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화
산테의 눈이 가늘어졌다.
“표정을 보아하니 디안이 네게 조건식 마법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준 모양인데.”
“그리고 당신은 모든 걸 알면서도 아리엘을 끌어들였죠. 그 끝에 죽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래. 그래서 내가 그 인어를 동정해야 하나?”
산테의 물음이 날카롭게 돌아갔다.
“오필리아, 네가 오해하는 것 같은데. 전생에 아리엘이 뭍으로 올라온 건 본인의 선택이었다. 이번 생에서도 그럴 테고. 그걸 네가 무슨 자격으로 동정하는 거지?”
물음이 날카로운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아리엘을 만났을 때 해변에서, 산테는 오필리아의 말 속 숨은 죄책감을 느꼈다.
아리엘이 죽은 것이 운명의 엇갈림 때문이라고 말하면서도 본인의 책임을 끝끝내 놓지 못하던 모습.
인간들은 세이렌의 몇 배는 짧은 생을 살면서 몇 배는 더 많은 것에 얽매여 살았다.
산테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모두가 뜻대로 산다, 오필리아. 원망도 책임도 당사자에게 있는 셈인데. 네가 그걸 짊어질 필요는 없지.”
남의 선택에 책임을 느끼는 오필리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었던 비극 따위에 그녀가 매여 있는 걸 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럴 바엔 아리엘과 그 수컷 인간이 나란히 사라져 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아리엘을 불렀다. 뭍으로 가고 싶다면 가라고. 가 버리고, 제 유흥을 더는 방해하지 말라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당신은 내가 걱정이 됐다는 거죠, 산테.”
오필리아의 목소리가 산테의 말을 툭 끊었다.
그녀가 웃고 있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이야기가 이쯤 오자 그는 더 부정할 수 없어졌다.
“당신이 내게 흥미가 있다는 걸 알아요.”
오필리아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녀에게서 뻗어 나온 고요한 파동은 언제나 집채만 한 파도가 되곤 했다.
“더 즐겁게 해 줄게요. 내 곁에 머물러요.”
그의 눈앞에서 불꽃이 파도쳤다. 언제나 물을 가까이하고 살았던 그에게 이처럼 뜨거운 유혹은 없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본디 세이렌은 뱃사공을 홀리는 종족인데.
도리어 제 쪽이 홀린 기분이 들었으므로.
* * *
그림자조차 없는 깊은 밤.
산테는 익숙한 암초 틈을 홀로 유영했다.
그가 있는 곳은 배로는 도저히 지날 수 없는 험준한 암초 섬이었으나, 산테에게는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길이었다.
이 너머에는 세이렌의 군락지가 있고, 더 나아가면 마탑이 있었다.
역시 그들의 이름을 딴, 세이렌.
산테가 창을 열고 들어가자 책상 앞을 지키던 청년이 일어나 안경을 벗었다.
알은 체를 하는 것이다.
“야심한 시각인데, 드문 방문이시군요. 산테.”
“전달을 부탁받은 편지가 있어서 말이지.”
상대는 제법 구면이었기에, 산테도 고개를 까딱여 인사했다.
‘이름이 메르시아라고 했던가.’
인간들에게는 관심이 없는 그였지만, 아무튼 마탑에서 제법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것만큼은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가 나다니는 창이 있는 이 방은 상급반 이상의 고위직이 아니라면 발끝도 들일 수 없는 곳이었으니.
예전에는 알레이가 이곳에 있곤 했던 걸 생각하면 산테를 반긴 사내가 마탑의 2인자 정도는 되리라는 짐작을 할 수 있었다.
곧은 장발과, 살짝 처진 눈매가 퍽 유순한 느낌을 주는 이 미청년은 겁도 없는지 산테에게 성큼 다가와 편지를 받아 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맞은편에 앉아 봉인을 뜯으며 입을 열었다.
“개인적인 평가지만, 당신은 좋은 우편배달부는 아니어서요.”
“제법 구면이 되었다고 신랄한 평가를 막 내뱉는군.”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제가 거짓을 말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당신들은 한 장소에 사흘 이상 그림자 비치는 걸 무슨 금기라도 되는 것처럼 취급하지 않던가요?”
그런데 요즘은 매번 이 근처에 있는 것 같으니 하는 말입니다.
덧붙이는 말에 산테는 대답 대신 턱을 괴었다.
메르시아의 말은 얼추 옳았다.
일례로, 세이렌의 군락지는 대개 텅텅 비어 있다.
세이렌에게 둥지란 언젠가 쉴 곳이 필요해질 때 돌아올 수 있는 곳이지, 집처럼 오가며 기거하는 곳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은 이곳을 고향으로 삼지만 많은 시간을 바깥에서 보냈다.
대개는 마탑의 심부름을 하며 뭍을 오가기도 하고, 제 내킬 대로 날아가 배를 난파시키기도 하며.
세이렌들에게 한 장소에 사흘 이상 붙어 있는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오늘은 동쪽에, 내일은 서쪽에 가 있는 것이 그들이었으니.
그러니 산테의 최근 행보는 일반적이지 않았다.
‘며칠 내내 이 작은 해역에만 머물러 있었으니.’
마음 내키면 하룻밤 만에 대륙을 죄 건너다닐 수도 있는 종자가 그러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이례적인 일이었다.
분명 처음에는 이럴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내가 정말 심부름꾼도 아닌데 말이지.’
정신을 차려 보니 그는 아주 충실한 솔정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야밤에까지 성실하게 편지를 전달하고.
이 세상에 남은 유희거리가 오필리아 하나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애꿎은 라딘의 해역을 끊임없이 맴돌았다.
깃털이 부러져 분산해 둔 마력이 돌아오는 느낌이 들 때마다 물총새 쏘듯 날아가고.
‘아니지. 시키지도 않은 짓 하는 걸 생각하면 마냥 충실하다고 하긴 힘들겠군.’
정말 충실한 솔정은 주인이 시키지 않은, 아리엘을 몰래 만나는 짓 같은 건 하지 않을 테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행동들이 그를 마냥 즐겁게 하느냐면, 글쎄.
‘모호하군.’
오필리아를 마주하는 것은 분명 즐거웠다. 하지만 돌아설 때마다 갓 건진 해초처럼 눅진하게 엉킨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기분이 나빴으니 다음에는 보지 않으면 될 일인데, 깃털이 부러지기만 하면 기다렸다는 듯 날아가고.
뭔가 이상하다는 건 알겠는데, 해결해야 할 의지가 들지 않으니 더욱 기이하다.
그녀가 이 기현상의 원인이라는 것도 분명한데 생각하면 할수록 피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오필리아를 안아 들었을 때의 기억이 끊임없이 산테의 뇌리를 떠돌고 있었다.
그녀를 품에 안으면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행여나 떨어질까 두려워 어깨를 바투 붙잡은 손이나, 가깝게 닿은 몸이 천 아래 선명하고.
그럴 때 산테는 오필리아의 파란 눈동자에 담긴 설렘을 읽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제 품에 안길 때면 늘 평범한 인간의 몸으로는 갈 수 없는 고도에 다다르니까.
저도 모르게 기대하는 얼굴이 꼭 이슬을 맞은 꽃잎처럼 보여서, 입술을 한 번 대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생각으로, 상상으로 끝을 맺을 뿐.
산테의 시선이 이곳에 오기 전 만났던 이를 허공에 덧그렸다.
절벽 끄트머리에 서서는 바닷속으로 뱃삯이라며 동전 하나를 던져 넣었던 여자.
무슨 생각에선지 밤을 있는 대로 집어삼켜 희고 검기만 한 바다를 말끄러미 들여다보던 여자.
-왜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럴 수도 있죠.
솔직하지 못한 제 말에 기만으로 대답한 여자.
흥미로운 만큼 매력적이고, 또 그만큼 거슬리는. 이 모든 일의 원흉.
그녀는 자신의 목적을 다 이루자마자 품에서 편지 하나를 꺼냈다.
마법으로 봉인이 걸려 있는 편지.
-마탑에서 온 마법사가 작성한 보고예요. 그런데 세이렌의 깃털을 가져오는 걸 깜빡했다더군요.
-그놈이 좀 덜렁대게 생겼지.
-그래서 내가 부탁을 받았어요. 당신을 만날 일도 있으니 전해 주면 좋겠다 싶어서.
오필리아는 끝까지 아주 알뜰하게 산테를 써먹었다.
그걸 좋다고 들고 마탑까지 온 자신 또한 알만하지만.
회상의 끝에 또 산테의 입매는 제 각도를 잃고 비뚤어졌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산테가 남몰래 불만을 품는 사이 편지 검토를 마친 메르시아가 입을 열었기 때문에.
“코르넬리가 알레한드로 님께 잘 도착한 모양이군요.”
“그래. 오늘 아주 눈물 겨운 상봉을 한 것 같던데.”
“거기다 로넨에서 기거하던 예니트도 알레한드로 님이 계신 곳으로 지원을 왔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특이 사항으로는, 알레한드로 님께 가까이 지내는 일반인이 한 명 있다고. 혹 당신도 만나 보신 적 있으십니까?”
“만나기야 하지. 가면 자주 보이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오필리아를 찾아가는 것이었지만, 산테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태연히 거짓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