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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한 적 없다-74화 (74/118)
  • 제74화

    오필리아는 지도 위로 몇 개의 화살표를 그렸다.

    이 지도는 투박한 만큼 지형지물의 기록에는 크게 의의를 두지 않았다. 그보다는 항로와 해류를 기록하는 쪽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오필리아는 이 지도를 이용해 마탑의 위치를 찾는 중이었다.

    물론 이 지도 하나만 가지고는 망망대해 위에 조각배 하나만 타고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을 느껴야 했겠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녀에게는 마탑에 대한 정보가 제법 있었으므로.

    사각사각, 깃펜이 빠르게 움직이며 종이 위에 오필리아가 알고 있는 것들을 나열했다.

    첫 번째는 세이렌에 대한 것이었다.

    ‘마탑은 세이렌의 군락지에 감싸여 있지.’

    그리고 세이렌의 군락지 또한 마탑과 결계를 공유했다. 즉, 마법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둘 모두 육안으로는 볼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아한 점이 생긴다.

    마탑의 결계에 직접 배를 부딪친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이에 대한 답변은 코르넬리가 해 주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통과합니다.”

    “단단하게 되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 식으로 가시화 된 결계라면 진즉 들통이 났을 겁니다. 장소를 숨긴다는 건 생각보다 까다로운 마법이라서요.”

    시각을 비롯한 그 어떤 감각에도 결계가 잡히지 않아야만 장소를 숨길 수 있었다.

    어설프게 더듬어 가면서 결계를 뚫어 보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잘못된 방식이라는 뜻이다.

    하여 오필리아는 다른 기록을 이용해 마탑의 위치를 유추하려 했다.

    세이렌의 군락지에 마탑이 둘러싸여 있다면, 분명 그 주위는 세이렌으로 인한 사고가 잦은 곳이 아닐까?

    ‘세이렌들은 곧잘 인간을 노랫소리로 홀려서 배를 난파시키니까.’

    산테는 군락지에 세이렌이 그렇게 많이 기거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지만, 일단은 가장 가능성 있는 생각이다. 지금 지도에 표시가 되어 있는 곳들 역시 유난히 사고가 많이 일어나는 곳들이고.

    그리고 이걸 확인하기 위해서는 아리엘의 도움이 필요했다.

    바다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것이 없을 인어의 도움이.

    하여 산테가 아리엘과 오필리아의 만남을 만들어 내기 위해 그녀와 만나러 갔다.

    ‘모쪼록 이야기가 잘 되어야 할 텐데.’

    당장 그 부분에 대해서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 문제는 인간이 아닌 이들의 것으로 남겨 두고.

    오필리아는 산테가 떠난 창문 밖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몸을 틀었다.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계십니까?”

    때마침 오필리아를 찾아온 손님이 있었으므로.

    * * *

    주교 베일란.

    벼랑처럼 각지게 패인 뺨과 음영이 짙게 드리운 아이홀의 소유자인 그는 오필리아의 신학 스승이자, 현재 수도에서 기거하는 사제들 중 가장 직위가 높은 사람이었다.

    “라딘에도 하나쯤은 신전이 생길 때가 되었죠. 전능하신 루헤일께서도 몹시 기뻐하실 겁니다.”

    “신의 기쁨이 곧 피조물의 기쁨이지요.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스승님께서는 변함없이 신실하시군요.”

    오필리아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찻잔을 입에 한 번 가져다 대었다.

    맞은편에는 사제복을 갖추어 입은 청년이 오필리아 못지않게 딱딱한 낯을 한 채 정좌하고 있었다.

    ‘신전에서 사람을 보낼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 사람을 보낼 줄이야.

    오필리아는 조금 난처한 기분을 느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를 마주하게 된 것은 조금 전이었다.

    오필리아가 가벼운 음성으로 출입을 허가하자, 사제복을 차려 입은 청년이 들어와 허리를 숙였다. 흠잡을 데 없이 깍듯하다기보다는 딱딱한 대리석으로 조형한 것 같은 인사.

    -루헤일의 여섯 번째 종이 인사드립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딱딱하기 그지없는 인사까지.

    달그락, 평소와 다르게 조금 떨린 손끝 탓에 찻잔이 접시 위에서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베일란의 첨예한 시선이 그 위를 훑었다.

    “……전하께서도 변함이 없으신 것 같군요.”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만.”

    “이 작은 영지에 마법사만 벌써 셋이 기거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베일란의 곧은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 버러지만도 못한, 루헤일의 은총을 저버린 이단들이 전하의 그림자에 있다고요.”

    올 게 왔구나.

    상대의 입에서 이단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오필리아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베일란은 분명 천성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으나,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예를 들어 신 루헤일의 뜻을 받드는 자신은 절대적인 선이고, 자연을 거스르는 마법사들은 절대적인 악이라고 여기는.

    ‘제일 골치 아픈 놈이 오다니.’

    오필리아는 인상을 쓴 채로 날카롭게 대답했다.

    “이단이라뇨, 요즘은 황실에서도 마법사를 양성하는 시대입니다. 그런 말씀은 무례가 되니 삼가 주셨으면 좋겠군요.”

    “루헤일께서 이단들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품어 주셨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감히 신의 사제가 머무는 곳에 발을 들일 수 있다는 것조차 저는-”

    “베일란.”

    오필리아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일순 스산한 태를 띤 낯이 날카롭게 베일란을 직시했다.

    “내가 아직도 당신에게 회초리를 맞던 어린 소녀로 보입니까? 당신 앞에 있는 게 누군지 다시 생각하고 발언하세요.”

    “……!”

    베일렌의 눈이 기묘한 이채를 띠었으나, 금세 가라앉았다.

    “……그렇군요. 일단은 전하께서 데리고 있는 자들이니, 제가 실언했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넘어가겠습니다. 그래서, 임시 신전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나요?”

    “지내기에 모자람 없는 상태입니다. 신을 모시는 자에게 육신의 편의는 큰 문제가 아니지요.”

    베일란이 그렇게 말하며 빙긋 미소 지었다. 그는 마법사와 이단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만 아니라면 정말로, 여러 부분에서 관용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었다.

    비록 그 미소까지도 대리석을 깎아 만든 듯 딱딱하다는 것이 못내 어색하게 느껴지지만.

    “내일부터는 치료소를 운영하려 합니다.”

    그가 평소 구제 활동에 얼마나 열심인지 아는 이라면 그 미소를 의심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리라.

    “라딘은 신전이 없는 탓에 조악한 의료 기술로 버티고 있는 곳이라 들었습니다. 오는 길에도 루헤일의 은총이 필요한 사람이 성벽 주변을 맴도는 걸 봤습니다. 일부러 치료술에 능한 사제들을 많이 데려왔으니 서둘러 치료를-”

    “아, 그거라면 걱정할 것 없습니다. 이미 내 손님이 치료소를 운영하고 있으니까요.”

    며칠 된 이야기였다.

    이렇게 밥만 축낼 수는 없다며 머리를 싸매던 코르넬리가 돌연 성문 근처에 치료소를 차렸다.

    그는 연금술과 치료 마법에 특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치료뿐만 아니라 생활에 필요한 각종 약물을 제공하기도 했다.

    -와, 여기서는 솥을 끓이다가 터트려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하네요!

    -약초를 이렇게나 쌓아 놓고 쓸 수 있다니 꿈만 같아요!

    게다가 그 일들이 치료소 주인의 적성과 꽤 맞아떨어진 덕분에 치료소는 매일같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아마 베일란이 봤다는 것 역시 치료소를 방문하려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인파였으리라.

    베일란은 이런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던지 눈에 띄게 당황하는 듯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 그럼 일손이 필요한 곳은 없습니까? 도로가 한창 재건 중이라면 신성력이 필요할 일이 많을 것 같은데.”

    “물론 그렇죠. 그래서 마찬가지로…… 내 손님이 돕고 있습니다.”

    밥만 축낼 수 없다는 또 다른 마법사, 예니트가 건설 현장을 비롯해 민원이 발생한 곳들을 열심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코르넬리에 비해 외우고 있는 마법의 폭이 넓기도 했거니와 이동 및 염동력에 특화되어 있었기에 아주 유용한 일꾼이었다.

    -원래 알레한드로 님께서 하시던 일이라면 더더욱 제가 하는 게 맞겠지요. 그분께 이런 일을 시킬 수는 없습니다.

    -로넨에서도 이런 비슷한 일을 했는데, 선박 움직이는 것보다는 이런 일들이 훨씬 쉽군요. 거기서는 조선된 선박을 움직여 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하루 온종일 골골거려야 했지 뭡니까.

    마법사들의 힘은 정말 가공할 만 했다.

    예니트가 한 번 염동력을 쓰면 일꾼 대여섯은 놀아도 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는 어느 정도 오필리아가 원했던 효과이기도 했다.

    신전의 사제들이 이곳저곳을 들쑤시며 영향력을 발휘하면 그녀의 입지가 그만큼 좁아지기 마련이므로.

    그럴 바엔 효율 좋고 성실한 마법사들을 데려다 자리를 채우는 것이 훨씬 나았다.

    “이를 어쩌죠. 현재는 딱히 도움이 필요한 곳이 없는 모양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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