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화
예니트의 경우 불편하기는커녕 너무 잘 지내서 살이 통통하게 올랐다.
오늘 오찬에도 오필리아는 예니트와 코르넬리를 위해 성대한 식사를 내왔다.
가장 메인 요리는 샴페인 소스에 구운 우럭과 갑각류 무스.
해산물을 좋아하지 않는 예니트를 위한 양 정강이 구이를 자두 소스와 함께 구운 아스파라거스를 곁들여 내왔으며, 전채로는 밀레세트 동부식 생선 완자와 적포도주 향이 배도록 찐 관자 요리, 연어 그라브락스와 클램차우더 등이 나왔다.
거기다 예니트를 가장 만족시킨 것은 싱싱한 야채였는데, 식탁 위에는 자그마치 세 종류의 각기 다른 샐러드가 올라왔다.
유자 소스에 조린 비트 카프레제, 바싹 구운 베이컨을 잘게 부수어 토핑으로 얹고 다진 양파와 마늘, 레몬과 오일 등을 섞어 만든 드레싱을 올린 샐러드, 마지막으로 제철 과일을 넣은 샐러드까지.
북쪽에서 지내느라 싱싱하고 다양한 야채를 접하기 쉽지 않았던 예니트에게는 그야말로 단비 같은 메뉴 선정이었다.
로넨으로 돌아간다면 가장 먼저 이 식탁이 떠오를 거라 장담할 만큼.
하여 예니트는 마음속에 아쉬움을 가득 품고 입을 열었다.
“당신을 찾아온 건 이제 그만-”
작별을 고하기 위함이라는 말을 뱉으려는 바로 그때.
“오필리아 밀레세트!”
돌연 밖이 소란해지나 싶더니 고요하던 오필리아의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리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문 앞에 서 있는 것은 예니트로서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손끝까지도 완벽하게 치장한, 척 보기에도 신분이 상당히 높아 보이는 귀족 여자.
그녀가 누군지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오필리아의 이복동생, 카델리아 밀레세트가 라딘으로 오기로 했다는 것은 이미 며칠 전부터 매일같이 들은 일이었으므로.
게다가 두 사람은 어딘지 제법 닮아 있었기에, 같은 혈통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카델리아가 머리끝까지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는 부분이었다.
카델리아는 애써 빗어 둔 금발이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음에도 정돈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아무래도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달려온 건지.
그러나 예니트가 의문을 한 번 곱씹어 보기도 전에, 여자가 방안을 성큼성큼 가로질렀다.
그리고는 예니트를 밀치고 오필리아의 맞은편에 서더니, 그녀의 뺨을 냅다 후려쳤다.
“이 여우 같은 게!”
철썩, 소리와 함께 오필리아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산테는 당연하고, 예니트까지 표정을 차갑게 굳힌 채 카델리아를 노려보게 된 탓이었다.
등지고 있는 카델리아에게는 보이지 않겠지만, 오필리아에게는 너무도 잘 보이는 얼굴들.
‘이렇게 예니트까지 포섭할 수 있겠군.’
정말로 떠나겠다고 하면 뭐라고 붙잡을지 조금 고민이었는데.
다행히 시기가 좋았다.
오필리아는 속으로 픽 웃었다.
그녀는 정말로 호감을 사는 일에는 자신이 있었다.
물론, 악의를 사는 일에도 그렇지만.
* * *
카델리아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라딘으로 오는 내내 분을 삭이려고 해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가라앉질 않았다.
‘오필리아 밀레세트!’
자신보다 고작 몇 년 일찍 태어났다는 것 말고는 잘난 것 하나 없는 제 이복 언니 때문에.
본디 모든 건 순조로웠다.
며칠 전 라딘에 있는 그녀의 충실한 세작으로부터 편지가 왔을 때부터 그랬다.
“뭐? 로넨 대공께서 라딘에 표류하셨다고?”
릴리스가 보낸 편지에 있는 내용은 정말 놀랄 만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믿지 않기에는, 로넨 성의 영주만이 가질 수 있는 직인이 편지 하단에 찍혀 있었다.
그것은 로넨 성의 영주, 즉 로넨 대공이 끼고 있는 반지의 직인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릴리스의 말이 흰소리가 아니라는 게 증명되었다.
카델리아를 매몰차게 등지고 떠났던 로넨 대공이, 다시 밀레세트로 돌아온 것이다!
“이렇게 낭만적일 데가!”
카델리아의 순진한 머릿속이 낭만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표류를 당한 이안이 무슨 고초를 겪었을지에 대한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표류라는 단어가 낭만적으로 느껴진다며, 이건 분명 운명의 길을 열어 주기 위함이라고 가슴 설레할 뿐.
정말 안일하고 멍청한 발상이 아닐 수 없었으나,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않으냐는 생각을 하는 카델리아에게 이 정도는 당연할 정도였다.
다른 사람들은 열다섯 살 부근에서 벗어나야 할 자기중심적 사고를, 머릿속에 꽃을 기르는 공주님인 카델리아는 아직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오필리아 따위가 각하의 운명일 리 없지. 이건 나 때문이야. 나와 이어지기 위해서 돌아오신 거야!”
하지만 마냥 안심할 수는 없었다.
‘최대한 빨리 각하를 보러 가야 해.’
그렇지 않으면 그 여우 같은 오필리아가 또 무슨 농간으로 제 앞길을 가로막을지 모른다.
그러지 않아도 카델리아는 오필리아가 라딘으로 떠난 뒤 내내 속앓이를 한 참이었다.
시작은 그녀가 오필리아를 찾아갔을 때 자신을 막아선 그 무례한 마법사 때문이었다.
얼굴 빼고는 잘난 것도 없어 보이는 마법사가 그녀를 황궁 어딘가로 순간이동 시켜 버렸던 탓에 카델리아는 그날 두 시간 넘게 황궁을 헤매야 했다.
그것도 화가 나서 미치겠는데, 가장 답답한 부분은 그 마법사가 누구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는 부분이었다.
아니, 심지어 카델리아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조차 없었다!
“남자 마법사가 황녀 전하를 어디론가 순간이동 시켰다고요? 그런 고난도 마법이 가능한 사람은 이 제국에 둘밖에 없습니다.”
“그럼 그 둘 중 하나겠지. 당장 잡아 와!”
“그럴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한 분은 교역 문제로 수도에 계시지 않고, 다른 한 분은 여자분이신데요.”
황궁 소속 마법사들을 관리한다던 사람은 그렇게 말하며 흘끔 카델리아의 눈치를 봤다.
혹 카델리아가 착각을 하는 건 아닌지 살피는 것이었다.
그 사실이 카델리아에게는 모욕이었다.
“내가 정말 겪었다니까! 착각이 아니라고!”
“하, 하지만 전하. 현재 황궁의 마법사 분 중엔 그럴 수 있는 분이 없습니다……!”
마법사 관리 담당뿐이 아니다. 누굴 찾아가도 같은 대답만을 돌려주었다.
심지어 카델리아를 끔찍이 아낀다고 말하는 그녀의 아버지, 황제까지도.
“정말 꿈이라도 꾼 게냐? 궁 안 적당히 들쑤시고 자중하거라!”
믿었던 아버지에게 한 소리 듣기까지 하자 서럽고 억울해서 눈물이 났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눈물 바람인지, 끌끌. 오필리아가 태생은 그래도 제법 쓸만한데, 너는 어찌 날이 갈수록 더 어리광만 느는 게냐! 이래서 어느 곳에 널 보낼 수 있겠어!”
“……부황, 보낸다니요?”
“혼기가 찼는데 그럼 언제까지 황궁에만 있으려고? 너도 혼처를 찾아야 할 것 아니냐. 그게 밀레세트와 너 모두에게 득이 될 테고.”
황제가 하는 말은 명료했다. 정략결혼을 시키겠다는 뜻이다.
배신감이 카델리아의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분명 전에는 제가 원하는 결혼을 하게 해주겠다 약속한 황제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말을 바꾸다니?
“부황, 제게 약속하셨던 것이 있지 않으신가요? 분명 제게-”
“카델리아. 황실에 속한 이들은 사사롭게 결혼할 수 없다는 걸 너도 알지 않으냐. 언제까지 어리광만 부리려고?”
그렇게 말하며 차갑게 자신을 바라보는 황제의 눈은 더 이상 아버지의 것이 아니었다.
그건 단지 군주의 눈일 뿐.
그때 오필리아가 떠나기 전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잘 생각해 봐라, 카델리아. 부황께서 널 아끼시는 것은 맞지만, 불가피한 상황이 오면. 나라와 딸 중에서 부황이 과연 무얼 고를 것 같니.
-설마 너라고는 생각하지 마. 나중에 울게 될 테니까.
어쭙잖은 헛소리라고 여겼던 오필리아의 말이 적중한 순간, 카델리아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비참해졌다.
수치스러웠다.
이렇게 정말 황제의 뜻대로 정략결혼을 하게 된다면 그때는 이 모멸감이 더해지리라.
‘그렇게는 안 돼.’
황제의 말마따나 황족은 사사로운 감정에 휩쓸려 행동할 수 없다.
그래서 황족에게 연애결혼이란 그 자체로 권력의 증명이었다.
그렇게 해도 괜찮을 만큼 황제의 총애가 있다는 뜻이고, 뒷배가 있다는 뜻이니까.
‘이미 사방에 연애결혼을 할 거라고 말해놨는데.’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정략결혼을 하게 된다면 제 꼴이 말도 안 되게 비참해질 게 뻔했다.
하지만 달리 피할 수 있는 방법도 없으니,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황제가 등을 돌린 날 카델리아는 펑펑 울었다. 그리고 며칠째 수심에 잠겨 지내고 있었는데.
이안이 라딘의 해안에 표류했다는, 가문 땅에 단비 같은 소식이 찾아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