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화
“그, 그런 쓸데없는 거나 배우고 있으니 정작 필요한 걸 못 배우는 거죠! 그건 허영이에요!”
정작 제 밑천이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은 릴리스가 낯을 새빨갛게 붉히며 항변했다.
“전하께서는 아는 척을 하려고 그걸 배운 거예요. 고대어를 쓸 일이 뭐가 있다고 그걸 배우겠어요? 내가 왜 근신을 당했는데? 그런 이상한 거나 익혀 와서는 본인 명령을 조금만 어겨도 자길 무시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피해 의식에 찌들어 있다고요!”
“당신이 부관이라면 오필리아의 명령을 조금만 어기는 것도 오필리아를 무시하는 행위가 맞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그럴 만하니까 그렇죠! 하, 내가 이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릴리스는 제 험담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크게 당황하며 씩씩거리더니, 돌연 태도를 바꾸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예니트로서는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전하는 황궁에 계실 때 로넨 대공과도 스캔들이 있었고, 영주님도 시간을 보냈다니까요. 그런 주제에 요즘은 잘생긴 마법사 하나를 끼고 다니던데요. 그 왜, 알레이라고…… 말단직인데.”
그것은 오필리아가 가진 추문에 대한 이야기들이었으므로.
다른 사람과의 추문은 예니트에게 있어 솔직히 말해 크게 신경 쓸 내용이 못 되었지만, 그 사이에 알레이가 끼어 있다는 것은 아주 큰 문제가 되었다.
오필리아가 알레이의 단물을 쪽 빨아먹고 버릴 거라는 심증에 무게를 더해 주는 셈이 되었으니 말이다.
덕분에 예니트는 혼란스러워졌다.
오필리아가 좋은 사람처럼 보였던 것은 정말로 제 착각에 불과했단 말인가?
그렇게 좋은 모습을 보인 것들이 모두 가식이었던가?
‘아니, 물론 대단한 사기꾼일 가능성이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래도 보아 온 모습이 있다 보니 아닐 거라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추가 기울었던 모양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예니트가 본 오필리아는 정말 세심한 것 대부분을 신경 쓰는 사람이었으니.
불과 어제만 해도 예니트는 오필리아의 부탁을 받아 도로 공사 현장에 나갔다 왔다.
부탁받은 내용은 간단했다.
“예니트, 여기서부터 여기까지의 땅을 다져 줄 수 있나요? 말이 넷 달린 마차가 지나가도 튼튼할 수 있도록.”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만, 이유가 뭐죠?”
“내가 지나 보니 이 근방이 가장 불안정하고 덜컹거리더군요. 내 마차는 말이 두 마리였는데, 사두마차가 달리면 이쪽은 지반이 약해서 무너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시골에 사두마차까지 달릴 일이 있을 것 같지 않은데요.”
“아뇨, 곧 생길 거예요. 아마 오늘내일 중으로.”
내 이복동생이 올 거거든요. 그렇게 말한 오필리아는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그 애는 과시하는 걸 좋아해서 어딜 갈 때는 꼭 사두마차를 끌어요. 물론 여기까지 오려면 가져와야 할 옷도 많을 테니 마차가 큰 것도 유념해야겠지만.”
그러니 요약하자면 큰 마차가 지나갈 게 예정되어 있으니 공사로 인해 약해진 기반을 좀 다져 두고 싶다는 것이다.
부탁이라면 못 할 것도 없겠지만, 예니트는 굳이 자신을 고른 이유가 궁금했다.
“알레한드로 님께서 저보다 더 잘하실 텐데요?”
“이런 일에까지 부르기는 좀 그렇잖아요. 알레이가 현재는 내 부하로 있다고는 해도 이런 사사로운 일에까지는.”
“나는 되고요?”
“당신은 나한테 빚이 있으니까. 내가 당신을 알레이와 코르넬리 씨보다 빠르게 만나게 해 줬잖아요. 공문까지 두 번 보내서.”
아, 맞다. 그랬지. 예니트는 그제야 어떻게 보자면 오필리아가 제 은인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예니트는 감사의 인사와 함께 서둘러 땅을 다져 주었다. 수분을 좀 빼고 염력으로 눌러 다지면 금방 끝나는 일이었다. 물론 그걸 하고 나서 마력은 바닥이 좀 났지만.
제 동생이 온다는 말에 그렇게 나서는 오필리아를 도저히 외면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추문들이라니.’
릴리스의 말을 완벽하게 믿기는 어려워도, 그런 분란의 여지가 있다는 것부터가 예니트에게는 썩 달갑지 않았다.
역시 안 되겠다.
‘우선은 알레한드로 님을 모시고 로넨으로 가야겠어.’
기억을 찾고 말고는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예니트가 보기에, 오필리아 밀레세트는 위험했다.
‘그나마 로넨은 좀 익숙하니까.’
피난처로는 딱이었다.
제가 몇 년 간 지낸 터전도 있고.
게다가 로넨의 주인인 이안도 얼마 전 예니트에게 은근히 로넨에 다른 마법사를 데려갈 생각이 없는지 물었으니까.
사실, 처음 이안은 예니트를 보고는 상당한 당혹을 넘어 경계까지 표했다.
아마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니 그랬으리라.
자신을 치료하기 위해 이동 마법진까지 사용하며 급히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금세 누그러졌고 말이다.
“그래도 하나 있는 마법사가 성을 오래 비우면 안 될 것 같은데. 복귀는 어느 즈음으로 잡고 있지?”
“각하께서 완쾌하시고, 개인적인 일이 해결되면 돌아가려 합니다.”
이안은 예니트가 곧장 돌아가 주기를 바라는 눈치를 주었지만.
“되도록 오래 지내고 싶습니다.”
애석하게도 예니트는 이런 데에는 특출 나게 눈치가 없었다.
특히나 예니트의 입장이 이안에게 종속된 것이 아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예니트는 어디까지나 마탑에서 파견 지원을 나온 입장으로, 그녀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었다.
‘물론 로넨 대공이 위독하다거나 하는 식의 중대사에는 최우선으로 움직여야 하지만.’
그 외의 부분은 이안도 그녀를 강제할 수 없는 셈이다.
그러니 예니트는 눈치를 볼 생각도, 그럴 능력도 없었다.
“늘 추운 기후에 있다가 이런 곳에 오니 고향 생각이 나고 좋더군요.”
“마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좀 곤란한데. 로넨에는 아직 마법이 많이 필요해서.”
“그런 건 아니니 걱정 마십시오. 저는 추운 기후가 좋습니다.”
예니트의 시원시원한 대답에 이안은 잘생긴 낯을 조금 찡그려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로넨에도 마법사가 조금 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요즘 자주 드는군. 이렇게 자네가 자리를 비울 때는 곤란하니까. 혹 지인을 데려갈 생각은 없나? 아주 잘 대우해 줄 수 있는데.”
“지인이요?”
“그래. 지금 이 성에 기거하는 마법사들이 자네와 구면이라고 들었는데. 그들과 로넨으로 간다면 자네에게도 좋지 않을까 싶어서.”
이안은 한 번 생각이나 해 보라는 식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그는 예니트가 이곳에서 오래 지내고 싶어 하는 이유가 마법사 지인들 때문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그가 바라는 것은 알레한드로, 코르넬리와 함께 예니트가 로넨으로 다시 돌아가 주는 것이었으리라.
이유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로넨이 언제나 마법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익숙한 사실이었으니까.
‘그래, 로넨으로 가자.’
예니트의 마음 속 무게의 추가 기울었다.
알레이가 당장 마탑 세이렌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차라리 로넨으로라도 데리고 가는 쪽으로.
그래서 예니트는 오늘 오필리아를 찾아왔다.
그랬더니 보인 게 세이렌의 수장이 책상을 닦고 있는 모습일 줄 누가 알았을까.
이 사실에 예니트는 잠시 혼란스러워졌지만, 머지않아 마음을 다잡았다.
‘오필리아가 세이렌의 수장을 부릴 만한 사람이라면 지금의 알레한드로 님께도 그럴 수 있어.’
그리고 그렇게 둘 생각은 없었다.
비록 오필리아가 정말 잘 대해 주기는 했지만.
그리고 지켜본 결과 좋은 사람임이 분명한 것 같기는 하지만!
역시 추문을 끌고 다니는 바람둥이 옆에 금쪽같은 알레한드로 님을 둘 수는 없었다.
아, 차라리 오필리아의 목적이 뭔지 속 시원하게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잘 대해 준 사람을 등지는 건 좀 껄끄럽단 말이지.’
얘기를 하겠다고 다짐하고 찾아오긴 했지만 역시 찝찝한 기분이다.
못할 짓을 하는 것만 같아 예니트가 우물쭈물하자 오필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용건이 있다면서요, 예니트. 어디 불편한 점이라도 있나요?”
“아, 그건 아닙니다.”
“사람들이 너무 귀찮게 구는 건가 해서요. 마법사는 고급 인력이라 요청하는 곳이 많거든요.”
“괜찮습니다. 이미 많이 겪은 일이라.”
로넨에서 지내며 거절하는 데에도 요령이 붙었다.
비록 요령이 없는 코르넬리는 거절을 못해서 해가 다 지도록 불려 다니고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