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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구한 적 없다-58화 (58/118)
  • 제58화

    알레이는 그 말을 뱉고서야 자신이 상당히 화가 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소 이렇게까지 화가 날 일이 없었더니, 조금 전 그 이성 끊기는 감각이 화가 난다는 감각이었다는 사실도 한 박자 늦게 깨닫고 만 것이다.

    이성이 끊기자 늘 억누르고만 있었던 마력이 날뛰듯 움직였다. 굳이 계산식을 구성하고 읊어 낼 필요도 없었다.

    알레이 정도 경지에 이른 마법사들은 흔히 무언 마법이라는 것을 쓸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생각하는 것을 곧바로 현실로 옮겨 낼 수 있는 수준인 셈이다.

    그것을 억누르기 위해 평소에는 힘의 10분의 1도 되지 않는 수준으로 사용하고 있었다면, 지금은 그런 제어 장치가 없었다.

    아니. 사실 이 정도도 충분히 많이 참고 있는 것이었다.

    알레이가 정말로 이안을 죽이고자 했다면 그가 단번에 만들어 낼 수 있는 살상 마법은 스무 종류가 넘어가므로.

    그가 참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 일이 그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러나 그조차도 겉으로 보자면 무지막지한 힘에 해당했다.

    ‘알레이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보니 또 감회가 새롭네.

    오필리아는 이안에게서 몇 발짝 멀어져 호흡을 고르며 생각했다.

    격랑이 이는 바다를 단숨에 잠재우는 것을 보았을 때와 비슷한 놀람이었다.

    물론 알레이가 마법을 쓰는 것은 자주 보아 오긴 했다. 평소 그것이 가벼운 폭죽을 터트리는 정도에 불과했다면, 이것은 집채로 타고 있는 불길을 목격한 기분이었다.

    제 말 몇 마디에 유순히 고개를 주억거리는 이 사내가 어떤 사람인지 새삼 느껴지는 듯한.

    그녀가 알기로 이안을 무력으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몇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이안을 저렇게 꼼짝도 못하게 만들 수 있다니.

    ‘하지만 이렇게는 위험해.’

    강한 힘은 도덕의 앞뒷면을 모호하게 만든다.

    오필리아는 알레이의 손을 붙들었다. 금빛 안광이 서린 눈동자가 오필리아를 향했다. 그것이 어딘지 인간의 것 같지 않다고 느껴진다면 과장일까.

    본능적인 두려움이 오필리아를 엄습했다. 맨몸으로 맹수를 마주했을 때의 소름 같은 것.

    산테를 마주했을 때도, 그 어떤 위협을 마주했을 때도 느껴지지 않았던 감정이었다. 그것이 아마 알레이가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에 대한 방증이리라.

    그리고 이것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이 힘이 알레이 스스로마저 위험하게 만들 것만 같았다. 형용할 수 없으나 그런 기분이었다.

    그래서 오필리아는 가까스로 손을 놓지 않았다. 애써 붙든 채 입을 열었다.

    “알레이. 그만해요.”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당신을 함부로 대한 작자입니다.”

    “그래서 정말 죽이기라도 할 생각인가요? 이러다 정말 위험해질 것 같으니까 그만해요.”

    “오필리아. 설마 저자를 연민하시는 겁니까?”

    그의 물음에 오필리아의 시선이 이안을 흘긋 바라보았다가 다시 돌아왔다.

    맹금류의 것처럼 형형히 빛나는 샛노란 눈동자는 그때까지도 미동 없이 오필리아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 갈고리 같은 시선을 붙든 채, 오필리아는 입을 열었다.

    “연민이 아니에요. 난 당신을 걱정하는 거예요.”

    “……나를? 이건 아무렇지도 않은,”

    “알레이. 이건 파도를 잠재우는 일이 아니에요.”

    처음부터 그렇게까지 대단한 일도 아니었고, 그렇게까지 힘을 써야 할 일도 아니었다. 어느 쪽이 더 쉽고 어려운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알레이가 어떤 선을 넘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다.

    “이러다 당신이 감정에 휩쓸려 실수로 이안을 죽이기라도 하면, 다음에도 그러지 않을 거란 보장이 있나요? 혹시 그 다음에 당하는 건 내가 되나?”

    “오필리아, 그런 말은…….”

    “그러려는 게 아니라면 당장 풀어요.”

    지금 당장.

    그녀의 말에 흉흉했던 알레이의 낯이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맹수처럼 보였던 낯이 비 맞은 강아지처럼 변하자마자, 바닥에 납작 엎드려 버티던 이안이 튕겨지듯 풀려났다.

    “콜록, 콜록!”

    그러나 여전히 짓눌렸던 충격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해, 이안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바닥에 엎드려 죽을 듯이 콜록대고 있었다.

    오필리아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몸을 틀었다.

    한결 누그러들기는 했으나, 여전히 적의를 감추지 못하는 알레이가 곁에 있었다.

    ‘다른 일도 해결해야 하지만.’

    우선 이쪽부터 해결해야겠군.

    속으로 한숨을 내쉰 뒤, 오필리아는 알레이의 팔을 살짝 당겼다.

    “우리 잠깐 바다나 볼까요, 알레이.”

    “……당신이 원하신다면.”

    그렇게 그들은 자리를 떴다.

    남겨진 이안과 그가 넘어뜨린 것들만이 바닥을 구를 뿐이었다.

    * * *

    “콜록, 콜록!”

    이안은 얼굴이 벌게질 때까지 기침을 하며 호흡을 고른 뒤에야 겨우 몸을 일으켰다.

    갈비뼈가 부러지지 않은 게 용할 지경이었다. 아마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진즉 장기가 터졌을지도. 그러나 이안 역시도 짓눌린 몸이 비틀거리는 것까지는 막을 길이 없었다.

    퉤, 침을 뱉자 피가 섞여 나왔다. 조금 전 버티기 위해 악을 쓰느라 볼을 짓씹은 탓이었다. 그는 입가를 닦으며 어금니를 으득 씹었다.

    ‘그 염병할 새끼.’

    알레한드로의 능력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왔지만 경험한 것은 처음이었다. 자신이 벌레처럼 버둥거릴 동안 그는 낯빛 한 번 바뀌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건지.

    ‘그런 놈을 오필리아의 옆에 둘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그 태도.

    분명 자신을 보는 낯은 맹수의 것처럼 흉흉했다. 그러나 오필리아의 손이 닿자, 그는 말 몇 마디에 녹아내렸다.

    당사자는 느낄 수 없다고 해도 곁에서 지켜본 입장으로는 확연히 와 닿는 변화였다.

    오필리아는 알레이와 그녀의 관계가 단순히 친구에 불과하다고 했지만, 정말 알레이에게도 그럴까. 설마 했더니, 예상했던 일이 그대로 벌어졌다.

    테이블을 짚은 이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우선 그놈을 떼어 내야겠군.’

    그 다음 다시 오필리아와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았다.

    그때는 오필리아도 자신을 버리겠다는 마음을 고쳐먹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래야 했다.

    다짐을 거듭하며 숨을 들이켜는 이안의 낯이, 회한의 빛을 띠고 있었다.

    * * *

    철썩, 파도가 치는 해안.

    백사장을 밟고 선 오필리아가 알레이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마음은 좀 가라앉았나요?”

    “……진정은 됐습니다.”

    여전히 썩 안색이 좋지 못한 알레이가 대답했다.

    조금 전 알레이가 오필리아를 데리고 순간이동을 써 해안에 도착한 이후 그는 내내 저런 얼굴이었다.

    불만은 여전하지만 굳이 언급하지 않고 제 속으로 삭여 보겠다는 얼굴.

    오필리아에게 왜 이안의 방까지 찾아갔는지, 그리고 다른 마법사들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기억을 되찾을 실마리를 찾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알레이의 표정은 나아질 낌새가 없었다.

    “내가 말을 세게 해서 그런 표정인 건가요?”

    “아니, 그런 게 아닙니다. 당신에게 화가 난 게 아니라.”

    알레이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심호흡을 할 시간이 필요했던지. 그는 숨을 고른 뒤 겨우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을 아무렇게나 대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 싫습니다.”

    정말 몸서리가 쳐지게 싫었다.

    제게는 오필리아가 차마 닿을 수도 없이 반짝이는 상대로 보이는데. 어째서 다들 그렇게 함부로 대하지 못해 안달인 건지.

    자신이 목격한 일들과 목격하지 못했던 일들이 겹쳐 보인다. 그 위로 테라스에서 꽃비 흩날리듯 떨어지던 오필리아도.

    테라스와 지상은 제법 높이가 있었고, 심지어 그 주변에는 날카로운 정원용 펜스도 둘러져 있었다. 만약 자신이 받지 않았더라면 오필리아는 그때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는다.

    그런데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오필리아의 주위로 그녀를 떠미는 손이 보이는 기분이었다.

    모두가 오필리아를 벼랑으로 떠밀고 있었다. 이런 현실에서라면 알레이는 오필리아의 투신을 탓할 수도 없었다.

    그는 그것이 싫었다.

    “당신을 존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왜 다들 당신을 가만히 두지 못해 안달인 겁니까? 그 부관이라는 여자도, 당신 이복동생도, 영주도, 하다못해 저 남자까지…….”

    나한테는 당신만큼 빛나 보이는 사람이 없는데. 나한테는 당신만큼 고귀한 사람이 또 없는데.

    “나는, 당신 이름 부르는 것도 늘 무겁다고 여기는데…….”

    결국 돌고 돌아 다시 이곳이다.

    제 낮은 위치와 상반된 높다란 자존심 사이, 균형이 맞지 않아 움푹 파인 골.

    자신이 저열해지고 치졸해지는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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