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화
메르시아는 의심의 기색 없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편지를 다시 읽었다.
“그렇군요. 예니트 루헨이 그녀의 목적을 의심하고 있다고 해서 여쭈었습니다. 아무래도 일반인들 사이에 끼어 있다 보면 시비에 연루되기도 쉬울 테니까요. 진상을 밝히고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하는군요.”
그 말에 산테가 기대 있던 팔을 풀고 놀란 눈을 했다.
“뭐, 오필리아를 의심한다고?”
“그녀의 이름이 오필리아인가 보군요. 당신도 가시거든 그녀를 경계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예니트의 촉은 제법 잘 들어맞거든요.”
메르시아는 그렇게 당부했지만, 산테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마탑으로 향하기 전 오필리아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오르고 만 까닭이었다.
편지를 배달해야 하는 입장에 대해 산테가 몇 마디 투덜거리자 오필리아는 그녀가 편지를 받아 온 이유를 산테에게 설명하려 했다.
-되도록 호의를 베풀어서 경계심을 낮춰야 해서 그래요. 날 보는 눈이 썩 곱지 않은 사람도 있거든요.
그게 그 예니트인가 뭔가 하는 인간인가 본데.
글쎄.
-회유하지 못할 거란 생각은 없어요. 시간문제인 거죠.
-왜, 실패할 수도 있지 않나?
-난 내가 원할 때 호의를 사는 데 실패해 본 적이 없어서요.
굳이 자부하려는 것도, 으스대려는 것도 아닌 말투였다. 지극히 당연해서 그것을 셈하는 것이 도리어 어색하다는 것처럼.
그리고 굳이 말하자면 산테는 오필리아가 이긴다는 쪽에 거는 입장이었다.
그 역시도 호의를 빼앗기고 만 상대 중 한 명이었기에.
오필리아의 말을 떠올리며, 산테가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과연 어떨지 기대가 되는군.”
“떠나려는 겁니까?”
“아, 그래. 돌아갈 곳이 있거든.”
그렇게 말한 산테가 유혹적인 눈매를 접어 미소 지었다.
청록색 숲에서, 그는 오필리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정말 홀리기라도 한 것인지.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 세이렌에게 회귀지가 생겼다.
산테는 그것이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설령 그 끝에 도사리는 것이 난파라고 해도 말이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청록색 숲으로 가기 전. 절벽을 찾아가고 싶다는 오필리아의 말에 그녀를 안아 들었을 때.
그가 제 망토로 오필리아를 감싼 것은 비단 방한을 위한 것뿐이 아니었다.
산테가 정원에 내려앉기도 전부터 구석에 숨어 있는 인기척을 알아챈 탓이었다.
검은 머리와 은색 눈.
산테가 한 발 먼저 오필리아에게 다가가자 제 먹이를 빼앗긴 것처럼 형형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던 수컷 인간.
차마 나설 용기조차 없는 주제에 노려보는 꼴이 같잖았다.
그 탐욕스러운 시선이 오필리아를 향하는 게 싫었고.
그래서 과할 정도로 오필리아를 꽁꽁 싸서 데려갔다.
‘아마 오필리아의 옆에 있으면 그놈을 다시 만나겠는데.’
다음에도 그놈의 사지를 찢어 놓지 않고 참을 수 있을까.
그게 유일한 걱정이었다.
* * *
“……그래서. 세이렌의 수장인 당신이 여기서 뭘 한다고요?”
“보면 모르나?”
“시각이 주는 신호를 곧이곧대로 믿는 건 열 살 즈음부터 그만둬서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니트는 안경을 한 번 벗어 닦았다.
그리고 다시 썼다. 시야에는 여전히 세이렌 특유의 유혹적인 얼굴이 있었다.
문제는 그 유혹적인 얼굴이 평소 예의상 입던 헐거운 셔츠가 아닌, 앞섶을 제법 여민 정복을 입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그는 책상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주 질서정연하게.
그리고는 책상의 주인에게 묻는 것이다.
“이만하면 되겠나, 오필리아?”
“책상은 이만하면 되겠네요. 저쪽에 있는 책 좀 도로 꽂아 줘요.”
“원한다면야.”
그 광경을 본 예니트는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세이렌을, 시종으로 부리다니…….”
“이렇게까지 부릴 생각은 없었지만요.”
책상에 앉아 있던 오필리아가 느슨히 턱을 괴며 말을 받았다.
“가만히 있기 심심하다고 일을 찾더군요. 제법 적성에 맞는 것도 같고.”
시중을 받는 데 익숙한 오필리아는 벌써 이 낯선 광경에 적응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세이렌을, 그것도 그들의 수장을 시종으로 부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녀에게는 별로 와 닿지 않았거나.
‘저 변덕스러운 세이렌을 무슨 말처럼 순하게 만들다니…….’
하지만 예니트에게는 아니었다.
그녀는 도저히 이 광경에 적응할 수도 없었고, 세이렌을 부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도 않았다.
사실 예니트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세이렌의 흉포함과 변덕에 대해서는 마탑에 기거하는 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었으니까.
매력적인 목소리와 얼굴을 하고 있으나, 자칫 다가갔다가는 얼굴이 뜯겨 나갈 수도 있는 위험한 종족. 그게 세이렌이었다.
그들의 환심을 살 수 있다고 해서 안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자유롭고 강한 만큼 쉽게 마음이 바뀌니까.
어제까지 친구로 지냈던 인간을 다음날 갈매기 먹이로 줄 수도 있는 셈이다.
‘오죽하면 하급 마법사는 세이렌과 접촉할 수도 없게 해 두었는데.’
마탑에서 세이렌과 접촉할 수 있는 건 중급 마법사부터였다.
혹여나 세이렌이 변덕을 부려 머리를 으깰 수 있으니 스스로를 지킬 능력이 충분치 못한 하급 마법사들은 접촉조차 금지되어 있었다.
하지만 중급도 완벽히 세이렌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다는 뜻은 아니었기에.
대부분의 편지나 심부름 전달은 고위 마법사가 담당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래서 알레한드로 님이 대단한 것도 있었는데.’
흉포하기로 이름난 세이렌의 수장과 막역하게 지낸다는 것은 그 자체로 범상치 않은 재목이라는 증명이었다.
그리고 그걸 알레한드로 디아뮈드, 예니트의 주인이 해 냈고 말이다.
혹자는 산테가 수장이기에 세이렌치고 유순한 성정인 것은 아니냐 물을 수도 있겠지만…….
-산테? 유한 편이지. 적어도 마탑의 마법사는 잔인하게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했거든.
……라고 했던 알레이의 말을 떠올려 본다면 썩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덕분에 예니트는 혼란스러워졌다.
대체 자신이 머물고 있는 이곳에서 무슨 천재지변이 일어나려고 이러는 건지.
마탑의 주인과 세이렌의 수장을 제 솔정처럼 부리는 저 여자는 대체 무얼 꾸미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해.’
예니트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오필리아를 훑었다.
라딘 성에서 머물게 된 지 약 일주일 째. 그녀는 아직도 의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라딘 성은 오필리아의 손님들을 환대했다.
오필리아가 코르넬리는 영주의 허가를 받아 도로 재건을 위해 부른 마법사로, 예니트는 로넨 대공의 치료를 위해 부른 마법사로 말을 해 둔 덕분이었다.
그렇잖아도 라딘은 마법사나 신전의 사제 같은 고급 인력이 부족한 지역이었기에 그들은 더욱 환영받았다.
‘정말 그때 못 들은 걸까?’
하지만 예니트는 며칠 째 이 의심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며칠 간 지켜본 결과 오필리아의 겉모습은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아니, 안타까울 만큼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옳겠다.
그녀는 성내에서 평판이 좋았다.
“로넨 대공을 해변에서 구해 오신 것도 황녀 전하셨죠. 나쁘게는 생각지 않아요.”
“황녀라는 이름을 달고 있으니 굉장히 까탈스럽고 콧대가 높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그렇지도 않더라고요.”
오필리아에 대해 물을 때마다 사용인들이 이렇게 입을 모아 말할 정도였으니까.
‘확실히 예의 바른 사람이었지.’
예니트는 마탑에서도 굉장히 사회성이 좋은 축에 속했다.
원래도 그랬지만, 로넨에서 생활하며 바깥의 논리에 많이 익숙해진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런 예니트가 보기에 오필리아는 정말 모범적인 사람이었다.
‘코르넬리 그 녀석, 그 여자가 몇 번 잘 대해 줬다고 경계를 완전히 풀어 버려서는.’
코르넬리가 세이렌의 깃털을 깜빡한 것 때문에 우왕좌왕하자, 그녀는 흔쾌히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러니 코르넬리가 홀딱 넘어간 것도 이해는 되지만, 예니트는 여전히 경계를 풀 수 없었다.
모두가 입을 모아 오필리아가 무던한 사람이라고 말할 때, 딱 한 명 오필리아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낸 사람이 있었던 탓이다.
“황녀 전하는 겉으로만 좋은 사람이에요.”
바로 그녀의 직속 부관 릴리스 메일리.
밀색 머리칼을 가진, 전형적인 밀레세트의 귀족 여자.
예니트가 그녀를 알게 된 것은 제법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자세한 이유는 몰라도 릴리스가 예니트가 온 날 근신을 당해 방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입장이 된 탓이다.
릴리스는 근신이 풀리자마자 오필리아가 데려온 손님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득달같이 예니트를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