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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한 적 없다-76화 (76/118)
  • 제76화

    마탑에 대한 기억들과, 한층 선명해진 인어들에 대한 기억.

    다소 신산스러운 마음에 산테가 라딘 성으로 오고도 며칠을 괴로워하다 해변으로 나간 적이 있었다.

    라딘에 온 이후 오필리아와 처음으로 밀회를 가진 곳이라서일까.

    아니면 오필리아가 제 손을 잡아 준 마지막 기억을 되짚고 싶은 마음에서일까.

    이유야 어쨌든 그는 마음이 혼란할 때면 해변으로 나섰다.

    어쩌면 제가 가진 마력을 원 없이 풀어놓을 수 있는 곳이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과 창해를 눈앞에 두면 정처 없는 물과 공기의 흐름 속에서 겨우 안정을 찾곤 했다.

    그렇게 나선 해변에서 알레이는 자신보다 앞서 해변에 나와 있던 사람들을 발견했다.

    마법으로 몸을 숨기고 다가가자 누군지는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오필리아와 그가 구한 남자.

    -당신이 인어를 만나라고 했잖아, 오필리아. 그래서 나온 거야. 별 뜻은 없어.

    -그런 것 같아서 나도 말을 전하러 온 거예요. 아리엘은 집안 문제로 당분간 얼굴 보기 힘들겠다더군요.

    -그건 당신이 가깝게 지내던 그 새가 알려준 건가?

    -……새라니?

    -당신을 안고 간 그 세이렌 말이야. 다른 사람들은 헛것을 봤나 싶겠지만, 나는 배를 많이 탔으니 알지. 아주 수완이 좋던데. 마탑의 주인으로도 모자라 이젠 인간도 아닌 세이렌까지 당신의 것으로 만들고. 당신 장식장에 로넨의 영주 따위가 발 들일 수 없는 이유를 좀 알겠더군.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별개의 이유니까.

    -그래? 그럼 그들이 없어져도 그렇게 말할지 궁금한데.

    이안은 걸터앉아 있던 암초에서 훌쩍 내려왔다.

    성큼 다가오는 걸음에 오필리아가 주춤 물러섰다. 이안의 은안이 먹이를 노리는 맹금류의 것처럼 사납게 번뜩이는 것을 알레이 또한 볼 수 있었다.

    그는 그에서 그치지 않고 오필리아의 손을 잡았다. 그 위에 입을 맞추었다.

    다음 순간 오필리아에게 뺨을 맞았지만 그는 아무래도 좋다는 표정이었다.

    조금은 자조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혹은 모든 걸 내던진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낯.

    그 뒤로 이안이 또 무슨 말을 하는 것이 보였지만 알레이는 들을 수 없었다.

    더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을 자신이 없어 곧바로 도망쳤으므로.

    이안을 보는 오필리아의 낯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 위에 서린 회한이 선명했다.

    그 모습을 보며 알레이는 불현듯 깨달았다.

    자신이 아무리 오필리아에게 가까워져도, 이안과 오필리아의 과거에 자신이 낄 수는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알레이가 오필리아에게서 늘 느껴왔던 괴리감의 원인이기도 했다.

    오필리아는 종종 지평선을 바라보곤 했다. 대화 도중, 혹은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어서, 혹은 아침에 일어나 멍하니.

    알레이가 불면으로 밤을 지새우는 날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두 사람은 자주 밤을 함께 보내곤 했다. 밤늦게까지 각자 할 일을 하다 잠이 올 즈음 알아서 자러 가는 방식으로.

    대개 장소는 조금 더 넓고 쾌적한 오필리아의 방이었기에, 알레이는 그녀의 취침과 기상을 자주 지켜보곤 했다.

    아침에 일어난 오필리아는 늘 울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으레 두 손에 낯을 묻었다가, 밝아진 바깥으로 눈을 돌렸다. 해가 높게 뜨건 낮게 뜨건 그녀의 방에서는 늘 바다가 보였다.

    오필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만 당장 눈물을 터트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표정으로 한참이나 창밖의 지평선을 바라보다 몸을 일으키곤 했다.

    자신이 같은 방에 있다는 것을 그때만큼은 까맣게 잊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오필리아가 이따금 내보이는 비탄에는 알레이의 자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 남자에게는 있겠지.’

    아무리 오필리아가 이안을 싫어한다고 한들, 증오조차 결속이 될 수 있다.

    그것마저 질투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발상이겠지. 끔찍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다.

    알레이가 스스로를 오필리아로부터 격리 시킨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제 안의 잘못된 모든 욕망이 오필리아에게 해가 될 것 같았다.

    차마 산테에게는 말할 수 없었지만.

    그런 의미에서 알레이는 되도록 이안과는 상종하고 싶지 않았다.

    문제는 오필리아의 당부에 있었다.

    임시 신전으로 오기 전, 오필리아가 한 당부는 이안을 주의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주의해서 이안을 피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안을 도발해야 해요.”

    이안을 주의 깊게 살펴서 자극하라는 뜻이었다.

    흔히 주의하라는 말을 할 때 통용되는 의미와 완전히 반대되는 것을 당부하는 오필리아에게, 알레이는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주의하라는 게 어떻게 도발하라는 의미가 됩니까?”

    “내가 주의하라고 했지 피하라고 한 건 아니잖아요?”

    오필리아는 그렇게 대꾸하며 으쓱하더니, 이어 설명했다.

    “이안은 당신과 내 사이를 의심하고 있어요. 하지만 우린 알잖아요.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거. 정말 친구일 뿐이란 것도.”

    악의 하나 없이 자신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는 것도 재주다. 하지만 부정할 수 있는 이야기도 아니었기에, 알레이는 대답 대신 가만히 오필리아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는 그것을 멋대로 긍정으로 생각했는지 굳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기왕 이안에게 오해를 샀다면 좀 이용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도발하는 데 효과적이지 않겠어요?”

    “기억해 두겠습니다만, 그렇게 도발해서 얻는 게 있습니까?”

    “왜 없겠어요?”

    도발 당한 사람은 쉽게 속내를 드러내기 마련인데.

    “시비를 걸어오면 적당히 이용해서 되돌려 줘요. 이안이 당신을 깔보지 못하도록.”

    그게 오필리아가 당부를 위해 한 말의 마지막 마디였다.

    오필리아는 평소 그러했듯 많은 것을 설명해 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알레이는 오필리아가 굳이 자신에게 이런 당부를 하는 이유를 알아채고 말았다.

    자신이 목격했던 한밤의 해변.

    -그래? 그럼 그들이 없어져도 그렇게 말할지 궁금한데.

    알레이가 도망치기 직전 이안은 오필리아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것이 일종의 협박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세이렌도, 마탑의 주인도 개별로 놓고 봤을 때는 강력하지만 인간들 틈에 있다 보면 해를 입기 쉬운 위치니까. 이안은 그 부분을 이용해 오필리아의 손목을 조이려 했을 것이다.

    문제는 그 협박이 썩, 먹히지 않았다는 것이겠지만.

    ‘정말 본인이 뭐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지.’

    오필리아가 알레이에게 이런 식으로 당부한 것부터가 협박이 먹히지 않았다는 증명이나 다름없었다.

    인간들 틈바구니에서나 대공이니 뭐니 대접을 받지, 그 범주를 벗어나면 아무것도 아닌 한심한 놈.

    알레이는 한숨을 내쉬며 되물었다.

    “그러는 그쪽은 돕는 것도 없으면서 왜 어슬렁대는 겁니까? 우리가 이런 대화 나눌 사이도 아닌데.”

    “거취 문제로 사제들과 이야기할 게 있어서 왔는데 의외로 구면이 있으니 인사하지 않을 수 있나.”

    “그런 생각을 다 하시는 걸 보니 그때 너무 온건히 보내 드린 게 화근이었던 모양이군요. 다음에는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건방진 본새는 어디 가질 않는군. 내가 그걸 문제 삼지 않는 걸 감사히 여겨야 할 텐데-”

    “당신이야말로.”

    알레이의 날 선 목소리가 이안의 말을 잘랐다.

    “누가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르는 모양인데. 당신이 여태 사지 멀쩡히 돌아다닐 수 있는 건 모두 내 자비 덕분이라는 걸 알아야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금수도 은인은 알아본다는데.

    알레이의 말에 이안의 주먹이 떨렸다. 그러나 차마 그것을 내지르지는 못했다.

    그가 정말로 알레이를 두려워한 까닭은 아니었다. 알레이가 마법으로 그를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상태로 만들어 버린 탓이다.

    상황을 알아챈 이안이 인상을 구겼다.

    “지금, 이거-”

    “마법은 참 편리합니다. 이런 걸 해도 티도 나지 않는다는 게.”

    “알레한드로!”

    이안이 버럭 소리를 쳤지만, 알레이는 시큰둥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사이 주위로 방음막을 쳐 두었으니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침 그들이 서 있는 회랑에는 아무도 없었으니, 그들 사이에 끼어들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고.

    “이거 당장 풀지 못해!”

    “그거 하나 자력으로 풀지 못하면서 무슨 감사를 운운하시는지.”

    “이 건방진 새끼가-!”

    “신분 하나 빼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을 내가 두려워해야 하는 겁니까?”

    이안은 흥분을 삭이지 못하고 씩씩대고 있었으나.

    그조차도 피식자의 습성이라는 것을 그가 알고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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