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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한 적 없다-62화 (62/118)

제62화

그러니 제가 무사하지 못할 이유 또한 없다.

오필리아는 더 돌아보지 않고 병동을 나섰다.

가만히 둬도 가라앉을 배를 지켜볼 마음은 없었다.

* * *

두고 온 과거는 생각보다 먼 곳에 있지 않다.

오필리아는 그 사실을 되새기며 회랑을 지났다. 병동을 방문했을 즈음도 어두운 시각이었기에, 사위는 여전히 어두웠다. 석조 건물을 울리는 구두 소리는 차가운 만큼 고독하게 느껴졌다.

정원으로 나서자 바람이 가볍게 오필리아의 머리칼을 훑고 갔다.

바다가 멀지 않아 짠내 섞인 것처럼 느껴지는 라딘의 공기는 오필리아를 매번 일깨우는 것 중 하나였다.

로넨의 공기는 이 습하고 더운 공기와 달리 한없이 차고 건조하므로.

그 차이가 오필리아에게 현실을 끊임없이 일깨웠다.

이곳은 꿈이 아니니, 너는 멈추지 말고 달려가야 한다고.

네가 바라는 이상향은 이 땅덩이에 없다고.

오필리아는 정원 한가운데에 놓인 분수로 자박자박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곧 카델리아가 온다.’

라딘 같은 시골 동네에 이 나라의 황녀가 둘이나 머물게 되는 아주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오필리아는 자신의 눈을 피해 이안과 릴리스가 전서구를 날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직감했다.

왜냐하면, 과거에도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으므로.

‘물론 그때는 릴리스와 이안이 전서구를 보낸 게 아니었지.’

이안에게도 릴리스에게도 그럴 이유가 마땅히 없었을 테니 당연하다. 편지를 보낸 것은 오필리아였다.

로넨 대공이 라딘의 해역으로 표류해 왔으니 조치를 부탁한다는 내용.

황제는 이때 답신을 보내 로넨 측과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는 로넨 대공을 라딘에 묶어 두라는 말을 전했었다.

로넨 대공을 구해 준 것을 빌미 삼아 로넨으로부터 한 탕 거하게 뜯어 가려는 수작임은 자명했다.

덕분에 이안은 얼떨결에 라딘에 두 달 남짓 머무르게 되었고.

‘이때 사랑에 빠졌지.’

다시 생각해도 동화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조난당한 끝에 찾은 운명적인 사랑이라니.

그렇게 두 사람이 수도로 돌아갔을 때는 카델리아가 라딘으로 가고 싶어 난리를 쳤다는 소문이 파다한 채였다.

그리고 크센트로부터 도착한 구혼장도 함께.

황제의 계획은 빤했다. 이번 일을 빌미로 이안을 카델리아와 결혼시키고 오필리아를 크센트로 보내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안이 내 손을 잡으면서 형국이 바뀐 거고…….’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결코 같지 않았다.

우선 오필리아와 이안에게 스캔들이 있었다는 부분이 가장 그러했다.

오필리아가 떠나기 전날 득달같이 달려와 뺨을 후려치려고 했던 카델리아였으니, 과연 이안과 오필리아가 라딘에 콕 박혀 있는 꼴을 견딜 수 있을까?

장담컨대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이안은 그걸 이용하겠지.’

그녀와 마찬가지로 모든 걸 알고 있는 그였으니 말이다.

오필리아에게 직접 말하지 않고 릴리스를 이용해 전서구를 보낸 것만 해도 빤하다.

덕분에 릴리스는 근신을 당했지만, 그 역시도 이안에게는 크게 신경 쓸 사안이 아니리라.

‘이안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니까.’

게다가 그 광기를 생각한다면 더한 짓을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다.

오필리아는 물이 거꾸로 떨어지는 분수 앞에 서서 그를 가만히 지켜보다, 품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가장 작은 단위의 동전 한 닢.

“소원이라도 빌 셈인가?”

그때,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오필리아가 몸을 틀자, 늘 그렇듯 떨어지는 깃털 몇 개와 함께 등장한 사내가 있었다. 평소에도 인사치레로 입던 옷이 밤을 맞아 조금 더 헐거워진 채로.

동전을 주먹 안으로 그러쥔 오필리아가 희미한 미소를 띠고 상대를 불렀다.

“산테.”

“놀라지도 않는군.”

“당신이 불쑥 등장하는 것에는 이제 제법 익숙해져서요. 애초에 내가 부른 것이기도 하잖아요?”

사실 그것보다는 바람의 기류가 바뀌어 눈치챘지만, 산테는 김이 샜다는 표정이었다.

“이래서 눈치 빠른 인간들이란.”

“다음엔 좀 더 장단을 맞춰 주죠.”

“됐다. 그보다 소원을 빌 거라면 빨리 하고 용건으로 넘어가는 게 어때?”

물론 나랑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부른 거라면 그것도 나쁘진 않겠다만.

장난스럽게 덧붙인 산테가 비뚜름하게 입매를 비틀었다.

“네 성정에 그럴 것 같지도 않으니.”

“왜요? 그럴 수도 있죠.”

“그것 참 대단한 기만이로군.”

산테의 낯 위로 떠올라 있던 미소가 옅어졌다. 미소를 거둘수록 밤을 삼킨 사내의 낯은 사나운 짐승의 태를 띠었다.

어느새 등을 돌린 오필리아에게는 보이지 않을 표정이었다.

그녀는 따뜻해진 동전을 도로 품에 넣었다.

소원 빌기 같은 그런 미신을 행하려는 것은 옳았으나, 장소는 이곳이 아니었다.

“갈 곳이 있어요, 산테.”

“예상은 했지만 이젠 아주 마차 취급이군.”

“아뇨, 당신만큼 이 근방의 지형을 잘 아는 사람도 드물 것 같아서 당신을 부른 거예요.”

지형 이야기가 나오자 산테의 낯 위로 떠올라 있던 장난스러움이 의문으로 바뀌었다.

“난 절벽을 찾고 있어요.”

떨어지면 누구든 죽을 수밖에 없는 곳으로.

“인근의 인적이 드물면 좋겠어요. 숲 같은 걸로 가려져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고.”

“퍽 위험한 곳을 찾는군.”

“아는 곳이 있나요?”

“날 너무 얕보는 것 같은데, 오필리아.”

이어진 오필리아의 물음에, 산테는 헛웃음을 지으며 제 어깨에 둘러져 있던 털 망토를 끌어 내렸다. 그리고는 오필리아의 어깨에 둘렀다.

“네가 다른 나라에 있는 지형을 물었어도 찾아다 줄 수 있어.”

둘의 체격이 워낙 차이가 났던 탓에, 오필리아는 망토를 둘렀다기보다는 망토에 완전히 말린 꼴이 되었다.

“밤에는 공기가 차니 앞으로 밤에 부를 거면 겉옷 정도는 챙기고.”

“고마워요.”

거절하지 않고 망토를 여민 오필리아가 가벼운 탄성을 내뱉었다.

“산테. 이 망토 겉으로 볼 때는 성겨 보였는데, 안쪽은 솜털이네요.”

“방한에는 제격이지.”

산테는 그렇게 말하며 오필리아를 덥석 안아 들었다.

“도와준 값은 제대로 받아 갈 테니 긴장하라고.”

머잖아 정원에서 인기척이 사라졌다.

* * *

밤의 창공은 산테의 말대로 찼다.

아마 그의 망토가 없었더라면 제법 떨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즈음, 산테가 지상으로 내려앉았다. 장소는 오필리아에게도 제법 익은 곳이었다.

“청록색 숲이군요.”

“네가 말한 지형이 모두 갖춰진 건 여기뿐이라.”

“이곳을 염두에 두긴 했어요.”

정말 이곳일 줄은 몰랐지만. 덧붙인 오필리아가 걸음을 뗐다.

산테의 말마따나 이곳은 그녀가 요구한 완벽한 지형이었다. 인적이 드물고, 울창한 숲도 있다.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면, 절벽까지도.

투둑.

절벽의 끄트머리로 몇 걸음 걸어가자, 오필리아의 발에 채인 돌 부스러기가 암초에 부딪혀 희게 거품을 만들어 내는 바다로 떨어졌다.

밤을 있는 대로 집어삼킨 탓에 바다는 그저 희고 검기만 했다. 까마득히 멀어 보이는 발아래서 파도가 끊임없이 철썩철썩 소리를 내며 암초를 핥고 있었다.

마치 제 위로 떨어질 먹잇감을 기다리며 입맛을 다시는 굶주린 맹수처럼.

그 검은 색깔이 오필리아의 목덜미를 섬찟하게 했다. 위험을 맞닥뜨렸을 때 이는 원초적인 생존 본능이었다.

그러니 물러서야 할 것이 옳았으나, 무슨 생각에선지 오필리아는 미동 없이 제 발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결국 보다 못한 산테가 입을 열었다.

“오필리아, 너무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좋을걸. 바람이 너무 불어서 갑자기 떨어지기라도 하면-”

“당신이 받아 줄 수 있나요?”

산테의 눈이 둥글어졌다가, 도로 크기를 줄이며 가늘게 변했다. 웃는 건지 화를 내는 건지 모를 모양새로, 산테의 입매가 비뚤어졌다.

“내가 네게 대단한 신뢰를 받는 모양이지, 그딴 질문을 다 하는 걸 보면.”

“예민하게 반응하지 마요. 내가 당신을 믿고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가늠해 보는 거예요.”

“그 작은 머리통에 무슨 생각이 든 건지 통 모르겠군. 그러다 실패하면 네 목숨 위험할 거란 생각은 안 하나?”

“그래서 동전을 챙겼어요.”

명계로 가는 뱃삯을 미리 내려고.

이어진 오필리아의 말에, 산테의 낯에서 허탈한 웃음이 두어 번 샜다.

“네가 왜 디안을 부르지 않았는지 알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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