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화
첫 마디는 이것이었다.
“당신이 말한 것들에는 너무 많은 책임이 필요해요. 또 위태롭고. 높은 자리란 대개 그렇잖아요.”
권력을 가지면 훨씬 자유롭게 살 수 있겠지만, 그것은 언젠가는 스러질 자유라고 오필리아는 말했다.
권력은 영원할 수 없고, 앉은 자리가 높을수록 모순되게도 시야는 좁아지기 마련이라서.
눈 먼 권력자들의 최후가 어떤지를 생각한다면 그리 놀라운 이야기도 아니었다.
“나는 나를 잘 알아요. 나는 욕심이 정말 많은 사람이에요.”
“그건 놀랍군요.”
가장 무욕에 가까울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알레이가 놀람을 표하자 오필리아는 대답 대신 미소 짓기만 했다.
“내가 욕심이 없었더라면 당신을 가까이 두지도 않았겠죠.”
이 땅에 가지고 싶은 게 없으니 무욕인 것처럼 보인 셈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미소가 의미하는 바는 아마 그것이었으리라.
오필리아가 원하는 것은 적어도 이 땅에 없었다. 혹은 물질이 아니거나.
“한때는 나도 그런 걸 원했어요. 아무래도, 황녀잖아요. 내 주변은 언제나 화려했거든.”
부와 명예를, 권력을 원했다. 아무도 자신을 무시할 수 없게.
그것들이 자신을 자유롭게 만들어 주고, 행복하게 만들어 줄 거라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고, 그녀는 말했다.
“감정도 변하고, 사람도 변해요. 어떤 보석도, 어떤 직함도 나를 자유롭게 해 줄 수는 없었어요.”
일평생 굴레에 매인 삶.
딱 한 번 욕심을 내어 움켜쥔 미래가, 그 말로가 어떤지 오필리아는 보고 말았다.
그래서 그녀는 모든 게 지겨워졌다고 했다. 황녀라는 이름도, 하물며 갖은 감정들도.
“그래서 처음에는 죽으려고 했죠. 그러지 못했고.”
“내 탓입니까?”
“당신 덕분인 거죠.”
오필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언제나 불처럼 타오르는 것 같았던 여자는,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바람 한 점 없는 바다 같았다.
그래. 바다 같았다.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속을 알 수가 없고, 원인을 모를 격랑을 늘 품고 있는 여자.
밤을 먹어 온통 검어지는 시각에도 달빛 흩뿌리며 아름답다는 소리를 기어코 자아내게 만드는 여자.
일몰의 적색과 한낮의 청색을 모두 담고서 시선을 죄 앗아가는.
오필리아의 소망은 그녀 본인이 욕심이 많다 한 것과 다르게 소박했다.
내가 하는 모든 선택이 나의 본의로 이루어질 수 있기를.
그 어떤 시선도 나를 위협할 수 없기를.
자유로울 수 있기를.
어느 누가 대륙의 패권을 쥘 수 있는 기회를 눈앞에 두고 고작 이런 것을 소망할까.
오필리아가 아니고서야, 과연 그 누가.
“알레이. 새장 속의 새는 자유를 바라지 않아요. 족쇄가 익숙해지면 그게 없는 걸 더 허전해하기 마련이라서요.”
자유는 생각보다 공허하다. 창공에 홀로 떨어진다면 으레 두려움을 느끼기 마련인 것처럼.
아마 세이렌처럼 처음부터 창공과 자유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이들에게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리라.
“알레이, 나는 자유롭고 싶어요. 그걸 두려워하지 않고 싶어요. 그럴 수 있을까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당신과 있는 동안 그걸 두려워해 본 적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마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오필리아는 말했다.
정말 별것 아닌 이유였다. 눈앞에 놓인 명확하고 간편한 길을 두고 돌아가는 것치고는, 정말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였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을까. 이제 알레이는 오필리아를 완전히 이해해 버렸다.
그녀에게 마탑은 자유였던 셈이다.
막상 발을 들이면 기대했던 것과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오필리아 또한 알고 있었으나 그녀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왜? 마탑에는 알레이가 있었으니까.
오필리아를 자유롭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자, 그녀의 두려움을 사라지게 하는 사람.
그 맹목적인 신뢰와 호의가 말문을 막히게 했다. 그 앞에서는 제가 하는 모든 고민들이 부질없게만 느껴졌다.
그 솔직함과 올곧음이 그랬다.
어떻게든 도망치고 싶어 하는 자신과 달리 오필리아는 자리를 지켰다.
그러니 어떻게 그가 오필리아를 두려움 앞에 외면할 수 있을까.
설령 자신이 기억을 되찾고, 끔찍하게 후회하는 순간이 돌아오더라도.
그것이 두려워 도망칠 수는 없었다.
내내 오필리아를 피해 왔던 것이 무색하게도, 이안과 마주하자 그 사실이 한층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하여 알레이는 오필리아에게로 향했다.
그간 거리를 두었다고, 미안하다고.
나는 당신에게 버려질 것이 두려웠다고 고백하려 했다.
자신이 대체 과거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나는 당신 앞에서 늘 죄책감을 느끼는지 물으려 했다.
그렇게 어렵게 마음을 먹어 오필리아의 방문을 두드렸을 때.
“……지금은 손님이 있으니 나중에 찾아와요.”
거절이 돌아왔다.
먼저 온 손님이 있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것이 어째서 그토록 망연하게 느껴졌는지.
어쩌면 그것은 문 너머의 목소리가 자신을 조금도 반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꼈던 탓일지도 모른다.
자신을 불편해하고, 방문을 난처해하기까지 하는.
알레이는 미간을 찌푸린 채 문에 이마를 기댔다. 놓지 못한 문고리의 부피가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오래 기다려야 하는 겁니까?”
“좀 걸릴 것 같아요. 해 지고 보죠.”
해가 지기까지는 몇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제가 감히 불평할 수는 없었다.
알레이는 차마 알겠다는 대답도 뱉지 못하고 문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귀까지 붉어진 낯이 울상을 하고 있었다. 보는 이도 없건만 알레이는 제 낯을 그림자에 가두려는 것처럼 팔을 들어 낯을 가렸다.
민망했다.
당연히 오필리아가 자신을 맞아 줄 거라 기대했던 것이 부끄러웠다.
애써 결심한 것이 파삭 깨지는 것이 느껴지고, 꼭 그만큼 추락한 심장이 목울대를 압박하는 것 같았다.
그 모든 실망이 알레이가 가진 마음의 깊이를 대변하고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깊고 짙은지, 그리고 또 얼마나 어두운지.
가장 끔찍한 것은 그토록 검은 마음이 무엇으로 명명되는지, 더는 부정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대개 그 감정이 대단히 극적인 순간에 찾아온다고 믿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초라하다.
해가 지고 달이 뜨는 당연함 속에서 바람 한 줄기 불어온 것에 불현 듯 깨달을 수도 있고, 글을 쓰다 잉크 방울 튄 것을 보고 깨달을 수도 있는 것.
하물며 뻔질나게 드나들던 방의 출입 한 번을 거절당한 것으로도 충분하다.
사랑이란 왜 이다지도 비루한 순간에 가장 크게 찾아드는지.
‘이런 식으로 깨닫고 싶지 않았는데.’
이런 식으로 시작할 생각이 없었는데…….
알레이는 제 낯을 두 손으로 감쌌다.
초라한 자신을, 이 감정을 견딜 수가 없었다.
* * *
탁.
베일란은 문을 닫고 오필리아의 집무실을 나왔다.
그의 차갑고 평온한 낯에는 미처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의구심이 깃든 채였다.
‘아무래도 수상한데.’
조금 전 오필리아와 대화 중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을 때.
잠깐 방문을 열어 주고라도 말할 수 있는 것을, 오필리아는 문을 기어코 닫은 채 상대를 돌려보냈다.
-밖에 선 게 누구입니까? 저는 개의치 않으니 들어오게 하셔도 좋습니다.
-아뇨. 손님이 있는데 다른 사람을 들이는 건 예의가 아니죠. 돌려보냈습니다.
오필리아가 문을 등지고 돌아서며 입을 열었다. 방금 알레이에게 말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딱딱한 목소리로.
방금 베일란이 노골적인 경고를 전했으니 저렇게 날카롭게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베일란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저는 용건이 끝났습니다. 전하께서 허락하신다면 그만 임시 신전으로 돌아가 쉴 예정이었습니다.
-그런가요? 미처 몰랐군요.
베일란의 말에 오필리아가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던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대꾸했다. 여전히 상대를 돌려보낸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는 듯.
-오느라 고단했을 텐데 그럼 이만 들어가 보시죠.
심지어 그녀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빠르게 베일란에게 축객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마치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조금 더 추궁해 볼 것을 그랬나.’
다른 때였더라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겠으나,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