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구한 적 없다-88화 (88/118)

제88화

사실 처음부터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오필리아는 아리엘의 비늘이 제게 과연 무슨 말로를 가져다줄지 두려워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더 이상 그것이 두렵지 않게 되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아마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알레이가 자신에게 거리를 두기 전, 그들이 함께하는 시간이 하루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때.

한 번은 오필리아가 악몽을 꾼 적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해 알레이의 도움을 빌려야 했던 때가.

분명 자신은 지옥 같은 로넨 성에 있었는데. 이안과 아리엘에게, 그리고 자신 때문에 크센트로 시집을 가야 했던 카델리아에게까지 매도를 당하고 있었는데.

눈을 뜨자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등이 느껴졌다. 그리고 자신을 갈급한 눈으로 보고 있는 알레이도.

숨이 벅찼다. 뺨이 젖어 있었다. 아마 자면서 울었던 모양인지.

오필리아가 몸을 일으키고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알레이는 그녀에게 물을 가져다주며 말을 붙였다.

“대체 무슨 꿈을 그렇게 험하게 꿉니까? 악몽이라도 꾼 겁니까?”

“……맞아요, 악몽.”

악몽도 그런 악몽이 없다. 차라리 자신이 등지고 온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리고 그것은 오필리아가 가진 불안감의 발로였다.

이대로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다가 두고 온 과거에서 다시 눈을 뜨지 않을까.

나는 분명 라딘에서 새로운 곳을 꿈꾸고 있었는데, 그게 전부 허상에 불과하게 된다면.

그때 자신이 과연 현실을 견딜 수 있을까.

살고 싶었다. 그만큼 과거가 두려웠다. 불안정한 현재의 상태가 두려웠고, 조건식 마법의 존재가 두려웠다.

오필리아는 알레이가 건네 준 컵을 꾹 쥐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두고 온 과거로 다시 돌아가는 그런, 악몽이에요. 정말 끔찍해요.”

“그 과거에는 내가 있습니까?”

그리고 질문이 돌아왔다.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이었던 만큼 질문이 돌아올 거라 기대하지 않았던 탓에, 오필리아는 처음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했나요?”

“당신이 두려워하는 과거에 내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혹시 없습니까?”

“……없냐는 게 무얼 의미하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요.”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내가 죽거나, 당신과 척을 져서 더 이상 그 어떤 우호적인 관계도 기대할 수가 없다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비록 당신이 나를 떠나기는 했지만.

그 말은 혀 밑에 잘 수납해 두었다.

오필리아의 말에, 알레이가 그럼 됐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과거로 돌아가거든 나를 부르세요.”

“당신을요?”

“왜 그런 표정으로 보는 건지 모르겠군요. 혹 내가 싫은 겁니까?”

“아뇨? 그럴 리가요.”

오히려 좋다는 축인 것을.

오필리아가 한사코 부정하자, 알레이가 시니컬한 낯으로 픽 웃었다.

“그러면 된 것 아닙니까? 날 불러요. 그럼 내가 도우러 가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내 곁에 없어요. 마탑에 있으니까.”

“그래도 얼마든지 이동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벗을 수 없는 직함에 머물러 있고요.”

“파면당할 방법을 한 번 모색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번거롭잖아요.”

“내가 당신에게 가는 데 그렇게 많은 사족이 필요합니까?”

알레이가 그렇게 묻자, 오필리아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말과 함께 숨이 턱 막힌 기분이었다.

알레이는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더니, 오필리아의 손에 갇혀 있던 컵을 조심스럽게 빼냈다.

그 빈자리에는 본인의 손이 다시 들어왔다.

알레이는 오필리아의 손을 잡았다.

“당신이 필요하다면, 그리고 우리가 여전히 친구라면 나는 얼마든지 당신에게 갈 겁니다. 상황이 아무리 암담해도 혼자보다는 둘이 낫겠지.”

알레이는 그렇게 말하더니, 오필리아의 시선이 맞닿을 즈음에는 멋쩍게 손을 뺐다.

아마 그 나름의 위로였던 모양이었던지.

“그러니까, 너무 두려워 말라는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리는 알레이의 목덜미가 붉었다.

밝은 색의 속눈썹으로 빼곡히 채워진 눈매가 슬쩍 휘어져 있었다.

알레이는 정말 이따금, 날카로운 기색 하나 없이 웃을 때가 있었다.

오필리아가 소리를 내어 웃는 것만큼이나 드문 일이었지만.

그럴 때의 알레이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본인은 알고 있을까.

부드럽게 휘어지는 미소가 아름다웠다. 날렵한 모양으로 가늘게 접히는 눈매가 아름다웠고. 반듯하게 깎인 뺨과 콧날이 조화로웠다.

그 앞에서 모든 불안은 힘을 잃었다.

알레이의 말이 옳았다.

만약 과거로 돌아가도, 오필리아는 이제 알레이를 부르길 겁내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비늘을 삼킬 때까지만 해도 알레이가 자신을 속인 것이 그저 속상하기만 했다.

알레이가 자신을 그만큼 깊게 여기지 않는다는 방증 같아서.

그들의 친분이 허울 좋은 껍데기에 불과했으리라는 생각이 오필리아를 더욱 고립시켰다.

‘그때는 시야가 많이 좁아져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때 알레이의 말을 들을 때까지도 계속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을 보면, 과거로 돌아와서도 크게 넓어진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오필리아는 이제 알레이를 신뢰했다. 알레이가 자신을 속인 데에도 이유가 있을 거라 믿었다.

그들의 우정이 결코 껍데기가 아니었다고.

그렇게 생각하니 더는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두렵지 않아졌다.

현실은 그대로라고 해도, 사람이 달라졌으므로.

그녀에게는 이제 원하는 것이 명확하고, 그걸 얻기 위해 행동할 의지도 충분했다.

“그래서…… 이제 두렵지 않아졌어요. 우선 급한 일부터 처리하고, 마법을 끝낼 방법을 찾을 거예요.”

오필리아가 말을 마칠 즈음에는 아리엘도 혼란이 많이 가라앉은 채였다.

아리엘은 오필리아가 결단을 내렸다는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어 물었다.

“그렇다면 나한테 묻고 싶은 게 뭐죠?”

“정말 간단해요. 당신의 생일날 있었던 일을 묻는 거라서요.”

오필리아는 그렇게 운을 떼고는 잠시 멈추었다.

마탑이 걸어둔 금제를 빗겨 가게끔 교묘히 질문해야 했으므로,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마탑의 금제는 마탑의 위치를 발설하지 않는 것.’

그러니 만약 오필리아가 아리엘에게 “당신은 마탑 인근으로 헤엄쳐갔죠?” 하는 식으로 위치를 언급할 수밖에 없게끔 묻는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백이면 백 대답하지 못하게 되리라.

그래서 오필리아는 질문을 조금 돌렸다.

“혹시 마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나요, 아리엘?”

“아, 어떻게 알았어요? 평소에 언니들이 마탑 근처에도 못 가게 하거든요. 평소에 못 가는 곳을 가려고 했죠.”

“그러던 중에 배를 마주친 거고요?”

“맞아요. 정말 잘 아네요?”

“그럼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오필리아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것은 오필리아가 잔뜩 어지럽혀 둔 지도였다.

마른 종이를 본 아리엘이 눈을 반짝였다.

“와, 이게 종이군요! 정말 말라 있네요!”

“마르지 않으면 쓰지 못하니까요.”

오필리아는 가볍게 대꾸해 주고는 길게 이어져 있는 화살표를 가리켰다.

“이게 뭔지 알아볼 수 있겠어요? 항해하는 사람들이 배의 움직임을 따라서 물살의 방향을 기록해 둔 거예요.”

“아, 그럼요. 여기서부터 보면 될 것 같은데. 조금 잘못된 게 있네요. 여기는 위로 그냥 올라가는 게 아니고 한 바퀴 감아서 올라가요. 여기는 휘어 있고요.”

오필리아가 한 번 지도를 꺼내자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아리엘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척척 지도의 잘못된 부분들을 짚어 주었다.

해류의 방향을 알려 준 것은 덤이고.

해류가 바뀌자 항로도 바뀌었다. 오필리아는 얼른 펜을 꺼내 아리엘이 말하는 것들을 토대로 새롭게 지도의 표식들을 정돈했다.

그러자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해류가 꼬이는 방향이 서로 반대가 되는 지점이자, 고요한 항로와 요란한 항로가 엉켜 지나며 만들어 내는, 지도 위 하나의 공백.

표식은 의미가 없었다.

애초에 지도가 잘못되어 있었으니까.

사고가 기이할 정도로 없는 항로도, 사고가 유난히 많은 항로도 모두 유추에 필요한 내용이었다.

“……하하.”

오필리아의 입술에서 허탈한 웃음이 샜다.

그러나 마냥 지쳐 있다기보다는 희열에 찬 듯한 웃음에 가까웠다.

오필리아의 입술이 길게 벌어졌다.

“찾았다.”

마탑 세이렌.

드디어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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