.”
오필리아가 전언을 전하자, 세 형제 중 가장 맏이인 아셀로가 부스스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불쑥 끼어들었다.
“그럼 나는?”
세 형제들은 오필리아의 의뢰를 제법 좋아했다. 편지만 줄창 전하라는 마탑의 의뢰와 달리, 오필리아의 의뢰는 뭔가 특별했다.
크게 내용이 다른 것도 아닌데 하고 나면 뿌듯하고 기분이 좋으니 이상하다며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오늘 나누어 주는 일거리도 틀림없이 재미있어 보였다.
아셀로의 눈동자가 흥미로 반짝였다.
오필리아가 과연 무얼 맡겨 줄까? 비행도 자신 있고, 탐색에도 자신이 있다. 심부름이라면 뭐든!
그러나 오필리아가 꺼낸 말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아셀로, 너는 나와 갈 곳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