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구한 적 없다-77화 (77/118)
  • 제77화

    고작 이따위 남자가 오필리아의 과거를 차지했다는 사실에 속이 뒤집히는 것 같다. 그러나 어느 면으로 보기에도 그가 자신보다 훨씬 오필리아에게 잘 어울리는 상대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어 더욱 아팠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이런 것뿐이었다.

    오필리아의 당부를 빌미 삼아 제 사적인 복수를 하는 것.

    이안을 움켜쥔 마법이 한층 더 강하게 그를 옭아매었다. 폐부가 눌려 거칠게 숨을 토해 낸 이안이 죽일 듯이 알레이를 노려보았지만, 들쥐의 발악보다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래도 조금 더 하면 이안의 갈비뼈가 멀쩡할 거라는 보장이 없을 것 같았다.

    알레이는 마력을 거두었다. 그의 의지대로 이안을 매섭게 옭아매던 사슬은 금세 공기 중의 마나와 다를 바 없는 상태가 되어 그에게로 돌아왔다.

    풀려난 이안이 거칠게 기침하며 비틀거렸다.

    “쿨럭, 쿨럭!”

    “이만하면 제 말뜻을 알아들으셨을 거라 믿습니다. 앞으로는 괜히 눈앞에 알짱대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그렇게 몸을 돌리고 성내로 들어가려던 찰나. 몇 차례 기침하며 숨을 고른 이안이 입을 열었다.

    “하, 알레한드로. 너야말로 이 곳에 있을 이유가 있나?”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요.”

    “네 말마따나 그렇게 대단하신 분께서 왜 이 시골에, 얻어먹을 것 하나 없는 황녀 옆에 붙어 있느냐고.”

    뻔한 도발이었다. 그대로 무시하면 될 도발.

    “무엇 하나 두려울 것 없다는 것처럼 구는 주제에 제대로 나서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떠날 생각도 없고.”

    그러나 이안의 말은 너무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마치 알레이의 속내를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만약 마법의 종류에 독심술에 대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지 못했더라면 오히려 알레이 쪽에서 되물었을 것이다. 혹시 속내를 읽을 수 있느냐고.

    하지만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레이는 알고 있었다.

    이안이 그토록 알레이의 속내를 잘 짚어 낼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할 줄 아는 게 맴도는 것밖에 없는 거지, 너도.”

    이안의 사정 역시 알레이의 것과 동일했으므로.

    알레이를 공격하는 이안의 말은 곧 스스로를 찌르는 것이기도 했다.

    “……당신을 나와 동일 선상에 두지 말아 주시죠.”

    그걸 왜 넘길 수가 없었던지.

    “당신과 내가 같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모욕입니다. 당신은-”

    “나는 무뢰배고, 너는 아닌 것 같나? 내게도 모욕이로군.”

    이안의 손이 알레이의 멱을 붙들었다. 그는 분명 웃고 있었으나, 은안에는 숨길 수 없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길게 찢어진 입과 달리 흉흉한 기색을 띠는 눈동자가 알레이를 지척에서 죽일 듯 노려보았다.

    “알레한드로 디아뮈드. 너도 나와 같아. 네가 누구에게 그렇게 정신이 팔렸는지 내가 모를 것 같나?”

    “당신과는 무관한 일입니다.”

    “퍽도 그렇겠군. 왜, 오필리아가 네게 사랑한다 하던가? 그 사랑이 달아서 벗어날 길 없어 보이고?”

    알레이는 무심코 반박하려 했다가, 그의 오해를 깨트리면 안 된다는 오필리아의 당부를 떠올리고는 입을 닫았다.

    그사이 이안은 알레이의 멱을 밀치듯 놓으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렇겠지. 오필리아는 그런 사람이니까.”

    아무것도 내어 주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내어 준 척하는. 가장 가까이 있다 여길 때조차 손에 닿지 않는 상대.

    “내가 장담하건대, 네 말로 또한 나와 같을 거다. 우린 모두 그녀에게 죄인이니까.”

    이안은 아마도 그 말을 통해서 알레이가 괴로워하길 바랐겠지만, 안타깝게도 알레이는 자신을 향한 공격에는 면역이 상당한 사람이었다.

    하, 가볍게 숨을 뱉어 낸 알레이가 시니컬하게 입술을 떼었다.

    “그래서 어쩌라는 겁니까?”

    “……뭐?”

    “내가 오필리아에게 죄를 지었든 말든, 여전히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겁니다. 아니면 이 정도도 이해하지 못할 만큼 아둔한 겁니까?”

    알레이의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낯은 전에 없이 사납게 변모해 있었다.

    “내가 정말 죄를 지었어도, 그에 대한 속죄도 모두 나와 오필리아의 문제입니다.”

    “그렇게 여유 부리다 후회할 텐데?”

    “그래서 당신 말을 들으면 후회하지 않을 거란 보장은 있고?”

    이안의 도발은 잘못되어 있었다. 애초에 알레이는 오필리아를 만난 이후, 후회에 대한 가정을 단 한 순간도 몸에서 떼어 내 본 적이 없었으므로.

    “당신의 후회에 날 끌어들이지 마시죠.”

    내 죄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알레이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떴다. 도발이고 뭐고, 더 이야기하다가는 화를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마 그게 이안이 노린 것이리라.

    이안의 속내는 뻔했다. 후회니 뭐니, 자극하기 좋은 단어들을 골라 쓴 것부터가 그랬다.

    너와 내가 같다며 동질감을 만들고, 버려질 거라며 불안을 조성하고.

    같은 과오를 범하기 싫다는 두려움에 마음이 급급해 그에게 조언을 구하게 만들고 싶었겠지.

    반 정도는 성공했다.

    알레이는 불안을 느끼고 있었고, 그가 의도한 두려움에 마음이 졸아붙고 있었으므로.

    그러나 알레이는 이안이 예상한 것처럼 아둔하지 않았다. 그렇게 겁이 많지도 않았다.

    그는 올바른 해결책을 이안에게서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이 찾아가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도.

    층계를 오르는 걸음이 다급했다. 알레이는 차오르는 수면으로부터 도망치듯 위로 올랐다.

    오필리아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다짐이 무색하게도 그는 당장 그녀가 필요했다.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당장 그녀의 손을, 하다못해 치맛자락이라도 붙들어야 했다.

    그 끝에는 결국 꼴사나운 애원이 샐 것을 알고 있었다.

    대체 과거에 제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려 달라고.

    무슨 짓을 저질러야 당신을 볼 때마다 이토록 비참하고 죄스러울 수가 있는지.

    왜 나는 당신이 다른 사람하고 있는 것을 견딜 수가 없는지. 왜 나는 당신을 볼 때마다 넘실대는 파도에 익사하는 백사(白沙)가 된 것 같은지.

    까마귀의 깃털처럼 검은 어느 밤. 알레이가 먼저 입을 연 적이 있었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오필리아.”

    대개 그들이 함께 있을 때 선두가 되는 발화자는 오필리아였으므로, 그것은 아주 드문 일에 속했다.

    오필리아 역시 그를 느꼈던지 의아함이 가득 찬 얼굴로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또 뭔가를 숨기는 것 같았나요?”

    “그런 식으로 물어야 한다면 아마 당신은 사흘 정도 이 방에서 못 나갈 겁니다.”

    알레이의 대답에 오필리아가 픽 웃었다. 그녀가 말해 주지 않은 것들이 많다는 것을 그들 사이에 모르는 이가 없다는 방증이었으므로.

    “타박하지 말아요. 난 거의 다 알려줬어요.”

    “그런 셈 치겠습니다. 그보다 내가 물으려는 건 다른 쪽이니까.”

    알레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왜 마탑으로 가려는 겁니까?”

    “질문이 이상하군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이야기가 된 것 아니었나요?”

    마탑은 대륙의 어느 나라에게도 굽혀야 할 일이 없고, 심지어 그 위치마저도 알고 있는 이가 없으니 황녀라는 거창한 꼬리표를 떼고 도망치기에는 더없이 적합한 곳이다.

    “그걸로는 설명이 부족했나요?”

    “그런 게 아닙니다. 당신이 마탑을 고른 이유 또한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난 단지…… 당신에게 다른 선택지가 없었는지가 궁금한 겁니다.”

    간혹 이해가 안 갈 때가 있었다.

    왜 오필리아가 대륙을 떠나 굳이 연고 하나 없고 밝혀진 것 없는 마탑까지 가려는지.

    그녀가 말한 이유만으로는 설명이 모자랐다.

    예를 들어, 오필리아는 이런 제안을 걸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당신은 마탑에서 추방당한 마탑의 주인이에요. 기억을 되찾는 걸 도와줄 테니, 당신이 복권이 되거든 그 영향력을 나를 위해 한 번만 써 주세요.

    마탑의 주인이라는 자리는 생각보다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이 컸다.

    대륙의 어디에서든 마탑의 강력한 마법사들을 원했으므로.

    그러니 오필리아는 굳이 마탑으로 떠나지 않더라도, 이 대륙에서 그리고 이 나라에서 얼마든지 알레이를 이용해 권력을 가질 수 있었다.

    게다가 상황이 그녀를 벼랑 끝으로 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만약 정략결혼이 필요하다면 나서줄 이안이 있었고, 마법이 필요한 사안에는 얼마든지 알레이가 힘을 써 줄 수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세상에서 제일 빠른 전서구도 가지고 있으니 나라 간 소통에서 얼마든지 그녀에게 유리한 쪽으로 바꾸어 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오필리아가 원한다면 그녀는 얼마든지 이 땅에서 권력자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넘치는 가능성과 힘을 두고서 떠나는 것을 선택했다.

    어째서?

    질문을 들은 오필리아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알레이, 나는 자유롭고 싶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