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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한 적 없다-86화 (86/118)

제86화

“글쎄. 성 근처에서는 못 본 것 같은데. 일하는 것 아닌가?”

“일이라면, 임시 신전에 있다는 건가요?”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 다만 그놈이 갈 곳이 달리 없으니 짐작하는 거고.”

산테는 태연히 거짓말을 했다.

알레이는 임시 신전에 있을까 싶은 게 아니라, 임시 신전으로 갔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당장은 오필리아가 집중해야 할 부분이 따로 있었다.

산테는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고, 손바닥을 마주 댔다가 쭉 펼쳐 냈다.

그러자 그들이 서 있던 곶 주변의 물살이 밀려나는 듯하더니, 다시 모여들어 곶 앞에 낮은 물기둥을 만들어 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발판에 가까운 형태였다.

산테가 그 위에 타라는 듯 눈짓하자, 오필리아가 의아함을 표했다.

“노을곶에서 보는 게 아니었나요?”

“보고 있어. 아마 너는 모르겠지만.”

인어가 머무는 반경의 바다는 모래 한 알까지 전부 인어의 권속이나 다름없다.

“괜히 인어가 정령이나 다름없다고 하는 게 아니야. 강력한 인어는 바다에서 신이나 다름없거든.”

암초에 붙은 따개비와 해초, 물밑을 지나는 조개와 소라게, 작은 물고기 하나까지 모두 인어들의 눈이고 발이었다.

“내가 한 약속은 너를 노을곶에서부터 인어들이 고른 해역까지 데려다 주는 거야.”

“그럼 왜 노을곶에서 보기로 했다고 한 거예요?”

“인어들이 내가 약속을 지킬지 안 지킬지 감시하고 싶어 했으니까.”

오필리아는 그 말을 듣고 조금 질렸다는 표정을 했다.

정말 경계가 심한 종족이었다. 물론 자신들이 그렇게 싸고돌던 막내의 안위가 걸린 문제였으니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이해하지만.

“동행이 있었으면 큰일 날 뻔 했네요.”

이안을 데려올까 싶었는데, 그랬더라면 상당히 난처할 뻔했다.

‘요즘 이안이 좀 잠잠하기도 하고…….’

마음이 좀 바뀌기라도 한 걸까? 오필리아는 이안이 있는 쪽을 보기라도 하듯 흘긋 뒤를 돌아본 뒤 걸음을 내딛었다.

곶에서 발을 떼어 물 위로 올리자, 물이 부드럽게 밀려 올라오며 그녀를 지탱했다.

휘청이지는 않을까 생각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안정감 있는 감각이었다.

“마법은 정말 신기하네요. 세이렌도 이런 걸 할 줄 아나요?”

“아니, 이건 인어의 마법이야. 내가 한 건 가벼운 파동을 보내 신호를 준 것밖에 없지.”

“그럼…… 인어가 마음을 바꾸면 나는 바다에 빠진다는 건가요?”

“아주 정확한걸.”

산테가 빙긋 웃으며 칭찬하듯 박수를 짝짝, 쳤다.

그러자 서 있던 발판이 앞으로 밀려나며 오필리아를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문제는 당연히 따라올 줄 알았던 산테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는 것이다.

“산테? 나 혼자 가는 건가요?”

“인어들이 한 명만 허락해서 말이지.”

“맙소사! 이런 이야기는 없었잖아요!”

오필리아가 배신감에 소리를 쳤지만, 산테는 유감이라며 손을 흔들 뿐이었다.

“무사히 살아 돌아올 수 있기를 바라지, 오필리아.”

“산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라도 주던가!

얼떨결에 망망대해에 홀로 남은 처지가 된 오필리아의 비명을 끝으로, 그녀는 지평선 너머로 금세 모습을 감췄다.

물살이 그렇게까지 빠르게 움직인 것은 아니었으나, 인어들이 쳐 둔 비가시 결계 안쪽으로 오필리아가 사라진 까닭이었다.

산테는 그 모습을 잠시 보고 있다가, 방향을 틀어 어디론가 날아갔다.

행선지는 명확했다.

마탑.

그는 쪽지를 보낸 자가 누구인지 조금이라도 알아볼 생각이었다.

* * *

‘살다 보니 이런 일도 다 겪는구나.’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라며, 오필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물로 만든 발판에 오른 지 시간이 제법 지난 지금.

그녀는 정말 글자 그대로 망망대해의 한복판에 떨어진 상태였다.

심지어 해가 전부 진 탓에 빛 한 줌 없는 바다는 잉크를 잔뜩 붓기라도 한 것처럼 검었고, 발밑을 받치고 있는 마법이 사라진다면 순식간에 물고기 밥 신세가 될 게 분명한 처지.

다른 이들이었더라면 두려움에 덜덜 떨었음 직한 순간이었으나, 오필리아는 이 순간에 제법 적응해 있었다.

이미 한 번 죽어 보기도 했고, 투신한 적도, 까마득한 창공으로 날아올라 본 적도 있는데 뭐가 더 두려울까.

‘그리고 뭔가 친숙해.’

이 새카만 물이 친숙하다고 하니 뭔가 이상하지만, 굳이 비유하자면 그랬다.

몸을 던져도 편안히 죽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이 바다가 자신을 잡아먹을 어떤 재해처럼 느껴진다기보다는, 목욕을 위해 적당한 온도로 받아 둔 욕조 속의 물처럼 느껴졌다.

그것 역시 인어의 비늘을 먹었던 까닭일까.

오필리아가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할 즈음, 발판이 멈추었다.

제법 남쪽으로 내려온 것인지, 머리 위로 하늘을 가득 메운 별이 가깝게 떠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리엘이 아닌, 일곱 명의 다른 인어들.

“세이렌이 인간을 데려온다더니.”

“이 인간인가?”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데, 이 인간이 뭐라고 우리 막내를 만나야 한다는 거지?”

저마다 한 마디씩 내뱉는 말들은 날카롭고, 또 기이하리만치 감미로웠다.

인어들 특유의 목소리가 워낙 아름다운 탓에 쏘아붙이는 말조차 노랫소리처럼 들린 것이다.

‘아리엘 때도 겪었지만 정말 신기한데.’

심지어 인어들은 썩 두렵지도 않았다.

꿈에서 자주 본 얼굴이라 그런 걸까?

오필리아가 저도 모르게 픽 웃자, 가장 앞에 있던 인어의 얼굴이 날카로워졌다.

“지금 이 상황이 우습나, 인간?”

“우습다기보단 생각보다 환대받는 기분이라서요.”

“……환대?”

“저는 아리엘 한 명을 만나러 왔는데, 아리엘은 없고 다른 분들이 맞아 주시니 환대받는 기분이 들 수밖에요.”

오필리아가 태연히 말하자 첫째 인어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녀는 이 인어들 중에서도 가장 깐깐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무슨 생각에선지 물살을 가르고 오필리아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너희 종족을 믿지 않는다, 인간. 네가 어떤 사람인 건지 먼저 확인하기 전에는 아리엘을 만나게 해 줄 수 없어.”

“그 마음 이해해요. 하지만 지금은 제가 아니면 아리엘을 설득할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거라는 걸 알아주셨으면 하군요.”

오필리아의 말에 첫째 인어가 그녀를 느리게 위아래로 훑었다.

“너는 마법도 쓰지 못하고, 보아하니 신체 능력도 그저 그런 평범한 인간인 것 같은데.”

“대체 어떻게 아리엘을 설득할 수 있다는 거지?”

“대답 여하에 따라 네 발밑이 꺼질지도 모른다는 것만 알려 주지.”

인어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협박을 얹었다.

하지만 오필리아는 태연했다.

동요 없는 낯에서 한밤의 숲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간단해요. 한 분만 불을 켜 주시겠어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보일 수 있도록.

오필리아의 말에 넷째 인어가 손을 튕겨 광원을 만들어 냈다.

주위가 순식간에 밝아지고, 오필리아는 그제야 어둠이 드리운 베일을 벗었다.

자신의 손가락에 아직 끼워져 있는 반지 역시.

반지가 오필리아에게서 사라지며 억누르고 있던 마력이 풀려났다.

그 순간 인어들 사이에서 저도 모르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거기에 광원이 만들어 낸 빛이 보여 준 오필리아의 모습은 그들이 더없이 사랑하는 막내와 꼭 닮아 있었으니까.

“언니, 저 인간에게서 막내의 마력이 느껴져요!”

“하지만 저 여자는 분명, 인간인데…….”

“아리엘이 마음을 준 상대가 인간이라더니, 저 여자였나?”

인어들의 추측은 여러모로 자유분방했다. 오필리아는 인어들이 한껏 혼란스러워하도록 내버려 둔 뒤,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이제는 제가 아리엘과 연관이 있다는 걸 믿어 주시겠어요?”

믿기지 않아도 별 수 없다.

혼란이 가실 즈음, 오필리아는 자신이 죽지 않고 돌아갈 수 있을 것을 직감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인어들이 제 동생을 너무나도 사랑했으므로.

“오직 저만이 그녀를 구할 수 있어요.”

절 믿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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