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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한 적 없다-84화 (84/118)
  • 제84화

    아벨의 말에 산테는 으쓱하며 대꾸했다.

    “그렇겠지? 영감은 수명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나 죽기 전에 네가 말을 돌려서 하는 법을 좀 익혀야 할 텐데 말이다. 어떻게 그 세월을 살면서 그것 하나 익히질 못하는 건지.”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그는 수장이었고, 강력한 세이렌이었다. 그런데 미개한 인간에게까지 말을 굳이 돌려서 할 필요가 있나?

    “시간이 지나면 너도 배울 일이 있겠지. 필요성을 깨달을 일도 있을 테고.”

    산테는 당시 아벨의 말을 귓등으로 들었다.

    자신이 살아온 세월이 몇인데, 고작 백 년도 살지 않은 새파란 햇병아리 영감한테 듣는 이야기가 와 닿을 턱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벨은 분명 범상치 않은 인간이었다. 그가 한 말이 모두 적중한 것으로 미루어 보자면 특히 그랬다.

    알레이는 그의 말대로 아벨을 뛰어넘는 대마법사가 되었다.

    그는 타고난 마력 양부터 마법에 대한 시각까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리고 나도 많이 바뀌었군.’

    20년도 채 되지 않는, 긴 세이렌의 수명에서는 찰나나 다름없는 시간.

    산테는 아벨의 말대로 말을 돌려 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 필요를 어느 순간 깨달았으므로.

    계기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으나 분명한 것이 하나 있었다.

    그 깨달음이 삶에서 한 번쯤은 필히 찾아드는 종류라는 것이었다.

    아마 인간들은 인생이 짧은 만큼 그 깨달음을 세이렌보다 훨씬 빠르게 얻는 모양이었다.

    산테는 그 깨달음 이후로 인간을 미개한 종족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알레한드로라는 괴물을 만나자 종족 간의 차등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지 싶어졌고.

    삶이 조금은 허무해졌다.

    왜 자신이 만난 많은 노인들이 그토록 관조적인 눈동자를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은 기분.

    만약 그것을 알지 못했더라면 알레이와 친구처럼 지내겠다는 발상은 처음부터 하지 못했겠지만,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알레이는 독보적인 인간 군상이기는 했다.

    자신이 종족을 초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본인 또한 알고 있어서일까.

    그는 매사에 너그러웠다. 마냥 물렁하기만 한 인간인지 묻느냐면 결코 아니라는 대답을 돌려줄 수 있겠지만, 산테는 알레이를 겪은 뒤 아벨이 어째서 그렇게 단언할 수 있었는지 깨달았다.

    그는 인간의 이해 범주를 벗어난 산테를 받아들였고, 자신을 질시하는 이들을 이해했다.

    뭐, 이해한다고 해서 그들이 질투로 저지르는 짓들을 묵과했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포용력과 여유만큼은 여느 인간에게서도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그래, 분명 그랬지.’

    그런데 그 알레한드로가 이런 꼴이라니.

    오필리아에게서 멀어지겠다고 해 놓고 완전히 멀어지지도 못해 그 위의 망루를 지키고 서서 대화를 듣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부조리한지.

    산테는 헛웃음을 지었다.

    “들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네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나 싶어서 묻는 거야. 날 세우지 마라.”

    “…….”

    “이게 벌써 며칠 째야? 어제도, 그제도 계속 이러고 있더니.”

    알레이가 오필리아에게 거리를 두며 밤에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다는 뜻을 전할 때, 그가 사용한 핑계는 불면이었다.

    -코르넬리에게 수면 유도 마법을 부탁할 예정입니다. 불면을 더 놔두면 건강에 이상이 갈 것 같아서요.

    그렇게 말하니 오필리아가 무슨 말을 할 수나 있었을까?

    알레이는 오필리아를 잘 알았고, 그녀가 거절하지 못할 핑계를 댔다.

    그 결과 두 사람의 야심한 만남은 끝을 맺었으나, 알레이의 불면은 여전했다.

    그러나 가까이 가지 않겠다는 결심은 여전하여.

    알레이는 이 자리를 매번 지키곤 했다.

    망루 위에서 동이 터 오는 것을 보면서, 바닷바람이 알레이의 머리칼을 끈덕지게 붙들어도 발을 뗄 줄 모르는 석상처럼 그렇게.

    물론 오필리아가 이를 알 수 있을 리가 없었지만, 세이렌은 야행성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거의 잠을 자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옳으리라.

    마력은 곧 체력이 되기도 해서, 마력이 많은 생물들은 대개 며칠씩 잠을 자지 않아도 괜찮았다.

    산테도, 알레이도 그러했다.

    덕분에 산테는 밤에 라펠 사냥을 나갔다가 돌아올 때 매번 망루 위의 알레이를 마주하곤 했다.

    그리고 그는 늘 저런 표정을 짓곤 했다.

    “……오필리아에게는 말하지 마라.”

    이렇게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자신이 못 견디게 싫다는 표정.

    산테는 알레이의 낯을 가득 메운 저 불쾌함의 근원이 무엇인지 날카롭게 알아보았다.

    그건 자기혐오였다.

    알레이는 번민하는 낯을 손바닥에 묻었다가, 한숨을 토하듯 입을 열었다.

    “분명 싫어할 거야. 끔찍하다고 생각하기라도 하면…….”

    “넌 내쳐지겠지.”

    “일깨워 줘서 고맙군.”

    전혀 고맙지 않은 표정으로, 알레이는 짓씹듯 말했다.

    이런 순간에조차 친구에게 험한 말은 주워 삼키지 못하는 알레이가 퍽 안쓰럽기도, 우습기도 해 산테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내가 네 비밀을 벌써 몇 개나 지키고 있는지 모르겠다. 좀 더 고마워하지 그래?”

    “장난은 적당히 치지. 그럴 기분 아니니까.”

    “그럼 오필리아한테 가서 용건을 말하지 그래.”

    산테가 팔짱을 꼬며 둥실 떠오른 허공에 앉았다.

    마력을 이용해 부유하는 덕분에, 그는 라탄 그네에 앉은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팔짱을 낀 산테의 손 중 하나가 알레이를 비쭉 가리켰다.

    “오필리아의 선약, 너잖아?”

    “……어떻게 알았지?”

    “너희는 내가 살아온 세월을 너무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걸 몇 번이나 입에 올려 줘야 할지 모르겠군.”

    내가 아셀로 삼형제 같은 얼뜨기들인 줄 아냐며, 산테가 쓰게 웃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조금 전 선약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의 오필리아가 떠오른 채였다.

    -산테, 노을이 질 때 다시 만나요.

    -선약은 미루는 건가?

    -어쩔 수 없으니까요. 다녀와서 봐야죠.

    그렇게 말하며 서산을 돌아보던 오필리아.

    목소리는 평온했으나, 그 낯에 담긴 아쉬움과 그리움은 선명했다.

    아마 본인은 자신이 그런 표정을 하고 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때로는 겉으로 볼 때 더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이 있는 법이다.

    그리고 산테는 특히 그런 것을 읽어내는 데 특화된 사람이었다.

    그는 눈치가 없거나 예의를 모르는 게 아니라, 굳이 그걸 지켜야 할 필요를 모르는 축이었으므로.

    그가 살아온 세월은 오필리아가 시간을 거슬러 와도 다 채울 수 없는 것이었고, 그동안 겪어 온 낯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한때 인간들 틈에서 살기도 했으므로.

    산테가 인간 사회에 섞여 사는 방법은 간단했다.

    사람을 몇 번 죽여 주거나 편지를 배달해 주는 것으로, 그는 손쉽게 고위 권력자의 측근이 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한 번은 고위 권력자의 또 다른 측근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 측근은 산테의 도움을 받던 고위 권력자를 사랑하며, 또 충성하는 사람이었다.

    문제는 그 고위 권력자가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는 부분이었지만.

    -뭐 하러 그렇게 밖을 봐? 내가 말했잖아. 그놈은 너한테 오지 않을 거라니까.

    -알아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감정들도 있답니다. 당신 같은 사람은 아마…… 모르겠지만.

    -인간들은 세이렌을 무지렁이 취급하는 게 취미인가? 어딜 가도 모를 거란 이야기만 들으니 이젠 그것도 신물이 나는군.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에 발끈하지 않는 걸 추천합니다, 세이렌. 그럴수록 당신이 얼마나 얕은 사람인지 드러나니까.

    측근의 말투는 썩 공격적이지는 않았지만, 유난히 깊게 산테의 속을 후벼 팠다.

    시간이 50년은 더 지난 일인데도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 걸 보면 정말 아픈 기억이었던 모양인지.

    그래서인지, 그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아도 얼굴만큼은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때도 서산으로 해가 기울고 있었다.

    하오의 햇살이 투명하게 그의 낯을 조명했다. 오지 않을 상대를 기다리는 낯에는 당시 산테가 알아볼 수 없는 감정들이 잔뜩 떠올라 있었다.

    ‘간만에 떠올랐군.’

    그것은 산테가 누군가의 사랑을 지켜본 첫 번째 경험이었다.

    그 막연한 애정과 그리움은 그 측근과 오필리아의 낯에 공통되게 떠올라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 몰라볼 수 있을까?

    오필리아가 그런 표정을 할 때는 알레이를 볼 때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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