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화
산테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둔재라고 할까. 다른 이들에 비해서 그런 방면으로 눈이 덜 트여 있는 거야.”
“그럼 돌연변이인가요?”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지. 인간들도 모두가 같은 능력치를 타고나는 건 아니지 않나? 나는 그런 시각이 세이렌 중에서도 제법 트여 있는 편이지만 디안과 맞붙으라고 하면 자신이 없는데.”
마법식에 대한 선천적인 시각이 없는 인간들 틈에서 알레이처럼 뛰어난 마법 능력치를 지닌 괴물이 태어나는가 하면.
선천적으로 마법에 대한 친화력과 시각 등이 뛰어난 인어들 사이에서도 얼마든지 평범한 인간 못지않게 마법에 대한 능력치가 낮은 개체가 태어날 수도 있는 셈이다.
‘그리고 아리엘은 후자에 속하지.’
그렇잖아도 어머니를 잃고 어렵게 얻은 늦둥이 막냇동생인데, 거기에 마법 능력까지 거의 없다시피 하니 아리엘의 언니들이 지느러미를 동동 구를 법도 했다.
문제는 아리엘이 그런 능력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여 아리엘은 마법과 뭍에 관련된 것들이라면 전부 배제당하며 지냈다.
“아리엘이 어릴 때부터 수면 위에 대한 환상이 심해서 그 언니들이 애를 먹었다더군. 마법을 배우면 멋대로 나갈까 봐 마탑 근처에는 가지도 못하게 했대.”
오필리아는 이 말을 듣는 순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길이 열리는 기분이었다.
왜 진작 아리엘과 마탑을 연관 짓지 못했을까에 대한 의문.
마법과 뭍에 대한 모든 것들을 제한당하며 지낸 아리엘이 처음으로 성인이 되는 생일을 맞아 자유를 찾았을 때.
어디를 가장 가고 싶어 했을까?
‘간단하지.’
뭍으로 올라가지 않는 이상 유일하게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이 여럿 모여 살고 있는 곳.
그녀는 분명 마탑으로 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가는 길에 이안의 난파를 목격했으리라.
그러니 만약 이 예상이 들어맞기만 한다면, 모든 것은 분명해진다.
‘이안이 난파를 당한 지점.’
유난히 사고가 없으나, 알레이가 해류를 건드려 공교롭게도 사고가 났던 바로 그 해역이.
마탑이 있는 곳이다.
‘그러니 빨리 아리엘을 만나서 가설을 확인해야 해.’
그리고 마탑이 있는 곳을 유추해 확인해야 했다.
그것만 해낸다면 분명 어렵지 않게 마탑으로 갈 수 있으리라.
‘할 수 있어.’
그러고 나서 보다 편한 마음으로 알레이를 만나면, 그들의 관계도 한결 간단해지지 않을까.
그때가 되면 알레이의 쓸모가 제게 그렇게까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될 테니까.
‘적어도 내가 그가 필요해서 그리운 건지, 그라는 사람이 그리운 건지는 확인할 수 있겠지.’
오늘이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이다.
오필리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상념을 정리했다.
“산테, 노을이 질 때 다시 만나요.”
“선약은 미루는 건가?”
“어쩔 수 없으니까요. 다녀와서 봐야죠.”
오필리아는 책상을 짚은 채 뒤를 돌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해가 서산으로 기우는 오후.
모든 것이 순조로운 기분이 들었다.
* * *
오필리아의 방 창문을 나와 산테는 가볍게 하늘로 도약했다.
물속에서 헤엄을 치듯 산테는 창공을 제멋대로 휘저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거대한 금빛 날개가 한 번 오르내리자 그는 구름을 찌를 듯한 침엽수림보다도 높게 날아올랐다.
사실 라딘 성의 높이가 제법 되었기 때문에 그리 높은 것은 아니었다.
기껏해야 성벽의 망루에 도달할 수 있을 즈음이 될까.
산테는 오필리아의 방 바로 위의 망루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다 들었지, 디안.”
그리고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서 있던 제 친구에게 말을 건넸다.
알레한드로 디아뮈드, 그는 산테가 평소 보지 못했던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들었다는 게 중요한가?”
괴로운 듯, 혹은 화가 난다는 듯.
수려한 이목구비에 붙잡힌 음영이 기세등등하게 낯을 물들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날 선 바닷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흔들어도, 티타임을 맞아 퍽 날카로워진 햇살이 꿀 같은 금안을 벌 쏘듯 쏘아 대도 그는 미동조차 없이 서 있었다.
수심이 물든 아이홀 사이에는 주름을 잡은 채.
알레이의 미간이 저렇게까지 경첩의 태를 띨 줄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산테로서는 그 차이가 퍽 재미있을 따름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알던 알레이는 무슨 짓을 해도 헛웃음을 짓던 놈이었으니까.
‘무슨 살아 있는 바윗덩이라도 되는 줄 알았더니.’
바윗덩이라는 건 비단 그 몸이 단단하다는 뜻이 아니었다.
무얼 해도 동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강자 특유의 여유이기도 했고, 알레한드로라는 인간상이 가지는 선함의 발로이기도 했다.
산테는 알레이와 친구였지만, 알레이를 키운 자를 알고 있기도 했다.
아벨 디아뮈드. 선대 마탑의 주인이자 고아였던 알레이를 거두어 키운 사람.
산테는 문득 아벨이 알레이를 거두어 왔던 때를 떠올렸다.
“마탑이 웬일로 소란스럽나 했는데. 아이를 하나 거두어 왔다면서. 영감?”
“영감이라, 나보다 나이를 몇 배는 먹은 놈한테 듣고 싶은 말은 아닌데.”
“억울하면 영감이 나보다 외모가 젊어야지.”
당시 산테는 지금보다 훨씬 제멋대로였기 때문에, 다른 인간이 보았더라면 무슨 저런 무례한 자가 다 있느냐 물었음 직한 말본새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 자리에 그런 사람은 없었고, 있다고 하더라도 감히 그런 소리를 내뱉지는 못했겠지만.
아벨 디아뮈드는 늙은 마법사다운 흰 수염을 가지고 있었고, 그보다 더 어울리는 너그러운 마음씨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래, 편한 대로 부르거라. 바람을 통제하려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을 테지.”
그는 세이렌을 곧잘 바람이라 부르곤 했다.
아마 세이렌의 자유로움이 바람을 연상시켜서 일수도, 그들이 창공을 휘젓고 다니는 꼴이 바람을 닮아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산테는 그 이명이 퍽 마음에 들었다. 아벨을 제법 좋게 본 이유 또한 그 호칭 때문이었다.
“그래서 당신이 거둬 온 그 어린놈은 어디에 있는데? 나한테도 보여 주지 그래? 당신과 정말 연 하나 없는 놈이야? 혹 밖에서 낳아 온 새끼인 건-”
“말 한마디 못 가리는 놈한테는 내 아들을 보여 줄 생각이 없으니 그만 돌아가거라.”
“알겠어, 알겠어. 농담이었어.”
아벨이 강경하게 나오자 산테는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물론 악동 같은 짓궂은 미소는 여전했지만.
“그냥 궁금해서 그래. 영감 어디 연고 하나 없지 않아? 결혼도 안 하고, 따로 가족도 없고. 그런데 대뜸 애를 하나 거두어 왔다니까 궁금하잖아.”
“……그래, 네 말이 맞지. 그 애를 거둔 건 충동이었다. 제법 크게 될 싹이 보였거든.”
“그렇게 말하니까 더 궁금한데. 그렇게 비범한가? 영감만큼?”
“아니, 그 애는 나를 뛰어넘을 거다.”
산테는 그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재차 다가가 물었다.
“너무 단정 짓는 거 아냐? 영감, 나는 마탑의 주인을 여럿 봐 왔어. 내가 수장이 되기 전부터 된 이후까지.”
그리고 아벨 디아뮈드는 현존하는 마법사들 중 최강이라 단언할 수 있었다.
지닌 마력 양에서는 선대 마탑의 주인들 중 더 비범했던 자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마법에 대한 선천적인 시각이 대단한 자였다.
“영감보다 더 뛰어난 마법사가 바로 다음 대에 태어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제 새끼라고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지? 그거 인간들 말로는 콩깍지라고 하던데. 아니면 노망이 들었거나.”
“못 하는 말이 없다, 이놈아.”
아벨은 타박하면서도 낄낄거렸다. 제 생각에도 자신보다 뛰어난 마법사를 예언하는 일이 퍽 우스웠던지.
덕분에 산테는 제법 억울해졌다.
“타박은 웬 타박이야? 영감도 그렇게 생각하잖아? 흑마법이라도 쓰지 않는 이상 영감을 이길 방법은 없다니까.”
산테는 그렇게 뱉어 놓고는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걔가 흑마법을 쓸 그릇이라는 뜻인가?”
이번에는 한 방 먹었다.
검지를 까딱여 불시에 산테 위로 물을 부어 버린 아벨이 쯧쯧 혀를 찼다.
“아주 저주를 하거라, 저주를. 다른 놈은 몰라도 내 아들은 그럴 놈이 아니다. 내가 장담하지.”
“으, 다 젖었잖아! 뭘 믿고 그렇게 신뢰하는 건데?”
“글쎄. 그 애의 인간됨? 별로 긍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만큼 살다 보면 사람을 보는 눈이라는 게 생기기 마련이란다.”
그리고 그 인간됨이니 뭔지가 아벨을 사로잡은 모양이었다.
“뭐, 너무 진지하게 여기진 말거라.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렇다는 거니까. 아마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네가 볼 수 있겠지.”
내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