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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한 적 없다-69화 (69/118)
  • 제69화

    이건 신께서 제게 돌려주신 기회였다. 제 운명을 잡을 수 있는 기회!

    카델리아는 편지를 받자마자 제 아비에게로 달려가 소식을 전하곤 매달렸다.

    “폐하, 제게 기회를 한 번만 더 주세요! 폐하께서도 약조를 지킬 수 있고, 저도 밀레세트에 도움이 될 방안이 있습니다. 제가 라딘으로 갈게요. 가서 로넨 대공을 완전히 사로잡아 올게요. 할 수 있어요!”

    “로넨 대공은 쉬운 이가 아니다. 라딘까지 갔는데, 그를 설득하지 못하면 네 꼴이 더 우스워지지 않겠느냐?”

    황제의 태도가 영 회의적이자, 조바심이 난 카델리아는 서둘러 변명을 생각해냈다.

    그녀의 충실한 세작이 보낸 편지에는 비단 로넨 대공의 표류만 적혀 있었던 게 아니었다.

    편지에는 카델리아더러 로넨 대공을 만나러 와야 하지 않겠느냐는 충동질과 함께, 그럴싸한 핑계까지 함께 적혀 있었던 것이다.

    “걱정 마세요, 폐하. 라딘은 폐하의 눈 밖에 난 곳이 아닙니까? 그곳에는 하물며 신전 하나 없잖아요. 그곳에 신전을 하나 두겠다고 하시면 되죠. 제가 사제들을 데리고 폐하의 명을 받아서 내려간 셈 치면 구실은 적당히 맞춰질 테고요.”

    “……상당히 머리를 굴렸구나, 카델리아. 네 뜻이 정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마.”

    황제는 가장 아낀 딸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부채감이라도 느꼈던지, 생각보다 쉽게 허가를 내려주었다.

    그래, 거기까지는 순조로웠다.

    황제의 허가를 받고 라딘으로 갈 준비를 할 때까지도.

    카델리아는 오필리아 때문에 조금 불안하기는 해도 이렇게까지 화가 나지는 않았다.

    라딘으로 출발하기 직전, 다시 한 번 날아온 전서구가 전해준 편지가 없었더라면 아마 지금까지도 그랬을 것이다.

    전서구는 이번에도 충실한 그녀의 세작이 보내온 것이었다.

    문제는 전서구가 아니라 그 전서구가 물고 온 편지에 있었다.

    왜냐하면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쓰여 있었으므로.

    「……하여, 보고 올립니다. 로넨 대공께서 늦은 시각 해변에서 오필리아 전하와 만남을 가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세한 부분은 가까이 다가갈 수 없어 알지 못했다는 내용으로 얼버무려져 있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카델리아의 화를 돋우기에는 충분했다.

    게다가, 편지의 하단부에 적힌 내용.

    「로넨 대공께서 오필리아 전하께 꾸준한 관심을 비추고 계십니다. 늦은 시각 밀회부터 잦은 만남까지 갖고 계신 것을 보니, 오필리아 전하께서 노골적으로 여지를 주고 계신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됩니다.」

    카델리아에게 어떻게든 오필리아의 상황을 미주알고주알 전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것 같은 글씨들이 카델리아의 속을 단단히 비틀었다.

    로넨 대공이 오필리아에게 관심을 보인다니!

    카델리아의 예상대로였다.

    ‘오필리아가 또 꼬리를 친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없다.

    황궁에서도 제 앞길을 훼방 놓더니, 이제는 라딘에서까지?

    ‘설마설마 했는데, 결국 또 이런 짓을 해?’

    카델리아의 주먹이 분노로 떨렸다.

    분명 그 제법 봐 줄 만 한 얼굴 하나만 믿고 나대는 것이겠지.

    그래봐야 제게는 어울리지도 않고, 분수에 맞지도 않는 상대라는 걸 모르고!

    ‘오필리아는 로넨 대공이 없어도 시궁창 인생이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그러니 당연히 물러나야 할 사람이 있다면 오필리아가 아니겠는가.

    제 주제도 모르고 욕심만 가득한 더러운 사생아가 감히 제 것을 노렸다니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분이 도저히 사그라들지 않아, 카델리아는 라딘의 땅을 밟자마자 성큼성큼 성 안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뺨을 날렸다.

    고개가 돌아간 오필리아를 보자 비틀린 속이 어딘가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오필리아가 떠나 있던 내내 그녀를 비참하게 만들었던 응어리가 사라진 기분.

    하하, 카델리아의 입에서 조소가 샐 즈음.

    무거웠던 적막을 깨고 오필리아가 입을 열었다.

    “……이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군, 카델리아.”

    “뭐? 뭘 어떻게 받아들여? 네가 감히 대공 각하를 탐냈다는 건 수도의 모두가 알아!”

    “그래, 말 한 번 섞으면 소문이 도는 수도에서 말이지.”

    차갑게 내뱉은 오필리아가 돌아간 고개를 천천히 정면으로 돌렸다.

    “게다가, 로넨 대공이 조난을 당한 건 내 책임이 아니라는 걸 너도 알 텐데 내게 이러는 이유가 뭐지?”

    “네가 감히 오르지도 못할 나무를 노리니까! 네가 여기서 무슨 작당을 꾸미는지 내가 모를 줄-”

    “그것 참. 가당찮은 소리구나. 뭘 듣고 이러는지는 몰라도, 여기가 아직 황궁인 줄 알았니?”

    머리칼을 느리게 쓸어넘긴 오필리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올라간 눈높이만큼 위압감이 서렸다. 카델리아는 저도 모르게 주춤 물러섰다.

    ‘뭐, 뭐지?’

    설마 내가 오필리아를 상대로 주눅이 들었다고?

    저도 모르게 든 생각에 카델리아의 등골이 차게 식었다.

    황궁에서는 제게 말 한 번 제대로 못 붙이던 오필리아였다. 그 볼품없는 차림과 더 볼 것이 없는 뒷배를 비웃음 삼는 것이 카델리아에게는 일상이었는데.

    그렇게 비웃어 온 이복언니를 상대로 자신이 밀리다니?

    딱딱하게 굳은 카델리아의 몸을 농락하듯, 오필리아는 유유히 책상을 돌아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또각또각, 구둣소리가 서릿발치듯 날카로웠다.

    오필리아의 손이 툭 카델리아의 어깨를 짚었다.

    “친애하는 내 동생.”

    “……뭐? 누가 네 동-”

    누가 네 동생이냐며 손을 쳐내려고 했지만, 뭔가 이상했다.

    몸이 정말 굳기라도 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어 발버둥을 칠수록 몸이 단단한 석고상이라도 되는 기분.

    오필리아의 목소리가 그 위로 차갑게 내려앉았다.

    “네 아둔한 머리에도 제대로 이해가 될 수 있도록 설명해 줄 테니 들어라. 로넨 대공은 로넨의 영주이기 이전에, 이곳에서는 허가받지 않은 체류자지. 그런 사람을 바로 수도로 보낼 수는 없어.”

    “……!!”

    “그리고 나는 폐하께서 임명하신 이곳의 총책임자다. 카델리아, 지금 네 이 무례는 애정으로 보아넘기겠지만-”

    다음에도 이런 주제넘은 짓을 한다면.

    “폐하의 눈이 닿지 않는 이곳에서 무슨 일까지 일어날 수 있을지. 네게 똑똑히 알려주도록 하지.”

    * * *

    카델리아는 울먹이며 떠났다. 제 분을 이기지 못한 까닭에.

    황궁에서부터 따라온 시녀들이 카델리아에게 바다로 놀러가자느니, 경치가 너무 예쁘다느니 말들을 했지만 무슨 말을 들어도 그녀의 기분은 풀어지질 않았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이안이 라딘 성에 없다는 것. 그는 카델리아와 함께 온 사제들과 함께 임시 신전을 살피러 갔다고 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도대체 그건 뭐였지?’

    오필리아의 집무실을 찾아갔을 때 겪은 수모 때문이었다.

    그때를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몸에 소름이 돋았다.

    온몸을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고, 심지어는 숨 쉬는 것조차 어렵게 느껴졌다.

    마치 기백에 압도 당하는 것 같은 기분.

    설마 정말 자신이 오필리아에게 짓눌렸다는 걸까?

    ‘말도 안 돼!’

    오필리아하고 얽히기만 하면 믿고 싶지 않은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오필리아의 존재가 카델리아를 갉아먹는 것만 같았다.

    이 수모와 모멸감은 반드시 갚아줄 것이다.

    그렇게 되새기며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드는데, 그때 카델리아의 눈앞을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오후의 햇살 아래 희게 빛나는 은발과 금안. 우수에 찬 것처럼 보이는 깊은 아이홀과 얇고 곧은 입술. 한 번 마주한 이상은 도저히 잊히지가 않을 것 같았던 아름다운 외모.

    그는 카델리아를 황궁 어딘가로 날려 보냈던 바로 그 마법사였다.

    * * *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지고 난 뒤에야 예니트는 다시 입을 열 수 있었다.

    “……저, 오필리아. 방금 그 사람은 혹시-”

    “내 이복동생이에요. 부모님이 너무 귀여워하셔서 아직도 세상 물정을 좀 몰라요. 아껴 줘도 아껴 주는 줄 모르고 매번 저렇게 나한테 대들어서……. 그나저나 험한 꼴을 보였네요. 미안해요.”

    “아닙니다. 그보다 뺨은 좀 괜찮으십니까?”

    “이 정도야 뭐. 그보다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예니트?”

    오필리아의 시선이 예니트를 향했다.

    그녀는 조금 전 아끼는 동생에게 험한 꼴을 당한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차분했고, 또 상냥했다.

    다른 때였더라면 그 괴리감을 의심했을지 모르겠지만, 예니트는 조금 전 카델리아의 등장으로 생각이 많이 바뀌고 말았다.

    ‘나 같으면 못 참았을 텐데.’

    오필리아는 카델리아를 위해 예니트에게 특별히 부탁을 해 가며 도로를 정비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오자마자 하는 짓이 뺨을 때리고 막말을 하는 것이라니?

    그걸 참아낸 오필리아는 인내심과 상냥함의 화신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라면 분명 알레한드로 님과 함께 있어도 괜찮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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