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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한 적 없다-63화 (63/118)
  • 제63화

    알레이가 언급되자 오필리아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산테의 말이 옳았다.

    비단 지형만을 찾고자 했다면 알레이를 불러 인근을 수색하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부르지 않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그가 당분간은 마법사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부분이었다.

    ‘예니트가 괜히 나를 감시하려 들면 안 되니까.’

    기껏 릴리스의 발을 근신으로 묶어 두었는데, 또 다른 감시자가 생긴다면 상당히 골치가 아플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해변에서 이야기한 것.

    -기억을 되찾을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오필리아.

    알레이는 마탑의 형벌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오필리아에게 설명했다.

    마탑의 방식은 인간을 개과천선 시키는 데 초점을 두기 때문에, 과오를 저지른 사람이 그 잘못을 거듭하지 않을 때 비로소 형벌이 끝난다는 내용이었다.

    -그 말은 내가 무슨 죄목으로 쫓겨났는지만 알아내면 기억을 되찾는 건 어렵지 않을 거라는 뜻이겠죠.

    -생각보다 간단하네요.

    -예. 그래서 당분간은 다른 마법사들과 최대한 시간을 보내 보려 하는데…… 참. 살펴보니 내가 흑마법에 손을 대는 과오를 저질렀을지도 모를 거라고 하는 이야기도 있더군요.

    -글쎄요, 그건 아마 아닐 텐데요.

    알레이는 기억을 되찾자마자 바로 마탑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니까.

    흑마법이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금기시된다는 사실은 오필리아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당신이 추방당한 이유는 다른 것에 있을 거예요.

    하여 오필리아는 확신을 가지고 말했고, 알레이는 어째서인지 그 대목에서 잠시 말을 잃었다.

    -날…… 믿는 겁니까?

    -혹시 흑마법을 썼나요?

    -그런 건 아니지만, 당신은 마법사가 아니니 바로 그렇게 부정할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인상을 쓰고 있었으나 목덜미가 붉었다. 아마도 쑥스러웠던지.

    오필리아는 문득 그의 그런 점이 못내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그의 낯 위로 미끄러진 햇살이 투명하리만치 맑았던 탓도 있으리라. 달빛을 닮은 그의 머리칼은 아이러니하게도 밤이 아닌 하오의 햇살 아래 더욱 신비로워 보이기 때문에.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남자는 희었다.

    빛을 잔뜩 받은 머리칼이, 울기라도 한 것처럼 엉겨 붙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속눈썹이. 붉어진 목덜미의 피부가 희었고, 돌린 낯 위로 투명하게 떠오른 감정들마저 희어 보였다.

    그러나 오필리아가 그런 알레이에게서 사랑스럽다고 느낀 부분은 다른 곳에 있었다.

    -내가 당신의 신뢰를 샀다니 기쁩니다.

    모로 돌아간 알레이의 시선이 다시 제게로 회귀할 것을, 오필리아 스스로가 막연히 직감하고 말았던 것.

    알레이는 그리 오래 고개를 돌리고 있지 않았다. 그는 직사광선 아래 드러났던 목덜미가 너무 뜨거워 그랬다는 것처럼, 뒷목을 손바닥으로 덮고 금세 돌아왔다.

    그렇게 돌아와 오필리아의 눈을 보고 말했다.

    기쁘다고.

    제 감정 드러내는 것이 익숙지 않아 고개를 틀었다가도 기어코 다시 자신을 보는 사람을 어떻게 싫어할 수 있을까?

    고독을 그림자 삼은 이 생에서 오롯하게 제 편이 되어 준 유일한 상대를.

    그가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해서 기뻤다.

    자신이 존중받지 못하는 것을 부당히 느끼는 것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증거 같아서.

    그가 부르는 제 이름이 제 결백과도 같아서 기뻤다.

    만약 이 생에 남길 이름이 있다면 아마 알레이의 것이리라.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에게는 더욱 알릴 수 없었다.

    알레이는 오필리아의 죽음에 굉장히 민감하게 굴었으니까.

    “그는 지켜 줘야죠.”

    오필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가져온 동전을 엄지 위에 놓고 가볍게 튕겼다.

    소리도 없이 허공을 부유한 동전은 금세 바닷속 심연으로 빨려 들어갔다.

    물론 어디까지나 짐작일 따름이기는 했다. 사위는 어두웠고, 밑에서는 날카롭게 벼려진 암초와 그보다도 사납게 맥동하는 파도가 한데 엉켜 있었으므로.

    날아오는 새조차 점으로 보일 만큼 높다란 이 절벽 위에서 뭐가 떨어진다고 보이기나 할까.

    아마 동전보다 훨씬 큰 게 떨어져도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오필리아는 무슨 생각에선지 잠자코 아래를 내려다보다, 뒤를 돌아 산테에게로 다가갔다.

    “내가 무슨 생각이냐고 물었죠, 산테. 내 목표는 여전히 같아요.”

    알레이의 기억을 되찾아 주고, 마탑으로 가는 것.

    물론 알레이가 기억을 되찾지 못할 경우를 대비하는 것 역시 그에 포함이다.

    문제는 방해가 되는 것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곧 라딘에 손님이 올 거예요. 내 이복동생인데.”

    “그럼 그쪽도 공주님이겠군.”

    “맞아요. 그리고 균형이 바뀌겠죠.”

    카델리아는 이안에게 관심이 있고, 이안이 이를 허투루 사용할 리 없으니.

    이안이 자신을 붙잡으려 들 거라는 것만 빼면 전부 염두에 두고 있었던 내용이다.

    그래서 오필리아는 일찍이 제 편이 되어 줄 이들을 긁어모았다.

    “내 패는 이제 얼추 다 모였어요. 아직 회유해야 할 상대가 있기는 하지만.”

    그를 제하면 남은 건 당신뿐이다.

    이 말을 듣고서야, 산테는 오필리아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웃는 건지, 화를 내는 건지 모를 모양새로 구겨진 낯이 헛웃음을 뱉었다.

    그의 앞에 선 저 인간 암컷은 산테에게 제 편이 되라 말하는 것이었다. 아주 당돌하고 같잖게도.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날 부른 건가?”

    “인간의 탐욕은 유구한 일이죠.”

    산테의 목소리가 확연히 사나워졌지만, 오필리아는 동요 없이 대답했다.

    쏴아아, 나무 흔들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차마 청록색이라는 표현을 쓰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검어진 숲.

    달빛조차 나뭇잎 그림자에 가리운 음지에서 그녀는 이상할 정도로 눈길을 끌었다.

    으스대는 것도, 자부하는 것도 아닌 낯은 늘 그렇듯 관조적이다.

    바람에 깃발처럼 나부끼는 붉은 머리칼과 푸른 눈동자 안의 청염이 그토록 선명한 것이 도리어 의아할 만큼.

    ‘그래.’

    의아하다. 산테는 자신이 저 인간 암컷을 마주할 때면 드는 감정을 그제야 정의 내릴 수 있었다.

    벌써 밤이 깊었다. 사위가 검다.

    게다가 오필리아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그녀는 늘 시선을 피해 나오곤 했고, 오늘은 알레이에게조차 알리지 않았으니.

    그러니 산테가 오필리아를 여기다 두고 가기만 해도 그녀는 죽을 것이다.

    청록색 숲과 라딘 성은 꽤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이런 어두운 숲에서 길을 찾기란 어려울 테니까.

    그런데 대체 무얼 믿고 저런 말을 하나.

    “오필리아. 너는 내가 두렵지도 않나?”

    산테는 결국 제 안에서 휘몰아치던 의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

    “이해가 안 가. 내가 네게 자주 협조한다 해서 네 주제넘은 행동을 두고 볼 거라는 보장도 없는데.”

    하물며 인간에게도 그런 신뢰를 보이진 않을 텐데.

    “세이렌들은 변덕스럽고 사납죠. 알고 있어요.”

    “그런데도?”

    “당신, 아리엘을 만났더군요.”

    오필리아가 잔잔히 입을 열었다. 고요 위의 파동을 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리엘에게 뭍으로 가는 걸 돕겠다고 했다면서요.”

    “……어떻게 안 거지?”

    “그런 표정 할 것 없어요. 당신도 알지 않나요?”

    낮말을 누가 듣는지. 오필리아의 말에 산테가 그제야 알겠다는 듯 조소를 흘렸다.

    “어린 세이렌들한테 들은 거로군?”

    “그래요. 아까 잠깐 볼 일이 있었거든요.”

    그리고 오필리아는 어린 세이렌들의 호의를 사는 방법을 아주 잘 알았다.

    -세이렌. 무화과 파이 먹고 싶지 않니?

    -먹고 싶어!

    -그럼 일전에 했던 약속을 지켜야지.

    -약속? 인어를 보면 알려 주기로 한 거?

    -그래. 최근에는 본 적이 없어?

    -있어! 아까 산테랑 이야기하던데. 붉은 머리 인어.

    그 붉은 머리 인어가 누구를 의미할지는 뻔했다.

    아리엘이다.

    그 소식을 듣자 오필리아는 확신할 수 있었다.

    산테를 제 곁에 둘 수 있을 거라고.

    “아리엘에게 뭍으로 보내 줄 수 있는 마법사에 대해 알고 있다고 했다면서요.”

    “그 자식, 자세히도 들었군.”

    “아이를 너무 풀어 키우니 그렇죠.”

    누굴 탓하겠는가. 단속을 안 한 놈 탓이지. 부주의하게 떠든 놈 탓이고.

    부정할 수는 없는 사실이라, 산테는 불만스럽게 제 머리칼을 한 번 헝클어뜨렸다.

    그런 산테를 보던 오필리아가 물었다.

    “왜 그렇게 한 거죠? 당신의 연식이라면 아리엘이 어째서 죽었는지 알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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