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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한 적 없다-72화 (72/118)
  • 제72화

    그녀를 제법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동의할 말이 있었다.

    오필리아는 실용적인 사람을 좋아한다는 부분이다.

    그녀는 아주 다정한 동시에 더없이 비정했다. 그것은 오필리아의 기반에 애정에 대한 결핍이 있기 때문이었다.

    “오필리아는 인간들 말로 아주 대단히…… 인도적인 사람이지. 이걸 인간이 아닌 내가 하려니 좀 이상하다만, 너도 동의할 거다.”

    하지만 동시에 굉장히 비정하고 계산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오필리아는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모든 마음을 다했지만, 필요가 없어지면 가차 없이 내버릴 수 있었다.

    “사실 나는 그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오필리아의 제안을 수락하니 느껴지더군. 오필리아가 제 선 안의 사람에게 얼마나 다정한지.”

    정말 놀라울 만큼 다정했다.

    마탑에서 메르시아와 이야기를 마치고 오필리아의 방으로 돌아갔을 때.

    그녀는 촛불이 차마 다 걷어 내지 못한 어둠이 스민 방 안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밤이 깊었는데도.

    산테가 창을 두드리자 그 낯 위로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게까지 오필리아가 환히 웃을 수도 있는 사람이었던가, 돌이켜 보게 될 만큼.

    -인간은 밤에 자지 않던가?

    -당신이 올 때까지는 기다리고 싶었어요. 마음이 바뀔 수도 있는 일이니까요.

    -요컨대 내가 약속을 지킬까 불안했다는 거지.

    -그보다는 당신을 맞아 주고 싶었다는 쪽이 맞겠군요.

    오필리아는 이어 말했다.

    자신은 여태 반겨 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사소한 오고 감에도 맞아 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고.

    -내가 겪은 것들을 다른 사람은 겪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것은 산테가 처음으로 마주한 오필리아의 속내였다.

    동시에 그녀가 선의 안팎이 명확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제야 알았지. 내가 오필리아의 제안을 수락하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난 그녀에게 이방인이었을 거라는 사실을.”

    그러니 알레이가 처음부터 그녀에게는 선 안의 사람이었을 거라 생각하면, 조금 속이 뒤틀리기까지 했다.

    그녀가 주는 다정은 제법 달콤해서, 한 번 발을 들인 이상 결코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그들이 오필리아가 허락한 경계 안에 있기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들은 언제든 경계의 바깥으로 쫓겨날 수 있었다.

    “그게 오필리아니까.”

    그녀는 두려워하는 것이 없었다. 가리는 게 없었고, 목적을 위해서라면 스스로를 내던지길 망설이지 않았다.

    그러니 인간관계를 정리하는 것은 또 얼마나 쉬울까.

    “인간도 아닌 내가 느끼는 걸 네가 느끼지 못했을 리 없지, 디안. 너는 오필리아에게 버림받을 게 두려운 거다. 맞지?”

    “……아주 못하는 말이 없군.”

    “부리가 멀쩡히 뚫렸는데 말 좀 하면 안 될 이유가 있나.”

    산테는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오필리아에게 붙은 이유는 너와 크게 다르지 않아. 무얼 경계하는지는 알겠다만 시간을 버리는 일이 될 거다, 알레이.”

    산테가 으쓱하자, 알레이는 인상을 쓰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 뒤에야 그는 겨우 정돈된 낯이 되었다. 감정이 휘몰아치는 듯하던 착잡함을 어렵게 숨기고, 다시 차갑고 딱딱한 모습을 뒤집어 쓴 표정.

    “적어도 오필리아에게 뭘 노리고 붙은 건 아닌 것 같으니 추궁은 이쯤 하지.”

    “내 진정성을 믿어 준다니 눈물겹게 고맙군.”

    “비꼬지 마라. 그리고, 하나 오해하는 게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네가 오필리아의 곁에 있는 게 싫은 게 아니다. 경계하는 거지.”

    “그게 그거라고 생각하는데.”

    “아니, 달라. 왜냐하면 나는 이제부터 그녀에게 거리를 둘 예정이라.”

    그 말은 제법 흥미로웠다. 산테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이유부터 묻지.”

    “아직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은 없지만……. 기억이 어느 정도 돌아왔다, 산테.”

    산테를 부르는 음성이 아주 친숙했다. 억양이 친숙하다고 하는 게 옳을까.

    맹금류의 것을 닮은 산테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어느새 숨기지 못한 웃음이 산테의 만면 가득 걸려 있었다.

    “어쩐지 말투가 바뀌었다 싶었더니. 이제 기억이 난 거냐?”

    “완전하지는 않아.”

    알레이는 멋쩍게 시선을 돌리며 자신의 상태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아무래도 같이 지내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돌아오는 과거의 기억 또한 달라지는 것 같다고.

    “오필리아와 있을 때 돌아오던 기억은 마탑의 것이 아니었어. 하지만 예니트나 코르넬리와 함께 지내다 보니…… 낯선 공간을 자꾸 보게 되더군.”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오직 푸른 물과 날카로운 암초뿐인 낯선 석조 건물.

    그곳이 어디인지는 굳이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마탑에서의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는 것이다.

    물론 자연적으로 된 것은 아니었다.

    알레이가 제게 꾸준히 실험해 보던 파훼식이 오필리아의 도움으로 완성도가 올라가며 효과가 배가 된 덕분이었다.

    “여전히 가장 크게 느껴지는 구멍은 비어 있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공허가 덜 느껴져.”

    “상태가 많이 좋아진 모양인데.”

    “좋아지기는 했지. 그에 대한 대가가 있다는 게 문제지만.”

    “대가?”

    산테가 반문했다. 그의 친우는 그 짧은 대화 사이에 또다시 평정을 잃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조금 전의 표정이 착잡함에 가까웠더라면, 지금은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는 무슨 말을 뱉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내젓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대체…… 대체 내가 과거에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모르겠다, 산테.”

    기억이 조금씩 돌아올수록 알레이를 옥죄는 굴레.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스스로의 과거였다.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몰라도 오필리아를 볼 때마다 내가 그녀에게 저지른 죄가 있다는 게 느껴져. 문제는 내가 저지를 수 있는 게 너무 많다는 거지.”

    차마 한 가지를 콕 집어 특정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마법사들은 대개 자신이 사용하는 주력 마법의 갈래가 명확했다.

    예니트의 경우 이동과 염동력에 특화되어 있었고, 코르넬리는 연금술과 치유 계열이었다.

    통째로 외울 수 있는 마법식에는 한계가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은 알레이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황궁에 등록하기로는 염동력 특화로 기재해 두었지만, 실제로는 모든 마법에 능통했다.

    그러니 그만큼 저지를 수 있는 일도 많았다.

    “게다가 자꾸 인어들과 내가 모종의 거래를 했다는데, 대체 뭘 말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답답하군.”

    다른 때였더라면 오필리아에게 곧장 가서 이 문제를 이야기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알레이는 이미 그의 힘에 대해 오필리아에게 지적을 들은 상태였다.

    로넨 대공, 그러니까 이안을 보고 화를 참지 못했을 때.

    -이러다 당신이 감정에 휩쓸려 실수로 이안을 죽이기라도 하면, 다음에도 그러지 않을 거란 보장이 있나요? 혹시 그 다음에 당하는 건 내가 되나?

    마지막 말이 알레이를 얼마나 아프게 찔렀는지 오필리아가 알고 있을까.

    산테의 말이 옳았다.

    알레이는 오필리아에게 버림받을 것이 두려웠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그녀가 뱉는 모든 음절이 주문처럼 그를 속박하는데.

    낮이면 어김없이 찾아드는 햇살 무성한 시각이 기필코 그녀를 연상하게 만드는데.

    -당신은 날 이름으로 불러 줬으면 좋겠어요.

    -알레이, 당신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해서 기뻐요.

    그렇게 말하며 오필리아가 알레이의 손을 잡았을 때.

    알레이는 세상 모든 걸 두려워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오필리아가 이 손을 놓는대도 제 그림자는 여전히 이 해변 이 자리에 멈추어 있을 거라 직감했다.

    채도 높은 여름 햇살 아래 오필리아의 붉은 머리칼을 떠올리게 될 테고, 바람이 불면 그 머리칼이 어떻게 흔들리는지 되새기게 될 터다.

    푸른 하늘과 물이 오필리아의 눈동자에 담겼던 벽해를 연상시키고, 벽난로의 불이 그 속에서 타오르던 청염을 떠올리게 할 것 같았다.

    해가 뜨면 뜨는 대로, 해가 지면 지는 대로 오필리아 생각이 날 게 분명했다.

    이런 감정을 흔히 뭐라고 하는지 알레이는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외면했다.

    기실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자신이 오필리아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으므로.

    “그러니 기억을 제대로 찾기 전에는 오필리아와 거리를 두는 게 맞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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