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화 [S공금]
그녀의 얼굴에는 죄책감이 없었다. 위기감도, 불안도.
오필리아는 하이다르가 흔히 보던 약자가 아니었다.
-알레이가 유리를 제거해 주었다고 들었는데, 그래서인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는 낯빛이 좋아 보이는군요. 입막음을 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꼴을 보니 그럴 필요는 없겠고.
오필리아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더 지체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그녀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사과가 아닌 경고였다.
-당신이 어디까지 기억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음에는 지금보다 훨씬 험한 꼴을 당하게 될 수도 있어요. 그러니 쾌유하거든 행실을 살피는 쪽을 권유 드리죠.
자신은 사지 하나 꼼짝하지 못하고 누워 있는데. 그녀는 사지가 멀쩡한 것도 모자라 황족 특유의 품위까지 유지하고 있었다.
누가 보기에도 상하 관계는 명백했다. 그 사실이 가져다주는 모멸감에 얼마나 치를 떨었던지.
‘그런데 이제 와서는.’
신원 불명인 이들을 내 땅에 들이는 걸 협조하라고?
제대로 된 단어 하나 말하기 힘들어하는 입술에서 악에 받친 신음이 흘렀다.
“끄으…… 윽……. 이…… 이 건, 방진…….”
띄엄띄엄 나오는 하이다르의 말을 알아들은 오필리아의 푸른 눈이 청금석처럼 이채를 띠었다.
건방지다라.
“나는 그 말이 늘 신기하다고 생각했어요. 건방지다는 말은 내가 가장 많이 듣는 말이었는데.”
사실 신분만으로 따지자면 내게 건방지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거든.
오필리아가 허공 위로 회상을 덧그리며 말했다.
“사실 모두가 알고 있는 거죠. 내가 사생아라서 다들 그렇게 깔보는 게 아니라, 내가 그런 모욕을 들어도 되갚지 못할 사람이라서 그렇게 한다는 건.”
세력 하나 없는 황녀.
이것이 얼마나 초라한 단어인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오필리아라고 해서 왜 되갚을 줄 모르겠는가. 하물며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데.
오필리아는 하녀 태생이기는 해도 교육은 제 형제들과 동일하게 받았다.
꾸준히 황제 앞에 불려가 배운 것을 점검하는 시간도 가졌고, 황족으로서 가져야 할 기품과 우월감에 대해서도 꾸준히 주입받았다.
-밀레세트는 신의 가호를 받는 혈족이며, 부황께서는 이 메이너드 대륙의 가장 많은 땅을 가진 영주이십니다. 그러니 그 자식 된 이들 역시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아 마땅하며, 밀레세트의 고귀한 이름에 누를 끼치는 이들을 같은 이름으로 치죄할 자격이 충분합니다.
아버지 앞에서 이 문장을 몇 번이나 읊었던가.
성인식을 치르고 데뷔탕트에 나갈 때까지도 오필리아는 늘 마음 안쪽에 이 선언을 품고 살았다.
제가 아무리 사생아 황녀라고 한들 밀레세트의 이름을 달고 있는 한 자신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고 굳게 믿으며.
그러나 마주한 현실은 차갑고 초라했다.
위선의 가면으로 장식한 사교계는 신분이 통하지 않는 사회였으며, 오직 그들이 과시할 수 있는 재력과 권력만이 모든 것을 결정짓는 척도였다.
오필리아는 그때 처음 깨달았다.
보석 하나 달리지 않은 드레스를 입고, 아주 기본적인 품위 유지비만을 받는 황녀는 엊저녁 상경한 어느 시골 영애보다도 못한 존재라는 사실을.
시골 영애의 경우 화술과 재간이 좋다면 얼마든지 후원자를 찾아 사교계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 으레 나이 든 재력가들은 본인의 영향력을 직접적으로 표출하기보다는 젊고 뛰어난 피후견인들을 통해 사교계에 영향력을 발휘하곤 했으므로.
하지만 황녀처럼 거창한 간판을 피후견인으로 삼았다가는 복잡한 정치 문제에 얽히기 딱 좋았다. 아무리 좋은 재목이라 한들 섣부르게 제 그림자 안으로 들였다가는 황실에 출사표를 던지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질 여지 또한 컸으므로.
한입에 삼켜지지 않을 만큼 부피가 큰 주제에 속은 텅 비어 있는.
말하자면 빛 좋은 개살구.
그게 오필리아였다.
‘그러니 모두가 무시해도 이렇다 할 대응조차 할 수 없고.’
말하자면 현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고나 할까.
“다들 어쩜 그렇게 저보다 약한 사람 깔보는 일에 혈안인 건지……”
오필리아의 비소 어린 중얼거림이 날카롭게 흘러나왔다. 붕대에 감긴 상태라 꼼짝도 할 수 없는 하이다르의 손이 노기로 덜덜 떨렸지만, 그 사실을 신경 써 줄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그러다가 크게 당하면 억울해할 거면서 말이에요.”
“……으, 으…….”
“이야기가 샜군요. 용건이 아니고서야 오래 볼 사이도 아닌데.”
오필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가지고 온 물건을 꺼냈다.
척 보기에도 제법 고가로 보이는 황동 열쇠.
“이게 뭔지는 당신이 더욱 잘 알 테지, 하이다르 라딘.”
열쇠를 본 하이다르의 씨근덕거리는 숨소리가 더욱 거칠어졌다. 만약 하이다르가 조금이라도 거동할 수 있었더라면 벌떡 일어났을 것이다.
‘저 망할 계집이 저걸 어떻게 찾은 거지?’
분명 그 열쇠는 자신만 아는 곳에 잘 숨겨 두었는데.
대체 그걸 어떻게 알고!
의문은 금세 풀렸다. 순식간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하이다르를 고요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오필리아가 이렇게 되물은 것이다.
“이중 서랍은 이제 너무 고리타분하지 않나?”
“……!!”
“영주의 직인 정도 되는 물건이면 금고에라도 넣어 놓을 줄 알았는데, 서랍 하나 뜯었다고 나오기에 오히려 내 쪽이 실망스러워.”
주인이 있는 집도 아니고, 빈집에서 열쇠 하나 줍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건 열쇠가 아니라 열쇠로 위장된 직인이었지만.
“그렇게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큰 열쇠를 늘 몸에 지니고 다니면 아무래도 수상하게 보일 거란 생각은 못 했나? 라딘 성에서 그렇게 큰 열쇠구멍은 보지도 못했는데.”
“끄, 으……!”
“하지만 직인의 사용법은 도저히 알 수가 없더군. 아마 또 다른 열쇠를 끼워 해제하는 방식일 거라 생각은 들었지만.”
그걸 찾진 못했어.
이야기가 그에 이르자 하이다르가 결국 노기를 참지 못하고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침상에서 심하게 삐걱이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래 봐야 뭍으로 올라온 물고기의 발악이나 다를 바 없는 행동일 뿐.
오필리아의 손이 하이다르의 목을 겨냥했다. 그러나 그녀가 틀어쥔 것은 병자의 목이 아니라, 그에 걸려 있던 작은 펜던트였다.
이렇다 할 저항도 없이 투둑 뜯겨 나간 펜던트는 열쇠의 하단부에 더할 나위 없이 꼭 들어맞았다.
철컥. 장치가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열쇠의 걸쇠들이 후두둑 풀려나며 형태를 바꾸었다.
열쇠에서, 도장으로.
“직인을 그렇게 몸에 가지고 다녔으니 해제할 열쇠 또한 제 몸에 붙여 뒀겠지.”
한 치 예상도 엇나감이 없었다.
지겹기까지 했다.
오필리아는 멀쩡하지 못한 몸으로 발악하기 시작하는 하이다르를 두고 몸을 일으켰다.
“직인은 잘 쓰겠습니다, 영주. 다음엔 부디 대화가 가능한 상태로 마주했으면 좋겠군요.”
“으으, 윽, 끅-!”
병동의 침상이 덜컹이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하지만 하이다르는 이미 어항 속의 물고기 신세였다.
‘의사가 부러진 뼈가 붙고 상태가 나아지려면 4주는 있어야 한다고 했던가.’
그때면 이미 오필리아는 이곳에 없을 게 자명했다.
게다가 환자가 안정을 취해야 회복이 빠를 텐데, 하이다르는 안타깝게도 다혈질이었다.
-영주님께서 온종일 화가 나 계셔서 회복이 더디시더라고요. 워낙 자존심이 센 분이시니…….
라딘 성의 하녀장은 눈물을 콕콕 찍어 내며 그렇게 말했다.
현재 라딘 가문에 남은 사람은 하이다르 뿐인데, 이러다 명을 달리하시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는 말도 덧붙이며.
그러나 오필리아에게 하이다르 따위를 연민해 줄 마음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침상 위에서 눈이 시뻘게지도록 화를 내던 하이다르가 씨근덕거리는 숨 사이로 애써 말을 뱉었다.
“끄으, 으, 네, 네가…… 이러고, 도…….”
“내가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고?”
그 말에, 몸을 튼 오필리아가 정말 우스운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조소했다.
우스운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 말은 오필리아가 현실을 모를 때 한창 하던 것이었으니까.
“하이다르 라딘. 내가 그 말을 몇 번이나 했을 거라 생각해?”
몇 번이나 내 자존심이 짓밟히고, 몇 명이나 나를 무시했는지.
그때마다 저 말을 했지만, 글쎄.
“다들 무사하던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