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물론 얼굴을 보는 것이야 같은 성 안에서 지내면서 기회가 많았지만, 그녀가 바라는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둘만의 시간을 원했다.
해변에서 손을 맞잡았을 때 그러했듯, 그들이 밤을 보낼 때 그러했듯.
‘그러면 이 감정의 근원도 알 수 있을까.’
오필리아는 착잡함에 잠시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맞은편에 선 산테에게는 다른 의미로 해석된 모양이었다.
오필리아를 지켜보고 있던 산테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손을 딱, 튕겼으므로.
“오늘따라 기분이 썩 나빠 보이는데, 공주님.”
“……아, 미안해요.”
“알고 있다니 다행이군. 내가 이렇게 애를 썼는데 반응이 없어서 적잖이 실망할 뻔했어. 난 이만하면 칭찬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는데.”
공주님 기준을 맞추기에는 좀 모자란가?
산테가 느슨히 미소 지으며 묻자, 오필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에요. 정말 고마워요.”
“그럼 왜 그렇게 죽상인지 좀 묻지. 무슨 일 있었어?”
“아뇨, 아리엘을 만날 생각을 하니까 머리가 복잡해져서요.”
오필리아는 능숙하게 거짓말을 했다.
사실 산테에게는 정말로 고마웠다. 아리엘과 만나는 것이 최대의 난제였던 지금,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해 준 셈이니 고맙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아리엘이 뭍으로 나가지 않을 수 있도록 회유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은 것이 애로 사항이기는 하지만.
아리엘과 만날 길이 요원했던 오필리아로서는 이 정도로도 감지덕지했다.
‘하지만 정말로 걸리기는 하네.’
생각할수록 아리엘과의 만남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오필리아의 마음을 한층 더 짓눌렀다.
오필리아는 아리엘과 이안의 만남을 주선해야 하는 입장이었으므로.
‘괜찮을지 모르겠네.’
아리엘이 이안을 만나고 뭍으로 가고 싶다는 열망이 더욱 강해지면 난처할 텐데.
하지만 오필리아는 아리엘의 언니들이 원하는 대로 아리엘을 억누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아리엘에게 뭍으로 나오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뭍으로 나오고 싶어 한다는 건 결국.’
그걸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지.
과연 그 욕망의 기저에 있는 감정이 이안에 대한 사랑뿐일까?
오필리아는 아리엘을 처음 보았을 때, 그녀가 자신과 닮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것은 비단 외모에 치중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리엘은 자신과 같은 것을 원하고 있었다.
닿을 수 없는 곳에 대한 갈망.
오필리아의 경우는 그것이 마탑이었고, 자유였다. 그러나 아리엘에게는 그것이 뭍이었으리라.
“그래서 산테, 약속은 언제로 잡았나요?”
“만월 저녁, 노을곶.”
오필리아는 달력으로 눈을 돌렸다가, 제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문질렀다.
“만월이라면 오늘이 아닌가요?”
“일은 최대한 빠르게 해치우는 게 좋지.”
부정할 생각조차 없어 보이는 산테의 행동에 오필리아는 헛웃음을 지었다.
‘알레이를 오늘 만나기로 했는데.’
하필 아리엘을 만나는 것 또한 오늘이라니.
산테를 원망하려는 것은 아니었으나, 유난히 알레이를 만나는 일이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어쩔 수 없지.’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면 아리엘 쪽이다. 이제 모든 것이 코앞이었으므로.
“해 진 뒤에 선약이 있었는데, 미뤄야겠네요.”
“선약이 있었다고? 내가 너무 급하게 일정을 잡아 왔나.”
“괜찮아요. 조금 늦게 보면 되죠. 그보다는 아리엘을 만나는 게 더 중요할 것 같아서요.”
“나야 빠르게 처리하는 걸 좋아해서 그랬다고 하지만 너는 뭐가 그리 급해서?”
산테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묻자, 오필리아가 책상 한편으로 밀어 두었던 지도를 꺼내 들었다.
여러 가지 화살표와 표식이 어지럽게 그려져 있어, 기술 좋은 항해사가 아니라면 반도 알아보지 못할 지도.
아리엘을 만나는 데 그토록 매달리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안과 아리엘을 만나게 해 주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본의는 좀 더 간단했다.
“아리엘은 마탑의 위치를 알아낼 마지막 열쇠예요.”
“오해하는 것 같은데, 아리엘도 마탑의 위치를 발설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야.”
“당연히 알고 있어요. 내가 물어보려는 건 마탑의 위치가 아니니까.”
산테가 한쪽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그럼 대체 무엇을 물어보려고 굳이 아리엘을 찾으려는 것이냐는 듯.
의아함을 표하는 산테를 마주한 채, 오필리아는 고요히 입을 열었다.
“아리엘만 알고 있는 사고가 있어요.”
그리고 그 사고가 자신을 마탑으로 데려가 줄 열쇠가 될 것이다.
* * *
바다에 대해 묻고자 한다면 사실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많이 있었다.
아리엘보다는 아리엘의 언니들이 항로에 대해 더 빠삭할 것이고, 산테 역시 바닷속 물길까지는 알지 못해도 그 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정통할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필리아가 굳이 아리엘을 만나야 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아리엘만이 답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필리아는 자신이 여러 화살표와 표식으로 더럽혀 둔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지도를 더럽힌 표식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붉은색으로 된 가위 표식.
‘해류의 충돌 없이도 사고가 유난히 많이 일어나는 항로지.’
물론 사고라는 것이 비단 해류의 흐름이 아니더라도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지만, 오필리아는 그런 당연함이 사람의 눈을 가리는 그림자라고 생각했다.
사실 배 위에서는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 잘 알 수 없으니까.
어느 지점에 세이렌이 등장하는지, 어느 지점에 폭풍우가 휘몰아치는지 기록할 방법 역시 많지 않은 셈이다.
‘그런 맹점에 마탑이 가리어 있을 거야.’
오필리아는 확신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필리아는 한 가지 가능성을 더 고려해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푸른색으로 된 원 표식이었다.
‘이상할 정도로 사고가 거의 없는 항로.’
바다 위에서라면 어느 항로를 가든 폭풍우를 비롯한 어느 정도의 위험은 필연이었다.
그러니 모든 항로는 한 해에 한 손을 넘어가는 횟수의 사고 전적을 가지고 있는데.
‘이조차도 없는 항로가 몇 개 있단 말이지.’
그리고 오필리아는 이 또한 간과할 수 없는 맹점이 될 거라 직감했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잉크가 마른 지 한참 된 붉은 표식과 다르게 푸른 표식은 아직도 잉크가 충분히 착색되지 않은 채였다.
기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이다.
‘당연히 마탑이 있는 지점은 사고가 많이 일어날 거라 생각했어.’
하지만 며칠 전 코르넬리와 나눈 대화가 그녀의 맹점을 일깨웠다.
만약 마탑의 결계에 직접 배를 부딪친다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통과합니다.
-단단하게 되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 식으로 가시화된 결계라면 진즉 들통이 났을 겁니다. 장소를 숨긴다는 건 생각보다 까다로운 마법이라서요.
어떤 감각으로도 찾을 수 없어야만 장소를 숨길 수 있다고, 코르넬리는 말했다.
그러니 다시 말하자면 일반인에게는 마탑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셈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탑은 분명 존재하고, 그 부피도 상당하겠지.’
마탑 뿐만 아니라 세이렌의 군락지까지 모두 결계로 덮여 있다고 했으니 그 범위가 작지 않은 섬 하나 정도 크기는 거뜬히 넘길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그 지역을 단숨에 통과할 수 있다면, 겉으로 보기에 어떨까.
‘분명 사고가 이상할 만큼 없는 것처럼 보이겠지.’
바로 그 부분이 마탑의 결계가 가진 맹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붉은 표식과 푸른 표식 중 한 가지가 마탑의 위치를 유추하는 열쇠가 될 텐데.
이야기가 이쯤 되면 혹자는 이렇게 의문할 것이다.
그래서 아리엘과 이 표식이 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지.
간단하다.
아리엘이 이안을 구한 날과 그 항로를 떠올려 보는 것이다.
그날 아리엘이 어디로 향했을지.
‘아리엘은 내내 바다에 갇혀 살았어.’
산테의 말로는, 아리엘은 언니들에게 과보호를 받느라 제대로 마법을 배우지도 못했다고 했다.
물론 인어나 세이렌 같은 인외 종족들에게는 선천적으로 자연의 마법식을 읽어 내는 눈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리엘은 조금 특이한 경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