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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한 적 없다-71화 (71/118)
  • 제71화

    알레이의 입에서 알 수 없는 문자들이 흘러나오자, 점차 바닥에 둥근 원의 형태로 식이 전개되었다.

    처음에는 문자들이 둥근 띠를 이루듯이 나열되나 싶더니, 점차 문자의 크기는 작아지고 그 사이가 촘촘하게 채워졌다.

    알레이의 마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분명할 그 식은 점차 몸집을 불려 나가더니, 빈틈없이 채워지자 일순 발광했다.

    마법이 시동되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 직후, 투둑 하는 소리와 함께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리기 시작했으므로.

    소낙비가 라딘을 덮쳤다. 코르넬리가 가벼운 탄성을 내질렀다.

    “정말 빨리 됐는데요? 어떻게 하신 거예요?”

    “먹구름을 찾는 데 필요한 소모량을 줄였지.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무거운 구름을 찾아서 데려오는 것보다 적당한 비구름을 찾아서 얼리는 게 빠르니까.”

    분명 비를 내리는 것은 자연, 혹은 신의 영역에 해당해야 할 범주였다.

    그러나 마법사들은 그걸 할 수 있었다. 그걸 지켜보던 오필리아는 문득 생각했다.

    어째서 신전이 마법사들을 이단으로 몰고 갔는지, 알 것 같다고.

    ‘꼭 조건식 마법이 아니더라도…….’

    마법의 잠재력이 두려웠으리라.

    비록 마법사들이 식 하나 구현하는 데에도 애를 먹어 끙끙대는 게 일상이라고는 해도.

    시간은 언젠가 변혁을 만들어 내기 마련이니까.

    언젠가는 불세출의 천재가 나타나, 신이라는 말을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경지에 오를 것을 예감했겠지.

    ‘신성력은 상당히 사용이 제한적이지,’

    밀레세트는 메이너드 대륙에서 신전의 영향력이 가장 막강한 나라였다.

    게다가 밀레세트 황실이 신의 가호를 받았다는 내용을 전면에 내걸고 있었기 때문에, 오필리아 역시 황족의 기본 교양으로 신성력의 원리에 대해 배운 적이 있었다.

    -신성력은 자연의 섭리를 극대화하는 힘입니다. 신께서 주신 것을 거스를 수는 없으니까요.

    자연이 가진 치유의 힘을 이용해 사람을 치유하고, 자연이 가진 파괴의 힘을 이용해 공격에 사용하는.

    그런 게 신성력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연에 좀 더 초점이 맞추어지고, 사용은 더욱 제한적이 되곤 했다.

    모든 것이 자유로운 마법과는 본질부터가 다른 셈이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각자의 신념을 따라가며 벌어진 차이였으니 잘못되었다는 말을 쓸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녀가 본 마법사들은 그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았다.

    그리고 알레이는 마법사들 사이에서 비로소 그 본질에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마탑에 있을 때는 아마 저랬겠지.’

    저렇게 자유로웠겠지.

    오필리아는 막연히, 그것이 알레이의 원래 자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는 기억을 빌미로 그를 붙잡을 수도 없으니, 알레이가 자신을 멀리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 거라는 생각과 함께.

    그러니 산테의 말은 옳았다. 뺨을 맞았다는 걸 알레이가 알게 되면 신경을 쓸까 봐 숨기는 것도 맞지만, 사실 그 기저에는 또 다른 걱정이 깔려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변명과 정확히 반대되는 걱정이었다.

    ‘알레이는 산테를 시종으로 들였을 때도 별말 하지 않았지.’

    평소 말도 하지 않고 외출하기만 해도 온갖 처량한 모양은 다 내던 것을 생각한다면 의아한 일이다.

    그러니 이번에도 만약 알레이가, 제가 뺨을 맞은 사실을 알고도 제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과연 서운해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없지.’

    그러니 숨겨야 했다. 괜히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할 이유도 없으니까.

    오필리아는 상념을 거두고 반지 낀 손을 내렸다.

    “뭐, 숨겨서는 안 될 이유도 없잖아요.”

    “난 너희가 상당히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내 판단에 의심이 드는군.”

    산테가 상체를 숙여 오필리아와의 거리를 가깝게 하며 툭 던지듯 말했다.

    그의 손끝이 부은 오필리아의 뺨을 스쳤다.

    “같은 배에 탄 것치고는 데면데면하고. 사무적이라기에는 또 의지하고. 네가 알레이에게 말하지 않은 것들이 벌써 몇 개나 되더라?”

    “과거로부터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레이에게 알리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잖아요.”

    “그런 것들이 쌓이다 보면 거리가 벌어지는 거지.”

    “이미 벌어져 있어요. 충분히.”

    마탑으로 간다면 그 차이는 더욱 벌어질 테고.

    지금이야 황녀라지만, 모든 신분을 포기하고 마탑으로 들어간 오필리아가 마탑의 주인과 함께할 일이 더 있기나 할까.

    생각이 그에 이르자 조금은 쓸쓸해졌다.

    그리고 오필리아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겠지만, 산테에게는 그 모습이 고스란히 보였다.

    알레이가 자신을 멀리하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 상심한 것 같은 표정.

    ‘아무래도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인데.’

    하는 생각은 덤이었다.

    * * *

    오필리아는 산테가 라딘 성의 시종이 된 것을 알레이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알레이는 산테가 온 날, 그를 붙잡고 숲으로 단숨에 이동해 이렇게 물었으니까.

    아무래도 예니트의 경계심은 제 상사로부터 배운 건지.

    평소 사용하던 존대는 다 내버리고.

    인적이 드문 숲으로 산테를 데리고 오기까지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알레이의 속내는 빤했다.

    “내가 허튼 짓을 하면 무력행사라도 서슴지 않겠다는 건가, 디안?”

    “그러지 않아야 할 이유를 알려 준다면 재고는 할 수 있겠지.”

    “친구라고 하나 있는 놈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섭한데.”

    “유감이군.”

    차가운 대답.

    어설픈 우는 소리로 넘어갈 수 없겠다는 것은 그때 직감했다.

    날아서 도망치려 하면 염력으로 붙잡아 누르고, 산테는 순간이동 같은 고난이도 마법을 쓸 수 없었다.

    차라리 공간을 베는 정도라면 가능할지 몰라도.

    ‘하지만 그걸 쓰면 이 숲이 초토화가 될 테고…….’

    세이렌의 마법은 자연으로부터 배운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섬세하지 못했다.

    그러니 무력 충돌을 한다면 이 숲은 오늘부로 지도에서 사라지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그것은 썩 내키지 않았다.

    결국 산테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필리아가 나한테 간곡히 부탁해서 온 건데, 네가 날 경계하면 어떡하나. 디안. 정말 별 뜻 없어.”

    “어린 세이렌들이 그러던데. 너희는 사흘 이상 같은 곳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만약 머문다면, 그건 그 사람을 조져 놓겠다는 뜻이라고.

    뱉어지는 말에 산테는 진심으로 그 세이렌 삼형제의 목을 비틀고 싶어졌다.

    분명 파이나 케이크 따위에 저들 이야기를 홀랑 넘겨 버렸으리라.

    “……인간 음식을 안 먹여 키운 잘못인지, 입단속을 어릴 때부터 시키지 않은 잘못인지…….”

    “어쨌든 틀린 말은 아니라는 거군.”

    알레이의 말에 산테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일반적이기는 하지. 나도 이례적이라는 걸 부정할 생각은 없고.”

    산테가 괜히 제 뒷머리를 한 번 훑으며 대답하자, 알레이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

    “그럼 역시 다른 뜻이-”

    “하지만 디안, 너야말로 이상하다는 걸 왜 모르지?”

    그 물음에 알레이의 낯이 끊어진 리본처럼 툭 긴장감을 잃었다.

    굳어 버린 몸과 일자로 다물린 입술이 차마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무언가를 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디안. 너는 이제 오필리아가 아니어도 되잖아.”

    그것은 알레이가 여태껏 외면해 온 진실이었다.

    “오필리아에게 너를 어떻게 포섭했는지 물었는데, 그녀가 그러더군. 네 기억에 대한 단서를 주기로 했다고.”

    그래서 알레이의 기억을 찾아 마탑으로 가는 것이 목표라고 했는데.

    문제는 이제 알레이가 기억을 찾는 데 오필리아가 썩 필요치 않다는 사실이었다.

    “설령 오필리아가 마탑으로 가지 못하더라도 이제 너와는 크게 상관없는 일이지. 네게 그 어린 마법사들이 붙어 있는 이상.”

    “…….”

    “그런데 너는 왜 아직도 오필리아의 그림자 안을 자처하는 거지? 이렇게 나를 따로 불러내기까지 할 만큼.”

    “……그녀가 나를 도운 이상 약속을 어길 생각은 없으니까.”

    “정말 그게 다인가? 네가 하는 꼴을 보고 있노라면 주인이 새 개를 들여서 안절부절 못하는 애완견이나 다름이 없어 보이는데.”

    그게 집착이 아니면 뭔지.

    산테가 노골적으로 후벼 팠지만, 알레이에게서 대답은 없었다.

    오필리아를 몰랐더라면 분명 한심하다고 칭했을 법한 제 친우의 꼴을 보며, 산테는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나를 질투하는 거지? 디안. 네 쓸모를 내가 가로챌까 봐.”

    그리고 오필리아에게서 버려질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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