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구한 적 없다-75화 (75/118)

제75화

베일란은 애써 표정이 구겨지지 않도록 신경을 쓰는 모양인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모두가 모자람 없이 지내고 있다면 그것이 저의 기쁨이겠지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주교께서 사제를 제법 많이 데려오셨던데, 삼분의 일 정도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돌려보내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제는 이곳에 필요가 없으니까요.

오필리아가 웃는 낯으로 꾹꾹 눌러 말하자, 베일란의 미간이 살짝 좁혀 들었다.

척 보기에도 불만으로 가득 찬 얼굴.

“신의 사자에게 필요가 없다니, 말씀이 과하신 것 같습니다만.”

“그럼 잉여 인력이라는 말을 써드리면 될까요?”

“마법사를 돌려보내는 방안은 어떠십니까. 그들도 충분히 제 할 일을 다했으니 이제 물러설 때가 되지 않았겠습니까?”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없어서요.”

정확히 말하자면 베일란이 영향력을 가지고 제 앞길을 방해할 것이 거슬려서 이러는 거지만.

‘지금도 간섭을 하려고 하는데, 영향력까지 가지게 되면 두 배로 성가셔질 거야.’

그렇잖아도 성가시던 릴리스는 겨우 산테를 이용해 잠잠하게 만들어 두었다.

사람을 홀리는 것이 일인 세이렌에게 릴리스 같은 사람 한 명을 홀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탐욕이 많을수록 쉽게 홀리는 편인데, 이 여자 보기보다 탐욕이 많았군.

산테는 릴리스를 홀려 내 가벼운 세뇌를 건 뒤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주교인 베일란한테 같은 방법을 쓸 수도 없고.’

결과를 장담할 수도 없었다. 괜히 잘못 걸리면 산테의 목숨만 위태로워질 수도 있었고.

이제 오필리아의 계획은 막바지였다.

아리엘을 만나 마탑의 위치를 알아내거나, 알레이가 조금만 더 기억을 되찾거나.

‘아리엘의 비늘에 대한 것은 조금 나중에 해결해도 되니까.’

둘 중 하나만 하면 곧장 떠날 수 있는데.

이렇게 성가신 놈이 올 줄이야.

오필리아는 다시 한번 단정 지어 말했다.

“적어도 라딘 성에는 신전의 도움이 필요한 곳이 없습니다. 물론 빈곤한 곳까지 직접 내려가 자원 봉사를 하시겠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만, 만약 내세울 게 필요해서 봉사를 하시겠다면 돌아가시라는 겁니다.”

직설적인 오필리아의 말에, 베일란은 곧바로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상대를 바라보기만 했다.

마치 무언가를 가늠하기라도 하듯.

그는 잠시 그렇게 보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야 입을 열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전하. 전하께서 어울리는 마법사들이 전부 이단 소굴에서 온 이들이라고.”

“그거야말로 모함이군요. 한 명은 로넨에서 왔고, 다른 한 명은 황궁 마법사입니다.”

“신원이 불분명해서 만년 말단인 황궁의 마법사죠.”

“그른 말은 아닙니다만, 나 역시 그 사실을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그가 마탑에서 온 마법사라고 주장하고 싶으신 겁니까?”

“소문이 그렇다는 이야기를 하려던 것뿐입니다.”

베일란은 웃음기 없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루헤일의 이름으로 아뢰어, 저는 그들에게서 조금이라도 수상한 기색이 보이면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황녀 전하께서도 처신을 잘하셔야 할 겁니다. 덧붙이는 말에 오필리아가 인상을 썼다.

물론 지금은 신전에서 마법사를 이단이라 탄압하는 시기가 아니었지만, 베일란 같은 위치의 광기에 가까운 신념을 가진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없는 죄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노골적인 탄압에 대한 이름만 사라졌을 뿐.

‘다른 마법사들은 밀레세트 소속이 아니니 여차하면 떠날 수 있겠지만.’

알레이는 아니다.

생각이 그에 닿자 구토감이 울컥 올라왔다. 오필리아의 허벅지 위에 올라간 손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렇게 둘 수는 없다.

자신 때문에 누군가가 피해를 보는 상황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하물며 그게 유일하게 제 편이라 믿어 둘 수 있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알레이를 혼자 도망치게 해야겠지.’

일단은 최대한 두 사람이 마주치는 상황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결론을 내린 오필리아가 자리를 파하기 위해 몸을 일으킨 순간.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계십니까, 오필리아?”

그리고 이제는 익숙해진 건조한 음성까지.

짙은 낭패감이 오필리아의 등골을 타고 올랐다.

‘왜 하필.’

지금 문밖에 서 있는 건, 알레이였다.

* * *

조금 전, 알레이는 산 중턱에 있는 석조 건물을 임시 신전으로 재단장하는 데 차출되어 갔다가, 이제 막 돌아오는 참이었다.

사실 마법사에게 신전을 도우라느 것은 쥐에게 고양이를 도우라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어느 마법사를 시켜도 같은 반응일 것이다.

그런데 하필 알레이가 차출되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알레이, 임시 신전을 단장하는 데 벽을 허물거나 보수를 할 일이 있어서 마법사 인력이 필요하다고 하네요.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그건 명령입니까?”

“유감스럽게도 거절할 명목이 충분치 않네요. 무엇보다 그쪽에서 당신을 거의 지목하다시피 했어요.”

“딱히 주목받을 일을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당연하죠. 그쪽에서 당신을 고른 건 어디까지나 당신이 말단이라 그런 거니까요.”

라딘에 머무는 세 마법사들 중 가장 강력한 것은 단연 알레이였으나 우습게도 바깥에 알려진 것은 그 반대였다.

예니트와 코르넬리는 본인의 힘을 굳이 숨기지 않고 사용했지만, 알레이는 말단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힘을 어느 정도 조절했으므로.

물론 조절한 것이 바다를 단숨에 잠재울 수 있을 정도였으니 과연 제어에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법도 하지만, 세간의 시선은 생각보다 겉으로 보이는 이름에 더 초점을 맞추기 마련이었다.

치료소를 운영하는 코르넬리나 도로 공사를 돕고 있는 예니트에게는 함부로 다가갈 수 없어도, 황궁의 말단 마법사라는 알레이에게는 보다 다가가기 쉬웠던 것이다.

덕분에 라딘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사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약해 보인다는 이유로 임시 신전을 재단장하는 데 불려가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마음 같아서는 순간이동을 몇 번 써서 간단히 돌아오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보는 눈이 많았다.

게다가 그 사이에 아주 성가신 눈까지 끼어 있었다.

이안 카를레 로넨. 그가 오늘의 방해물이었다.

그는 임시 신전을 쏘다니며 사제나 주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듯 하더니, 라딘 성에 도착하자 알레이에게 와서 시비를 걸었다.

“마법사가 용케 신전 짓는 걸 돕고 있는 모양인데. 일부러 어디 부숴 놓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말하는 본새가 여전히 사나웠다. 이안은 날카로운 선이 돋보인다기보다는 잘 만들어진 근육과 특유의 권위적인 분위기로 둔중하고 무거운 느낌이 나는 편이었는데, 그런데도 첨예한 느낌이 물씬 났으니 그가 얼마나 알레이를 적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알레이의 입장에서는 정말 같잖을 따름이었지만.

‘그렇게 깔려 놓고도 모자란 건지.’

물론 이안이 당시 기습을 당한 통에 본인의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무지막지한 힘으로 당했으면 적당히 기세를 억누를 법도 한데, 이안은 오히려 더 미친 것처럼 구니 의아한 일이다.

게다가 알레이는 그를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었다.

오필리아의 당부가 있었던 탓이다.

“참, 알레이. 오늘 이안이 사제들을 보러 임시 신전에 다녀온다 하더군요. 당신과 부딪힐 게 뻔하니 주의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가 내 진짜 신분을 알고 있으니 엮이지 않게 주의하라는 겁니까?”

알레이는 이안이 자신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을 이미 오필리아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이안이 대놓고 그를 ‘알레한드로’라고 불렀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는 쪽이 더 맞는 설명이겠지만.

그러나 의외로 오필리아의 대답은 부정이었다.

“그건 아니에요. 그가 그런 걸로 시비를 걸 거였더라면 진작 걸었겠죠.”

하다못해 릴리스를 꼬드겨서 알레이의 정체를 알리는 편지를 황궁에 보내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안은 그날 이후로 아주 잠잠하게 굴었다.

문 밖으로 나온 것을 보지 못했으니 잠잠하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아니지. 한 번 있었군.’

오필리아가 산테를 데려오기 직전. 기억이 뭉텅이로 돌아온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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