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화
예니트는 숲에서 오필리아를 마주쳤을 때의 기억을 되살렸다.
세이렌의 수장과 자신이 그토록 기다렸던 상대, 그리고 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의 기억을.
“같이 있던 사람들 중 한쪽은 인간이 아닌 데다가 한쪽은 알레한드로 님이셨으니 분명하지는 않아. 하지만 분명 느꼈어. 그 여자에게서 이질적인 마력이 느껴졌어.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예니, 네 말은 오필리아 씨가-”
“알레한드로 님을 이용하려는 걸지도 모른다는 거지.”
비장하게 운을 뗀 예니트의 말이 이어졌다.
“알레한드로 님이 설령 흑마법을 사용하신 게 아니라고 해도, 그 여자는 수상해. 그런 이상한 마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특출난 능력 하나 없다는 것도 이상하고.”
“확실히 그건 이상하네.”
“그래! 그리고 알레한드로 님이 제대로 기억을 찾지 못하신 상황이잖냐. 물론 세이렌의 수장이 있으니 큰일이 날 것 같진 않지만, 어떤 입에 발린 말로 그분을 속였을지 몰라. 그분은 은근히 무른 데가 있다고.”
“상당히 잘 아는데, 예니…….”
“당연한 거 아니냐? 난 너처럼 상급반 졸업도 못한 병아리가 아니란 말이지.”
예니트는 으쓱하며 눈을 흘기듯 웃더니, 곧바로 다시 심각해졌다.
그녀가 이렇게 오필리아에 대한 경계심을 불태우는 이유가 또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까지 코르넬리한테 말할 수는 없지만.’
알레이의 방으로 오기 전.
코르넬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예니트와 코르넬리가 잠시 식당으로 자리를 비웠을 때. 예니트는 아무래도 불안한 마음에 훌쩍이는 코르넬리를 식당 의자에 앉혀 놓고 서둘러 알레이에게로 돌아갔었다.
그리고 보인 것은, 오필리아의 손에 낯을 기대고 있는 그녀의 우상이었다.
어느 쪽이 정신적으로 더 우위에 있는지는 명백한 일이었다. 오필리아는 태연했고, 알레이는 낯을 조금 붉히기까지 한 채로 그녀의 손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으므로.
‘알레한드로 님을 본인 솔정처럼 다루다니.’
물론 지금은 알레이가 부하가 맞긴 하지만. 오필리아는 알레이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런 취급을 한다는 건 결국 깔보고 있다는 것과 다를 게 없지 않나?
마탑에서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예니트는 확신했다. 오필리아가 알레이를 꼬여 내 제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한다고.
“난 그 여자 마음에 안 들어. 능력 하나 없으면서 수상한 건 다 짊어지고 있다니 말이 돼? 알레한드로 님을 어떻게 꼬여 낸 건지는 몰라도 내가-”
그때.
벌컥 문이 열렸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나갔던 사람이 아닌 조금 전까지 예니트가 실컷 의심하던 상대였다.
예니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들었나?’
문 바로 너머에 있었다면 목소리가 들렸을 법도 했다. 예니트는 바짝 긴장했지만, 오필리아는 예니트와 코르넬리에게 미소 지은 채 가볍게 고개를 까딱여 인사해 준 뒤 몸을 물릴 따름이었다.
“이것 봐요, 알레이. 잘들 있는 것 같네요. 걱정할 필요 없다니까요.”
“걱정이라니. 그런 적 없습니다.”
어째서인지 조금 낯이 붉어진 알레이가 따라 들어왔다. 속없는 코르넬리가 또 불쑥 입을 열었다.
“혹시 저희를 걱정하셨나요, 알레한드로 님?”
“그런 적 없다니까.”
“타지까지 왔는데 덜렁 남겨 두기가 신경 쓰인다고 계속 그러더라고요.”
오필리아의 너스레에 알레이의 낯이 더욱 구겨졌지만, 반대로 코르넬리의 낯은 활짝 개었다.
“저 같은 걸 신경 써 주시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아, 아니…….”
“저도 얼른 상급반을 졸업하고 알레한드로 님의 보좌가 되고 싶어요! 이 은혜를 곁에서 갚겠습니다!”
“뭐야, 넬리? 그건 내 자리야. 탐내지 마.”
예니트가 발끈하자 코르넬리가 다시 맞받아치는 통에 옥신각신하는 형국이 되었지만, 그리 오래지는 않았다.
오필리아가 부른 시종장이 두 사람에게 머물 곳을 안내하기 위해 찾아온 탓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전하. 이분들이 말씀하신 분들이십니까?”
“그래. 두 분 모두 어렵게 모신 분들이니 좋은 방을 배정해 주었으면 하는데.”
“전하의 손님이시니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시종장이 깍듯하게 대답하고 방을 준비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자, 예니트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물었다.
“오필리아. 왜 알레한드로 님의 손님이 아닌 거죠?”
“이곳에서는 내가 신분이 더 높으니까요. 그리고 알레이는 본인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길 원하고.”
오필리아가 가볍게 설명하자, 알레이가 뒤늦게 말을 받았다.
“오필리아의 말대로다. 마탑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나는 마탑의 주인이 아니니, 너희도 그런 이야기에 대해서는 함구해 주었으면 하는데.”
“알레한드로 님께서 원하신다면 그렇게 해야죠!”
“함구하겠습니다.”
예니트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대화는 거기서 끊어졌다. 시종장이 그들 사이를 다시 비집은 탓이었다.
예니트의 의뭉스러운 시선은 방을 나갈 때까지도 오필리아에게 머물러 있었다.
* * *
물론, 오필리아 역시 예니트가 자신을 의심 어린 눈초리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예니트의 말 역시 들었다.
바람이 불어와 문이 살짝 열려 있었던 탓이었다.
그 틈으로 새어 나오는 이야기가 한 발 앞서 있던 오필리아의 귀에 들렸고, 그녀는 재빨리 조치를 취했다.
알레이가 이야기를 듣지 못하도록 심부름을 부탁한 것이다.
-알레이, 가서 시종장을 좀 불러와 주겠어요? 방을 배정해야 하니까요. 당신이 이동에는 빠르니 부탁 좀 할게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알레이는 별다른 의심 없이 오필리아의 요청에 응했다.
다행인 일이었다. 알레이가 그 이야기를 듣고 예니트에게 날을 세우기라도 했다면 오필리아의 계획이 상당히 틀어졌을 테니 말이다.
‘예니트는 알레이의 기억을 찾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줄 열쇠야.’
그러니 둘의 사이를 원만하게 유지하는 것은 몹시 중요한 일이었다.
물론 자신을 그렇게 경계하는 건 조금 아쉬운 일이지만.
‘예상한 일이니 어쩔 수 없지.’
그 부분은 어렵지 않게 해결할 자신이 있었다.
하여 오필리아는 그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을 찾아갔다.
그녀가 은밀히 불러들인 두 마법사의 신원을 처리하는 문제였다.
라딘 성에서 오필리아의 입김은 상당히 큰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어디까지나 손님의 위치에서였다.
그러니 그녀가 다른 이들을 라딘 성에서 지내게 하려면 영주의 허가가 필요했다.
바로 하이다르 라딘의 허가가.
“그래서 찾아왔어요. 하이다르 라딘. 생각보다 상태가 좋아 보이는군요.”
그때는 꼼짝없이 죽을 줄 알았는데.
오필리아의 고요한 목소리가 병동의 스산한 적막을 깼다.
그녀는 침대 옆의 간호용 의자에 앉아 온몸이 붕대로 감긴 하이다르를 무심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만신창이가 된 패자를 내려다보는 눈길에는 한 점 자비조차 없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늘 그렇듯 관조적이고 차분했다. 누군가 얼핏 듣는다면 제법 상냥하게 느껴질 만큼.
“당신 성이 곧 제법 주목을 받게 될 텐데, 그 전에 수상한 인력들은 웬만큼 해결해 두고 싶어서 말이에요. 신원이 불분명하면 아무래도 곤란해서.”
그 괴리는 곧 기만이었다. 저 시선을 고스란히 받고 있는, 침상 위의 병자에게만 느껴질 기만.
그녀는 지금 하이다르에게 신원이 불투명한 이들의 신원 증명을 협조해 달라 요구하고 있었다. 그것도 조금도 굽히지 않고, 아주 고자세로 말이다.
온몸이 붕대로 뒤덮여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하이다르의 눈이 맹렬한 증오를 품고 오필리아를 향했다.
저 빌어먹을 황녀가 자신을 이 꼴로 만들어 놓은 날부터 그는 단 한 순간도 오필리아에 대한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
그가 이 꼴이 된 날,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이다르는 기억하지 못했다.
그가 기억하는 것이라고는 오필리아의 기를 죽여 놓으려던 순간, 그의 등을 들이받은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여파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됐다는 것도.
자세한 건 기억하지 못해도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던 걸로 보아 정황은 확실했다.
‘저년이 시종을 시켜서 날 습격한 거겠지.’
수도에서는 아무 힘도 없는 황녀 주제에, 저 같은 시골 영주에게는 함부로 대하기가 이루 말로 할 수 없다. 그 사실에 하이다르는 매번 부아가 치밀었다.
게다가 자신이 이 처지가 된 이후 오필리아가 한 번 찾아온 적이 있었다.
하이다르는 분명 오필리아가 제 죄가 발각될까 두려워 용서를 구하러 온 것이리라 짐작했지만.
-말은 제대로 할 수 있나요?
찾아온 오필리아가 가장 먼저 뱉은 질문은 이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