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덧붙이는 말에 인어들의 시선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다른 때였더라면 오필리아의 수상함을 최우선으로 신경 썼겠지만, 현명하고 냉철한 인어들은 아리엘의 안위가 걸린 일에서만큼은 이성을 유지하지 못했다.
결국, 그들 사이에서 누군가 입을 열었다.
“……막내를 불러올게요.”
예상한 결말이었다.
* * *
오필리아가 아리엘을 만난 것은 그로부터 약 10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처음 봤을 때보다 한참은 여위어 보이는 아리엘이 다른 인어들의 손에 붙들려 물 위로 올라왔다.
아리엘은 여위었어도 여전히 청초한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약간 짜증스러워 보이기는 했지만.
아리엘은 자신을 부축하는 다른 인어들에게 투정을 부리다가, 오필리아를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대체 이 시각에 누굴 만난다는…… 오필리아?”
“간만이네요, 아리엘. 잘 지냈어요?”
“아니, 잘 지낸 건 둘째 치고 대체 왜 여기에 있어요! 여긴 상어도 지나는 해역이라고요!”
화들짝 놀란 아리엘이 오필리아가 있는 곳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오필리아가 있는 곳은 이제 발판이 아니라 의자로 바뀌어 있었다.
아리엘을 기다리는 동안 발판을 만든 장본인인 셋째 인어의 자비가 있었던 덕분이었다.
“내 언니들이 이런 건가요? 세상에, 뭍의 인간은 아가미도 지느러미도 없는데 바다 한가운데로 끌고 오다니! 정말 나빴어요!”
이쪽 해역이 얼마나 위험하고 험준한지 아느냐며 아리엘이 난리를 쳤지만, 정작 당사자인 오필리아는 평온했다.
“대신 화내 줘서 고마워요. 상어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당신을 기다리는 데 물 위로 지느러미가 여러 개 지나가더군요.”
“맙소사…….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 태연할 수 있는 거죠? 여차하면 언니들이 당신을 상어 밥으로 주겠다는 심보인데!”
“인어들이 인간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당신을 위해서 그런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 괜찮아요.”
무엇보다 난 아직 멀쩡히 여기 살아 있잖아요?
오필리아가 그렇게 말하며 미소 짓자, 아리엘은 그제야 조금 진정한 눈치였다.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 나도 더 화내지는 않겠어요. 하지만 언니들이 나빴다는 건 변함이 없어요. 이따 꼭 한마디하겠어요.”
“날 위해 그래 준다면 나야 좋죠.”
난데없이 바다 한가운데로 끌려 나오는 경험이 썩 유쾌한 건 분명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당신과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건 모두 당신 언니들 덕분이니, 정상참작을 부탁해요.”
“알겠어요. 고려는 해 볼게요. 휴, 난 나를 만나러 온 사람이 있다면서 바다 한가운데로 부르기에 세이렌이 온 줄 알았다고요.”
아리엘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리엘은 바다 밑에서 본인의 시위를 이어나가고 있던 차였다.
“막내 공주님, 정말 아무것도 안 드시겠어요?”
“오늘이 벌써 며칠 째예요. 다른 공주님들이 걱정하실 거예요.”
“꼭 공주님이 식사하게 하라는 명령이 있었어요.”
색색의 물고기들이 간절한 목소리로 아리엘을 조르며 그녀 주위를 맴돌았다.
물고기들은 저마다 애원을 하거나 애교를 부려 가며 그들의 주인의 입을 벌리게 하려고 했지만.
“언니들이 허락해 주기 전까지는 안 먹는다고 했잖아. 저리 가.”
안타깝게도 아리엘은 강경했다.
그녀는 며칠 전 산테와의 만남에서 붙잡힌 이후로 내내 인어들의 궁전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유는 물론, 극성인 그녀의 언니들 때문에.
“아리엘, 어떻게 언니들을 두고 뭍으로 갈 생각을 할 수가 있니?”
“세이렌들과는 얼굴도 맞대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건만!”
“나고 자란 바다를 벗어나려는 이유가 뭐니? 뭍으로 간 인어는 행복해질 수 없어!”
아리엘의 언니들은 물론 아리엘을 사랑했다. 그들은 아리엘이 뭍으로 나가는 것이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는 것을 알기에,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다.
‘그래서 몰래 혼자 떠나려고 한 건데.’
자신을 만류하는 언니들의 얼굴에 깊게 물든 슬픔이 보일 때마다 아리엘은 속상해졌다.
자신을 만류하는 이유도, 그럴 만한 상황이라는 것도 충분히 알고 있었던 탓이다.
“아리엘, 바다가 싫은 거니? 아니면 우리가? 네가 뭍으로 떠나면 우리는 영영 다시는 보지 못할 수도 있어.”
하다못해 큰언니까지 눈썹 끝을 축 늘어뜨리고 이렇게 말해 왔지만.
“나는 바닷속이 싫은 건 아니야. 그냥 물 밖이 좋은 거야.”
아리엘의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언니, 나 물 밖의 인간들을 봤어. 배 위에서 파티를 열고 있더라고. 그 인간들은 불을 썼어.”
불로 음식을 익혀 먹었고, 옷을 갖추어 입고 있었다.
그들의 머리칼은 젖어 있지 않았고, 물속에서의 자유를 빼앗긴 만큼 물 밖에서는 더없이 자유로웠다.
“나도 그렇게 살아 보고 싶어. 멋진 옷을 입고, 다양한 곳을 다녀 보고 싶어. 원하는 게 잘못된 건 아니잖아.”
하지만 그렇게 말할 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아니, 잘못된 거야. 아리엘, 차라리 물고기를 날게 하지 그러니? 새보고 헤엄치라고 하지 그래?”
인어가 뭍을 꿈꾸다니. 물 밖으로 나간 물고기는 죽음이 필연이다.
아리엘의 언니들은 계속 이 말을 반복했다.
결국 의견 차이를 좁힐 수 없었기에, 아리엘은 단식 투쟁을 시작했다.
언니들에게 허락을 받아 낼 때 이것만큼 좋은 수단이 또 없었던 까닭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뭍으로 나가고 싶었던 마음이기도 했다.
‘세이렌이 분명 나를 뭍으로 데려다 줄 마법사를 안다고 했어.’
그 마법사에게 닿을 수만 있다면 자신 역시 뭍에서 살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정말 운이 좋다면 그때 그 남자와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그 실낱같은 희망 때문에 아리엘은 뭍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거둘 수가 없었다.
그렇게 굶은 지 벌써 수일 째.
아리엘의 언니들이 결국 백기를 들었다.
“아리엘, 네가 그렇게 뭍으로 나가기를 원한다면 한 번의 기회를 줄게.”
“무슨 기회?”
“너를 만나러 온 사람이 있어. 그 사람하고 이야기를 해 본 뒤에 다시 이야기하자꾸나. 네 생각이 변함없는지, 아닌지.”
그렇게 말하는 아리엘의 언니들은 아리엘 못지않게 지치고 슬퍼 보였다.
어쩌면 이 기회로 사랑하는 막내를 영영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두려웠던 까닭이리라.
“아리엘,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우리는 너를 사랑한단다.”
그녀의 언니들은 그렇게 말하곤 아리엘에게 호위를 붙여 수면으로 올려 보냈다.
그리고 아리엘을 기다리던 것은 정말 의외의 얼굴이었다.
본인 때문에 아리엘이 죽어야 했다고 말하던, 이상하리만치 자신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던 인간 여자.
처음 만났을 때도 기이하다 느꼈지만 바다 한가운데서 만나자 그 감각은 두 배가 되었다.
대체 어떤 뭍의 인간이 빛 한 줌 없는 어두컴컴한 바다 한가운데에서 물을 의자 삼아 앉고 이토록 평온할 수 있단 말인가?
세이렌의 날개에 숨어 자신을 만나러 왔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입이 떡 벌어졌지만, 이번에는 그 이상으로 놀라웠다.
게다가 자신의 비늘을 삼켰기 때문인지 그녀에게서는 기묘한 친밀감이 느껴지기까지.
아리엘은 혼란스러워하며 물었다.
“언니들이 대체 어떻게 당신을 알아낸 거죠?”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당신을 만나러 오기 위해 당신의 언니들을 만난 거예요.”
“나를 만나러 왔다고요? 하지만 난- 난 그때도 말했지만 도와줄 수 없어요.”
“알아요. 지금은 그런 걸 물으러 온 게 아니니까.”
오필리아는 가볍게 그녀의 불안을 일축했다.
인어의 비늘을 삼킨 뒤 오필리아의 몸에 돌고 있는 마법.
그것을 풀 방법을 아직 찾지는 못했으나 오필리아는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오필리아가 며칠 사이 인어의 비늘이 건 마법에 대해 조금 더 알아낸 까닭이었다.
“인어의 비늘은 인어의 소망을 반영한다고 했죠. 그리고 비늘이 내게 걸어 둔 마법은 내 소망을 반영하기도 하고요.”
그렇게 생각하자 이야기는 한결 간단해졌다.
“삼킬 때까지는 당신이 분명 내 죽음을 원할 거라 생각했지만, 이제는 알겠어요.”
아리엘이 원한 것은 자신의 죽음이 아니었다.
오필리아 본인은 이안을 만나 벌어졌던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기를 바랐다.
그리고 실제로 일들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모두 인어의 비늘이 그녀를 과거로 돌려놓았기 때문에.
물론 마법이 완전히 끝을 맺기 위해서는 어느 조건에 도달해야겠지만.
“당신을 만난 뒤로 확신할 수 있었어요.”
당신은 분명 내 행복을 바랐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