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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한 적 없다-59화 (59/118)
  • 제59화

    알레이는 그 골에 설 때면 늘 스스로가 끔찍이도 싫어졌다.

    그는 그토록 싫어하던 속 좁은 인간이 되었고, 이성을 쉽게 잃었다. 이게 추태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추태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분이 가라앉질 않아 차마 먼저 입을 열지는 못했지만, 조금 전 일 역시 명백한 알레이의 잘못이었다.

    “그렇게 발끈할 일이 아니었다는 것도, 내가 과했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걸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몸서리가 쳐지게 싫어서…….”

    잘못했다는 걸 알면서도 그 말이 도저히 나오질 않는다.

    지금 이 말을 하는 것도 제 치부를 밝히는 것처럼 거북했다. 낯이 뜨겁다는 게 느껴졌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오필리아의 눈에는 낯이 적잖이 붉어 보이리라.

    또 추태를 보이는 셈이지만, 오필리아의 앞에 서면 알레이는 도저히 스스로를 주체할 수 없다고 느끼곤 했다.

    알레이는 결국 시선을 바다 쪽으로 돌려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돌아간 고개 너머 귀까지 붉어졌다는 걸 그가 알기나 할까.

    오필리아는 바람결에 날리는 붉은 머리칼을 제 귀 뒤로 넘겨 고정시키며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낯선 고해 앞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멈추었던 입술은 머잖아 물음을 하나 뱉어 놓았다.

    “그러니까, 당신은 내 이름을 부르는 게 어려웠는데도 꿋꿋이 불러 댔다는 거죠?”

    “……당연히 지적을 당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황녀의 이름을 한갓 말단 마법사가 멋대로 불러 대는 게 가능할 리 없으니, 오필리아가 지적하거든 고치려 했다는 뜻이다.

    “처음에는 당신을 신뢰할 수 없었으니 말이 날카롭게 나갔는데, 그걸 그대로 둘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해서…….”

    “그래서 얼떨결에 계속 불렀다는 거군요.”

    제 이름을 부르는 일이 무례라는 걸 알아서 거북하다 느꼈음에도 꿋꿋이 불러 댄 그 자존심과 고집도 알 만하다.

    “정정했으면 하십니까?”

    “아뇨. 이제 귀에 익었어요. 난 이름 불리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정확히 말하자면, 알레이는 과거에도 오필리아를 이름으로 불렀다.

    이유는 간단했다.

    오필리아 본인도 황녀 전하라는 호칭을 거북해 했던 탓이다.

    그 명칭은 오필리아에게 끊임없이 그녀가 속한 곳을 일깨웠다. 그리고 그녀가 온전하게 인정받을 수 없는 사생아 황녀라는 것도.

    그래서 그녀는 사적인 친분이 쌓인 상대에게는 이름을 허락하는 편이었다.

    -그냥 이름으로 불러요, 알레이. 우리 그럴 만한 사이는 되지 않나?

    -그래도 되는 겁니까? 불경죄로 잡아가실 생각은 아니시리라 믿겠습니다.

    그렇게 이름을 처음 허락한 상대가 알레이였다.

    그래서일까.

    “당신은 날 이름으로 불러 줬으면 좋겠어요.”

    이런 마음이 드는 건.

    아니, 어쩌면 알레이가 제게 보여 주는 마음이 진솔한 탓일지도 모른다.

    전생에 그가 자신을 속였다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은 일로 치부하고 싶어질 만큼 알레이의 마음은 올곧았다.

    그리고 그것은 오필리아가 한때 알레이에게 가졌던 순수한 호의와 많은 부분이 닮아 있었다.

    예를 들어 내게 귀한 상대가 다른 이들에게 함부로 대해지는 것으로 화가 난다는 것 같은 부분. 그리고 상대를 아끼는 만큼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부분까지도.

    오필리아 역시 그런 감정을 종종 느끼곤 했다. 그래서 그녀는 알레이의 손을 잡았다. 썰물에 모래알이 와르르 굴러가는 해변에서, 그녀는 해풍을 빌어 말했다.

    “알레이, 당신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해서 기뻐요.”

    당신이 날 그만큼 아껴 준다는 것이 기쁘고, 우리가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것이 기쁘다.

    “……당신도 그런 생각을 합니까?”

    “왜 하지 않겠어요?”

    알레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오필리아는 헛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스스로의 무능함에 대해서는 이미 이골이 난다.

    하늘을 날 수 있는 사람과 격랑을 단숨에 잠재울 수 있는 사람들 틈에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제 무능에 대해서 돌아보기 마련이므로.

    ”잘 생각해 봐요, 알레이. 당신은 마법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가진 능력이 없잖아요. 그러니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내가 당신에게 빌붙으려고 한다고 생각하기 쉽지 않겠어요?”

    사실 본질이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니 그런 말을 듣는 대도 할 수 있는 말은 없지만.

    그렇게 덧붙이자 알레이는 사색이 되었다.

    “누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겁니까? 애초에 나는 당신이 빌붙는다고, 아니, 그런 저열한 단어를 쓸 생각도 못했는데-”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고맙네요.”

    하지만 사람한테는 많은 기대를 거는 게 아니다.

    오필리아는 이 족속들을 아주 잘 알았다. 자신의 계획을 알게 된다면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할지도.

    “당신은 그러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내가 선택한 사람이 당신이라서. 당신이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아마 당신은 모를 것이다. 오필리아의 말에 알레이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게 다행입니까? 당연한 일을.”

    “다행이죠.”

    그러지 않으면 회유하는 데에 또 시간을 써야 했을 테니.

    뒷말을 삼킨 채, 오필리아는 예니트를 떠올렸다.

    크게 드러내려는 의도는 없어 보였으나 자신을 경계하던 눈빛까지는 숨기지 못하던 그 얼굴.

    “알레이, 예니트와 코르넬리를 두고 나왔다고 했죠.”

    “예.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할 때가 된 것 같은데.”

    “그래요, 돌아가요. 당신도 충분히 진정이 된 것 같고.”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 궁금하네요.

    * * *

    “그 여자 수상해.”

    “누구?”

    “누구겠어? 오필리아 밀레세트 말이야. 알레한드로 님과 함께 있던 그 여자.”

    예니트가 책상을 탕탕 내리치며 어리숙한 제 친구에게 핀잔의 눈길을 날렸다.

    코르넬리는 가방에서 주섬주섬 안경을 꺼내 쓰는 중이었다. 그렇잖아도 동그란 얼굴에 동그란 안경을 끼니 더욱 경계심 하나 없이 세상물정 모르는 얼굴이 되었다.

    “나는 그 사람 괜찮아 보이던데.”

    거기다 이런 어리숙한 말을 경계심 하나 없는 말투로 하기까지.

    예니트는 다소 답답해졌다. 코르넬리가 마탑 안에서만 지내다 보니 외부인에 대한 경계심은 죄다 사라져 버린 걸까?

    ‘아니, 그보다 얘는 원래 이런 쪽이기는 하지.’

    어릴 때부터 야무지다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예니트와 달리 순박하기 이를 데 없어 매사에 둥글기만 한 코르넬리 듀랑.

    코르넬리는 이 사태의 심각성도 모르고 헤실거리는 중이었다.

    “알레한드로 님 곁에 있는 분이라면 분명 좋은 분이시겠지. 실제로 난 첫인상도 그리 나쁘지 않았는걸.”

    “멍청아. 그렇게 사람을 덥석덥석 믿으면 어떡해? 무엇보다, 알레한드로 님은 아직 기억이 온전치 않으시다고.”

    “아, 그건 정말 그런 것 같더라. 마탑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시는 걸 보면…….”

    “그래. 그리고 원래 마탑의 형벌은 한 순간에 끝나는 건데, 조금만 기억이 돌아왔다니 이상하지 않아?”

    예니트의 눈이 날카롭게 반짝였다. 풀리지 않는 의구심과 경계심이 가득한 눈이었다.

    “하지만 그분이 알레한드로 님이 아닐 리 없잖아.”

    “알레한드로 님이 아니라는 말을 하려는 게 아냐, 넬리.”

    알레이와 대화를 나누는 내내, 예니트는 알레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기억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물론 기억하는 것도 많기는 했다. 그 천재적인 마법식 구성 능력이나, 마력 같은 것들. 덕분에 예니트는 알레이가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난 알레한드로 님이 거짓말을 하고 계실 가능성을 얘기하는 거야.”

    “하지만 그럴 이유가 있어? 너도 느꼈잖아. 알레한드로 님이 흑마법을 쓰신 게 아니라는 걸.”

    “숨기고 있을 가능성도 있지.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알레한드로 님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야.”

    예니트의 말에 코르넬리가 코웃음을 쳤다.

    “너는 늘 경계심이 너무 많은 게 탈이라니까, 예니. 네가 알레한드로 님을 간만에 만나서 경계하는 것도 이해하지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야. 저번에는 고양이 그림자를 보고 성에 마물이 쳐들어온 줄 알았다면서.”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그래. 이거지. 그리고 넌 머리를 좀 식힐 필요가 있어. 기껏 알레한드로 님을 만났잖아. 그럼 된 거 아니겠어?”

    “아니,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물론 나도 이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지만…….”

    예니트는 그렇게 말하더니, 잠시 목소리를 낮췄다.

    “오필리아 밀레세트. 그 여자를 숲에서 만났을 때.”

    분명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마력이 그 여자한테 섞여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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