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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한 적 없다-85화 (85/118)
  • 제85화

    아마도 이 어린 인간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감정이 얼마나 투명한지 미처 깨닫지 못한 모양이었지만.

    ‘그리고 조금은 배가 아프기도 하지만…….’

    산테는 눈을 가늘게 떴다가, 금세 풀어 버렸다.

    “어쨌든. 들었을까 싶어서 와 봤더니 정말 들은 모양인데. 오필리아가 선약을 미뤄서 우는 건 아니겠지?”

    “날 뭘로 보고…….”

    “뻔하지. 무지렁이.”

    산테가 낄낄대며 허공에서 한 바퀴를 빙글 돌았다.

    몇 번을 했는지는 몰라도 제법 능숙한 묘기였다.

    하지만 묘기를 끝내고 산테가 다시 망루로 내려왔을 때는, 전처럼 장난스러운 얼굴이 아니었다.

    “사실 들었을까 싶어서 온 것도 맞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디안.”

    “뭐지?”

    “네가 어디까지 기억이 났는지 모르겠어서 말을 아꼈다만…… 더는 함구하고 있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산테는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하더니, 이렇게 운을 뗐다.

    “아까 세이렌 하나가 산 중턱을 다녀가는 걸 봤어.”

    “산 중턱?”

    알레이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산 중턱에 있는 곳이라면 임시 신전밖에 없다.

    하지만 신전은 인간이 아닌 종족과 마법사들을 배척하는 곳인 만큼, 세이렌이 가까이 가서 좋을 것 없는 곳이기도 했다.

    알레이의 등골에 불안이 스쳤다.

    “대체 왜 거길 간 거지?”

    “뻔하지, 편지를 배달하러 다녀온 거야. 발에 뭘 묶어 가는 게 보였으니까.”

    “편지를? 누가?”

    “그것까지는 모르겠다만, 조심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던데. 세이렌이 편지를 배달했다면 발신지가 어디겠냐?”

    “……마탑.”

    “그래. 그리고 마탑에서 신전으로 편지를 보낼 일이 있겠어?”

    만약 너를 굳이 음해하려 드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산테의 말이 덧붙기도 전에 알레이의 낯이 굳어 들었다.

    “하지만, 여기에 신전이 세워지는 것을 마탑에서 어떻게 알고-”

    “네가 데리고 있는 병아리 마법사. 개중 한 명이 이곳의 상황을 마탑에 보고하고 있어.”

    “……!”

    “그러니 간단한 쪽지를 전달하는 것 정도는 무리가 아니겠지.”

    아마 코르넬리의 편지를 받은 사람 중 한 명이 그랬을 가능성이 높기는 했다.

    이후의 편지들은 다른 세이렌을 통해 전달했을 테니 잘 모르겠지만, 산테는 자신이 편지를 전달했을 때를 떠올렸다.

    마탑의 주인이 쓰는 방에 앉아 있던 마탑의 2인자, 메르시아.

    ‘마탑의 주인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접한 것치고는 썩 기뻐 보이지 않았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크게 떨떠름해 하거나, 알레이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던 것도 아니었다.

    제법 수상하기도 했지만, 섣부르게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추방당한 마탑의 주인을 반드시 좋아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사실 예니트나 코르넬리 같은 마법사들이 유난히 극성인 셈이지, 썩 좋아하지 않는 쪽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무엇보다 마탑의 2인자였던 만큼 상황을 전부 파악하기 전까지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으리라.

    산테는 제 의심을 몇 번씩 곱씹어 본 뒤, 결국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네가 기억이 좀 돌아왔다면 좀 생각해 봐라. 그럴 만한 사람이 있는지.”

    하지만 알레이 역시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나도 그런 쪽으로 떠올랐으면 좋겠는데, 전혀 떠오르지 않는군.”

    “기억을 좀 더 찾을 방법은 없나?”

    “마탑으로 가지 않는 이상은 지금이 최대인 것 같아서.”

    알레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한 번 제 기억들을 되짚어 보았다. 썩 소득은 없는 행위였지만.

    결국 고개를 내젓는 알레이를 보며, 산테는 으쓱했다.

    사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알레이의 힘을 잘 알고 있는 만큼, 크게 걱정이 되지 않았던 탓이다.

    “뭐, 잘 모르겠다면 당분간 조심하고.”

    “그래. 알려 줘서 고맙다.”

    “좀 불필요한 짓 같기도 해서 고민이었지. 네가 마음먹으면 이길 수 있는 놈이 있겠어?”

    물론 모든 세이렌을 끌고 오거나, 반대로 모든 인어를 끌고 오는 방식으로 변주를 두어 조건을 걸면 경우가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산테는 인간 중에 그를 이길 수 있는 이가 없으리라 판단했다.

    사실, 굳이 이리저리 재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기는 했다.

    격랑이 이는 바다를 단숨에 잠재울 수 있는 마법사를 감히 누가 잡아갈 수 있으려고?

    하지만 알레이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또 그렇게 힘을 제어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서는 안 되는데.’

    산테의 말대로 힘을 전부 개방하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오필리아가 있었다. 그녀가 머물러야 하는 곳이 있었고, 알레이가 무언가를 했을 때 수습해야 하는 것 역시 오필리아였다.

    게다가 힘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을 때 살상 범위에 오필리아가 끼어 있기라도 한다면.

    ‘그렇게 둘 수는 없다.’

    상상만으로도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피가 식는 기분에, 알레이는 손을 꾹 움켜쥐었다.

    “임시 신전에 한 번 가봐야겠어.”

    “왜 굳이? 무시하고 지내지 그래. 아니면 오필리아를 만나러 가는 쪽도 나쁘지는 않을 텐데. 선약도 있었다면서?”

    “그렇긴 하지만…….”

    선약에 대해서는 다소 속이 상해도 오필리아의 말이 맞았다.

    그녀에게는 아리엘을 만나는 일이 자신을 만나는 것보다 더 중요했다.

    그리고 지금 이대로 오필리아를 만난다면 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것 같았다.

    오필리아에게 자신을 내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할지도 모른다.

    ‘그런 추한 꼴을 보일 수는 없어.’

    지금도 매번 보이는 꼴이 못 미더울 것 같아 불안해 죽겠는데, 그렇게 제 손으로 단두대 줄을 내리찍는 것 같은 행위를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이유인 것은 물론 아니었다.

    “마탑에서 뭘 보냈는지 확인을 해야 마음이 좀 편할 것 같아서.”

    “네가 그렇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다만. 너무 늦게까지 돌아다니지는 마라.”

    오필리아가 널 계속 찾아다니게 두고 싶은 게 아니라면.

    산테는 그렇게 말하고 떠나갔다.

    하늘이 노을을 맞이할 준비를 하느라 푸르게 물들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 * *

    노을이 바다를 붉게 물들였다.

    바다 특유의 잘게 흩어지는 바람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늑대가 달리는 듯한 밀밭이 떠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은 사방이 붉은 물이라니.

    ‘봐도 봐도 신기하단 말이지.’

    하고 오필리아는 생각했다.

    그녀가 지금 서 있는 곳은 라딘의 노을곶이었다.

    노을이 질 때 이 곶에 서면 등진 곳을 제외한 사방이 그저 붉기만 해서 붙은 이름이었다.

    다시 말해 노을이 지는 순간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라는 뜻도 되었다.

    오필리아 역시 자신이 라딘에서 본 풍경 중 가장 아름다운 광경을 꼽으라면, 후보군에 분명 이 노을곶의 노을이 끼어 있을 거라 장담할 수 있었다.

    그래도 아마 그 광경을 이기지는 못하리라.

    ‘알레이가 바다를 전부 밝혔을 때.’

    그때의 그 황홀경을 대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이 나오고, 가슴이 벅차오르는 듯한 광경.

    심장의 맥동이 온몸으로 퍼지고 살아 있다는 감각이 전신을 여실히 사로잡던.

    내일의 삶을 꿈꾸게 만들던 순간.

    오필리아에게는 그런 순간들이 몇 개 있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내일을 꿈꾸게 만드는 원동력들이.

    ‘생각해 보니 전부 이번 생의 일이네.’

    그리고 대부분 알레이와 함께한 순간들이었다.

    가장 처음이 발코니에서 떨어져 알레이에게 안겼던 때였고, 그 다음은 라펠을 밝혔을 때였으니.

    생각이 그에 닿자 속이 조금 울렁이며 불편해졌다. 미룬 선약에 대한 것 때문이었다.

    ‘쪽지, 봤겠지?’

    오필리아는 결국 오늘 저녁까지도 알레이를 만나지 못했다.

    여전히 치료소에도 없었고, 방에도, 서재에도 없었다.

    결국 오필리아는 라딘 성을 돌아다니다 지쳐 알레이의 방에 쪽지를 남기고 왔다.

    일이 있어 소등 직전에나 돌아올 것 같다는 내용의 쪽지.

    하지만 이미 알레이를 문전 박대한 전적이 있었기에 마음이 불편한 것은 감출 길이 없었다.

    ‘얼른 끝내고 돌아가자.’

    서둘러 아리엘을 만나고 돌아가면 될 일이라고, 오필리아는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머잖아 약속 장소에 약속된 인원들이 속속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므로.

    “오필리아, 생각보다 일찍 왔는데.”

    산테가 오필리아의 앞으로 훌쩍 내려앉으며 싱긋 웃었다.

    “방으로 데리러 갔는데, 헛걸음했어.”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성 밖으로 나올 일이 있어서 나왔다가 바로 왔거든요.”

    정확히 말하자면 쪽지를 남기고 마지막으로 치료소에 알레이가 없는지 한 번 찾아보러 가느라고 그랬다.

    “그러고 보니 산테, 혹시 오늘 오후에 알레이를 본 적은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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