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화
급하게 마음을 고쳐먹은 예니트는 서둘러 말을 바꾸었다.
“벼, 별일 아닙니다. 오늘 알레한드로 님을 못 뵌 것 같아서요.”
“알레이라면 임시 신전으로 갔어요. 건물을 새로 꾸며야 하다 보니 일손이 많이 필요하다던데요.”
카델리아와 함께 온 사제들이 지낼 임시 신전. 오필리아는 해안이 고스란히 보이는 산등성이에 위치한 건물을 잠시 떠올려 보고는, 다시 미소 지었다.
“티타임 전에는 돌아온다고 했으니 이제 돌아올 때가 된 것 같은데. 한 번 나가서 찾아보는 건 어때요?”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오필리아가 싱긋 웃으며 대답하자, 예니트는 꾸벅 숙여 인사한 뒤 떠나갔다.
탁. 들어올 때와 달리 경쾌한 소리로 문이 닫히고 비로소 방이 얼추 비자, 그제야 오필리아의 낯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이제 다 끝났군요.”
“나는 꼭 이렇게 했어야 했나 싶지만.”
산테가 말을 받으며 오필리아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오필리아의 얼굴 반쪽이 붉게 부었다는 사실이 못내 거슬린다는 듯 인상을 쓴 채였다.
오필리아는 그 수려한 낯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틀었다.
“확실한 결과를 얻으려면 어느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것도 있는 법이에요.”
덕분에 모든 게 예정대로 흘러가는군요.
오필리아는 관조적인 투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조금 전 그녀를 휩쓸고 간 이 모든 것에 대한 짧은 감상이었다.
* * *
전말은 간단했다.
모든 게 오필리아의 손바닥 위였다는 것이다.
오늘 아침 카델리아가 받은 편지는 릴리스가 보낸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쓴 것도 아니었고.
그것은 단순히 카델리아를 자극하기 위한 오필리아의 덫에 불과했다.
이 시대 최고의 마법사와 가장 빠른 새를 곁에 둔 오필리아에게 그런 것을 위조하는 것은 정말 손쉬운 일이었으므로.
당연히 오필리아와 이안이 해변에서 만남을 가졌다는 것도 거짓.
두 사람이 잦은 만남을 가진다는 것도 거짓.
사실이 하나 있다면 이안이 오필리아에게 꾸준한 관심을 비친다는 것 정도가 유일할까.
“내가 뭐랬어요? 분명 노발대발해서 뺨을 때릴 거라고 했죠.”
“그래, 정답을 맞춰서 기분이 참 날아갈 듯 좋으시겠어. 나는 덕분에 도를 닦는 기분인데.”
“하하.”
오필리아는 전혀 즐겁지 않은 투로 건조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산테의 말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인건지. 하지만 산테는 진심이었다.
오필리아의 고개가 철썩 소리와 함께 돌아간 순간, 산테는 당장 그 암컷의 머리통을 터트리고 싶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산테의 속내를 알 리가 없는 오필리아는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어쨌든 카델리아를 자극하는 것도, 예니트에게 가련한 모습을 보이는 데에도 모두 성공했으니 뺨 한 쪽 내줄 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잔뜩 열이 난 카델리아가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니며 불꽃을 만들어야 하니, 이만하면 충분히 감내할 만한 일이다.
오히려 뺨 한 대면 싸게 먹힌 수준이었다.
‘아까 카델리아가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던데.’
모든 걸 알고 있던 산테가 마법으로 막아 준 것이겠지.
세이렌의 마법 실력은 그렇게까지 범용적이지 않지만, 산테는 살아온 세월이 있다 보니 구사할 수 있는 것이 제법 많았다.
개중 몇 개는 알레이로부터 배운 것이라고 하기도 했고.
최근 그런 것들의 수혜를 보게 된 입장으로서 말하자면 아주 편리했다.
물론 당사자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산테는 오필리아의 태연한 투를 보고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빈정거렸다.
“당신이야 어떨지 몰라도, 이 꼴을 보고 디안도 같은 생각을 할진 모르겠군.”
“당연히 알레이한테는 비밀인데요.”
산테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허?”
“알레이는 당장 기억을 찾는 것만으로도 바빠요. 이런 일까지 알려서 신경 쓰이게 할 필요는 없죠.”
“네가 그걸 숨기고 싶어서 핑계를 대는 건 아니고?”
부정할 수 없다. 산테의 말에 오필리아는 대답 대신 제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손에 끼워진 반지를 보는 것이다.
알레이가 그녀를 위해 개량해 준, 마력을 차단하는 반지.
이것은 알레이가 오필리아를 위해 해 준 것 중 유일하게 그녀의 손에 남아 있는 것이었다.
밤늦게까지 그녀를 위해 반지를 개량했을 알레이를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곤 했다.
그러니 조금 다르게 말하자면 반지를 봐도 웃음이 나지 않는 지금은, 알레이가 그녀에게 그만한 시간을 내어 주지 않는다는 뜻이나 다름없었고 말이다.
두 사람은 최근 같이 있는 시간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알레이 쪽에서 오필리아를 피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옳으리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면 알레이 또한 평소처럼 말을 걸기도 하고, 농담을 주고받기도 하는데. 이전과 달리 이제는 조금도 단둘이 있는 시간을 만들 수가 없었다.
둘만 남겨질라치면 알레이는 불이라도 가까이 한 것처럼 황급히 도망을 쳤다.
오늘도 그랬다. 다른 이들이 모두 할 일을 찾아 나선 통에 알레이와 오필리아 둘만 남겨질 상황에 처하자, 알레이가 부리나케 꽁지를 뺀 것이다.
“나는 임시 신전에 다녀오겠습니다. 일이 있다면 예니트에게 시키시고, 오후에 보죠.”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대답한 틈도 주지 않고 순간이동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제야 오필리아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알레이는 더 이상 나와 어울릴 생각이 없는 건가.’
그가 자신을 상당히 꺼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짐작 가는 게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알레이가 최근 기억을 찾는 데에 매진하고 있다는 부분.
코르넬리와 예니트가 라딘에 도착한 날.
-기억을 되찾을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오필리아.
이렇게 말한 알레이는 그 이후로 한 시도 마법식 연구지를 놓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든 빨리 기억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이라도 생긴 건지.
코르넬리나 예니트까지 머리를 맞대고 알레이에게 걸린 마법을 파훼할 방법을 찾는 걸 보고 있노라면 어딘지 쓸쓸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부분이 바로 두 번째에 해당했다.
알레이의 주변에 몰린 사람들 때문에 오필리아가 그 틈에 낄 수 없다는 것.
‘그의 주변에 사람들이 생겼으니 나하고 교류할 이유가 적어지는 건 당연하지.’
분명 알레이도 마법 쪽으로 말이 통하는 예니트나 코르넬리와 함께 이야기하는 쪽이 더 잘 맞을 것이다. 오필리아와 알레이가 과거 그토록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두 사람에게 그만큼이나 말이 통하는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이젠 아니니까.’
마법사들 틈에 낀 알레이는 그야말로 물 만난 물고기처럼 보였다.
“알레한드로 님, 여기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시동이 안 되는 건 아닌데 마력이 너무 많이 들어서 개조를 할까 싶거든요.”
“식의 상단부가 너무 지저분한 게 원인인 것 같은데. 이만큼을 들어내고 여기에 이걸 넣는 게 낫겠어. 이것 봐. 이렇게.”
알레이가 손을 내저으면 바람 한 점 없는 공간에도 돌풍이 불었다.
대낮에도 별무리를 볼 수 있었고,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해졌다.
코르넬리가 들고 온 마법식을 간단히 개량한 알레이가 시범 삼아 식을 구현했다.
그리고 그것은 오필리아가 처음으로 마법식의 발현을 제대로 목도한 사건이기도 했다.
알레이가 마법을 쓰는 것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봤지만, 그는 대개 식을 구성하거나 읊는 과정 없이 마법을 시동하곤 했으니까.
그는 가벼운 손짓 혹은 눈짓만으로 제 의지를 자연에 표현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한 설명은 코르넬리가 해 주었다.
“식의 구성과 구현되는 방식 모두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암기하면 무언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어요. 물론 암기한 내용에 한해서지만요!”
그는 덧붙여 설명하기를, 자주 사용하는 염동력이나 비행 마법은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외우고 다닌다고 했다.
그와 함께 자신이 선호하는 종류로 몇 가지 마법만 암기하고, 그것이 마법사의 분류를 결정짓는다고.
“그 외에는 잘 외우지 않아요. 순간이동처럼 고난이도 마법은 편리하긴 해도 식을 외우는 것만으로도 벅차서요.”
“하지만 알레이는 잘 쓰던데요?”
“그러니까 그분이 대단하신 거죠! 오필리아 씨, 알레한드로 님이 대단하신 이유는 마력 양에만 있는 게 아니에요.”
마법식의 이해도, 암기력, 응용력까지. 그는 모든 마법사가 까다롭다고 말하는 부분을 너무 손쉽게 해냈다.
“타고난 마력 양은 그 다음이죠. 그런 대단한 재능에 마력까지 따라올 사람이 없으니 누가 대적이나 할 수 있겠어요?”
코르넬리에게서는 알레한드로에 대한 신뢰와 경애, 자부심마저 느껴졌다.
아마 그는 마법사이니 느껴지는 바가 남다른 모양이었다.
오필리아는 마법사가 아니니 그에 완벽하게 공감해 주기는 어려웠지만, 코르넬리와 같은 생각을 하기는 했다.
그 누가 대적할 수 있을까?
이 존재 자체가 자연재해와도 같은 남자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